조문명(趙文命)
데 주력, 노·소론의 준론자(峻論者)들로부터 세상사람을 속이고 우롱한다는 배척까지 받았지만, 영조 초의 소론계의 반란[李麟佐의 亂]과 계속되는 역모 적발로 불안했던 왕권의 안정과 확립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또, 노비종부법(奴婢從父法)의 폐지, 조운수로(漕運水路)의 편의를 위한 안흥목[安興項]의 개척, 주전(鑄錢)의 필요성 역설 등과 같이 민생 문제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소론이면서도 외가(光山金氏 萬均)와 처가(安東金氏 昌業)가 노론 집안이어서 노론계 명사와 널리 교유하였다. 특히 송인명, 김재로(金在魯) 등과 매우 친밀하였다. 후일 영조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글씨에 능하여 청주 삼충사사적비(三忠祠事蹟碑)·북백곽재우묘표(北伯郭再祐墓表) 등이 전하고, 『학암집』 4책이 남아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