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산창은 1760년(영조 36) 진주에 설치되어 경상도 서남부 일대의 세곡을 보관하던 조창이다. 17세기 이후 경상도의 세곡은 서울의 경강선 또는 군현이 보유하고 있는 지토선 등으로 운반하였다. 그러나 이 선박들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선박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주들의 농간이 개입될 여지가 많았다. 조선왕조는 경상도의 세곡 운송을 공적인 영역으로 전환하고자 진주, 창원, 밀양 등 3곳에 각각 조창을 설치하였다. 그중 가산창은 진주, 곤양, 하동, 단성, 남해, 사천, 고성 등 7읍의 세곡을 보관하고 운송하였다.
1403년(태종 3)에 발생한 경상도 조운선의 대규모 해난 사고로 경상도의 조운제도는 폐지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경상도는 각 군현이 보유하고 있던 선박인 지토선(地土船)이나 서울 상인이 소유한 경강선(京江船) 등을 활용하여 경상도의 남부 지역의 세곡을 운송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와 전라도에 비해 운항 거리가 멀고, 세곡 과적으로 인해 해난 사고가 자주 발생하였다. 경상도 세곡 운송에 많은 차질이 발생하자 조선왕조는 1760년(영조 36) 진주에 가산창(駕山倉), 창원에 마산창(馬山倉)을, 1765년(영조 41)에는 밀양에 삼랑창(三浪倉)을 각각 설치하였다. 이를 경상도 3조창(三漕倉)이라고 한다. 그중 진주 가산창은 우조창(右漕倉)이라고 하는데, 진주, 곤양, 단성, 사천, 남해, 하동, 고성 등 7개 군현의 세곡을 보관하고, 운송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왕조가 건국된 직후 경상도의 세곡은 경상남도 김해 불암창(佛巖倉), 창원 마산창(馬山倉), 사천 통양창(通陽倉)을 통해 중앙의 세곡 창고인 경창(京倉)으로 상납되었다. 그러나 1403년(태종 3) 발생한 경상도 조운선의 해난 사고로 경상도의 조창(漕倉)은 전면 폐지되었다. 이 사건은 전라도 앞바다에서 조운선 34척이 침몰하여 조군(漕軍) 1,000여 명이 사망하고, 쌀 10,000여 석이 손실된 대참사였다. 이 사건 이후 경상도의 세곡은 모두 육로로 충청도 충주 가흥창에 수납하게 하였다. 충주 가흥창에 수송된 세곡은 다시 강선(江船)에 적재되어 남한강을 경유하여 경창으로 상납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17세기 초반 경상도 남해안 일대 군현은 자체적으로 세곡을 중앙으로 상납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각 군현에서는 스스로 세곡을 보관할 창고를 만들었는데, 경상남도 진주 장암창(場巖倉)과 양산 감동창(甘同倉)은 그 대표적인 창고이다. 이 창고들이 비록 세곡을 보관하는 창고이지만, 국가에서 정식으로 만든 조창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漕船)과 조군이 배치되지 않았다. 따라서 장암창과 감동창의 세곡은 각 군현의 지토선이나 서울의 경강선에 적재되어 중앙으로 운송되었다. 지토선과 경강선을 보유하고 있는 선주들은 많은 이익을 확보하고자, 배가 떠나는 날과 적재량을 어기는 경우가 많았다. 조운 규정 위반에 따라 지토선과 경강선 등은 바다에서 해난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에 따라 인명 피해과 국가 재정 손실이 야기되었다.
결국 조선왕조는 경상도 세곡 운송 문제를 해결하고자 장암창과 감동창을 대체할 조창을 설치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3조창이다. 3조창은 진주 가산창을, 창원 마산창, 밀양 삼랑창을 지칭하는데, 가산창을 우조창, 마산창을 좌조창, 삼랑창을 후조창이라 불렀다. 좌조창과 우조창은 1760년(영조 36) 경상도 관찰사 조엄(趙曮)의 건의로 설치되었고, 후조창은 1765년(영조 41) 우참찬 이익보(李益輔)의 건의로 추가 설치되었다.
