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인천에서 출생했다. 1908년 인흥(仁興)학교 측량과 단기과정을 졸업, 서울에서 측량기사 조수 외에 영풍서관(永豊書館)에서 고서(古書)를 베끼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던 중, 1912년 현채(玄采) 등의 소개로 경성서화미술회에 2기생으로 편입, 1915년 화과(畵科)졸업했고 이어서 1917년에는 서과(書科)를 졸업했다. 이때 송병준(宋秉畯) · 윤덕영(尹德榮) 등의 초상화 및 동학(東學)의 최제우(崔濟愚), 최시형(崔時亨)의 전신 좌상을 그렸다. 졸업 이후 1918년 결성된 조선서화협회에 참여했고, 1919년 3 · 1운동 당시 『독립신문』을 배포하다 체포되어 5개월을 복역했다.
1920년 창덕궁 대조전의 벽화 「백학도(白鶴圖)」를 제작했고, 1921년 제1회 서화협회전, 1922년 제1회 조선미전에 참여하기 시작하며 감각적인 채색인물, 화조, 산수 등 폭넓은 화제로 동양화단의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1924년부터 고려미술원에서 후진을 양성하다가 1925년부터 3년간 도쿄에서 도쿄미술학교 청강생으로 일본화과 교수인 유키 소메이[結城素明]에게 사사받았고, 1927년 제국미술전람회에 입선했다. 1928년에는 순종 어진(御眞)을 그려 창덕궁 선원전에 봉안했고, 1935년에서 1936년까지 세조, 원종 어진을 모사했다.
1936년에는 조선미술원을 설립하여 후학을 양성했다. 1936년에는 김은호의 제자들이 모여 후소회(後素會)를 조직했고, 정기전을 가지며 해방후 오늘날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2020년 현재 창립84년이 되었고, 제49회전이 열렸다.
1937년에는 '국방헌금 조달과 황군 원호'를 위해 귀족 · 관료 부인들이 주축을 이룬 여성단체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의 일화를 다룬 「금차봉납도(金釵奉納圖)」를 그렸다. 1941년 '화필보국(畵筆報國) · 회화봉공(繪畵奉公)'을 표방한 조선미술가협회에 이영일(李英一) 등과 함께 일본화부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이외에도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에는 심사위원으로, 1943년 ‘애국백인일수(愛國百人一首)전람회’ 등에 참여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초대 작가 및 심사위원, 수도여자사범대학 명예 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안중근 · 서재필 · 이승만, 미국대통령 윌슨 ·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등의 초상화를 그렸다. 1979년 2월 7일 사망했다.
김은호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3: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735∼751)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1962년 문화훈장대통령장, 1965년 3 · 1문화상 예술부문 본상, 1968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