우조창인 진주 가산창에는 조운선 20척이 편성되어 있었다. 각 선박에는 사공(沙工)이 1명, 격군(格軍)이 15명 등 16명이 배치되었고, 이들이 실제 조운선에 승선하여 항해하였다. 다만, 16명이 오랜 기간 항해하는 동안 이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보인을 2명씩 지급해 주었는데, 이를 조보(漕保)라고 한다. 또한 각 선박에는 배를 지키는 선직(船直) 2명도 배치되었다. 이를 통해 보면 조운선 1척에는 사공, 격군, 조보, 선직 등 총 50명이 편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산창은 진주, 곤양, 하동, 단성, 남해, 사천, 고성 등 7읍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서울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역할을 맡았다. 각 조창에는 총책임자인 도차사원(都差使員)과 조운선을 이끌고 항해하는 인솔자 영운차사원(領運差使員)이 각각 임명되었는데 가산창의 경우 진주목사가 도차사원을, 적량진첨절제사(적량첨사)가 영운차사원을 각각 겸직하였다. 경상도 3조창은 1월 30일에 개창하고, 2월 30일까지 소속 군현의 세곡을 모두 수봉한 다음 3월 25일 이내 조운선을 발선하여 5월 15일 내에 도착하게 하였다.
18세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여지도서』에 따르면, 가산창은 진주 관아의 남쪽 40리의 진주 부화곡리(夫火谷里)에 위치하였다고 하며, 3월에 세곡을 적재하여 경창으로 출발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산창이 위치했던 현 축동면 가산리는 가화강이 사천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하구 지점에 해당하며, 가산창의 바로 서쪽인 현 축동면 구호리에는 장암창이 위치하였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3조창 중심의 세곡 운송 체계는 점차 균열되는 조짐을 보였다. 목재 수급의 어려움으로 인한 조운선 부족, 조창이 설치되어 있는 군현의 내부적 문제, 조군에 대한 침탈 등이 그 대표적인 이유였다. 이와 같은 요인은 잦은 조운선의 침몰 사고를 야기하였고, 이는 수많은 인명 피해와 국가 재정 손실을 가져왔다.
조운제도가 총체적인 난항에 부딪히자 1880(고종 17) 조선왕조는 조운제도의 개혁 법령인 『조폐이정사목(漕弊釐正事目)』을 반포하였다. 이 사목은 주교사(舟橋司) 중심으로 세곡 운송 체계를 일원화하고, 선박을 임대하여 세곡을 운송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운선이 부족할 경우 수군진의 전선(戰船)을 조운선으로 활용하도록 하였다. 심지어 1882년(고종 19)에는 관료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증기선과 범선을 세곡 운송에 적극 활용하였다. 경상도에는 창룡호, 현익호, 이운호 등 증기선이 배치되어 세곡을 운송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기선 구입에 따른 과도한 채무, 새로운 부가세 부과, 종래 조창으로의 접근 어려움 등의 문제로 증기선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1895년(고종 32) 조세금납화의 채택으로 세곡 운송의 필요성이 없어지자, 조선왕조는 같은 해 조운제도를 폐지하였다.
진주 가산창이 설치되기 이전 경상도 서남부 지역의 세곡은 진주 장암창에 보관되어 수송되었다. 장암창은 진주에서 사적으로 만든 창고였기 때문에 각 고을의 지토선과 서울의 경강선 등 선박을 동원하여 세곡을 수송하였다. 하지만 이 방식은 운반 시일이 오래 걸릴 뿐 아니라 해난 사고가 자주 발생하였다. 따라서 조선왕조는 경상도의 세곡을 운송하기 위해 중앙 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3조창을 설치하고, 조운선과 조군을 배치하였다. 즉, 가산창을 비롯한 3조창은 세곡의 보관과 운송 업무를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전환한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가산창은 1403년(태종 3) 사천 통양창(通陽倉, 通洋倉)의 폐지 이후 360여 년만에 경상도 남부 사천만 지역에 재건된 조창이라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