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란은 1170년(의종 24) 8월에 문신 위주의 폐정에 반발하여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이고(李高) 등 일부 무신들이 일으킨 정변이다. 정변이 성공함으로써 이후 100년 간 무신 집정자가 권력을 장악하는 무신 정권 시대가 시작되었다.
1170년의 무신란 이전에도 1014년(현종 5)에 토지 지급을 둘러싼 문신, 무신 간의 갈등으로 상장군 김훈(金訓), 최질(崔質) 등의 무신이 정변을 일으켜 일시 정권을 장악한 전례가 있었다.
무신란이 발발한 12세기 후반 고려 의종 대는 오랜 기간 평화로운 시기가 지속되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민생의 악화와 지배층 내의 분열이 심화되어 간 시기이다. 인종 대 이후 왕권이 실추한 상태에서 의종은 일부 문신들을 중심으로 측근 세력을 육성하여 이를 타개하고자 하였다. 문신과 무신 간의 갈등이 깊어진 것도 그 하나였지만, 의종의 잦은 유연(遊宴)과 불안정한 정치 운영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무신란이 일어난 중요한 계기는 문무 간의 심한 차별이었다. 여진 정벌 이후 인종 대에 무신에 대한 멸시 풍조가 있었고 그것이 의종 대에 더욱 심해졌다. 무신 정중부가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에게 수염을 태우는 모욕을 당하는 사건은 무신들의 불만과 감정을 축적하는 요인이 되었다.
무신란이 일어나기 전, “우리 무관이 문관에게 억울함을 당한 지 오래되었다.”라는 우방재의 말은 이러한 당시 무신들의 분위기를 잘 보여 준다.
거기에 문신, 무신 간에도 상하 간의 갈등이 있었다. 군인들의 불평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의종은 왕권 강화를 위하여 문신, 무신 측근 세력을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관료 제도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고 국왕의 자의적 정치가 심화되었다. 이에 의하여 도리어 국왕의 권위는 약화하고 지지 기반이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무신란은 1170년(의종 24) 8월에 일어났다. 의종의 보현원(普賢院) 행차를 계기로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의 무신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날 의종은 무신에게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戲)를 하게 하였고 그 과정에서 대장군 이소응이 젊은 문신 한뢰에게 뺨을 맞는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무신들을 극도로 자극하였다. 정변은 보현원에 이르러 이고와 이의방이 순검군을 집합시켜 의종을 수행한 문신들을 살해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평소 토지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해 불만이 누적되었던 일반 군인층들이 이에 호응함으로써 무신들에 의하여 정권이 장악되었다. 그러나 봉기의 주동자들이 치밀한 사전 계획을 가지고 정변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또 무신란은 고위 무신들이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국왕의 시위부대인 견룡군 소속 중급 장교들이 모의하여 일으킨 난이었고, 여기에 고위 무신이 참여한 것이다.
무신란에는 신분이 미천한 무신들과 함께 일반 군인들이 대거 적극 참여하였다는 것이 주목된다. 중 · 하급의 무신과 일반 군인의 참여에 의하여 난은 원래 예상된 것보다 훨씬 과격하게 확산되어 다수의 문신들이 제거되고 국왕이 폐위되는 상황으로 진전된 것이다.
보현원에서 난을 일으킨 무신들은 곧바로 개경에 진입하여 궁궐을 장악하고 다수의 문신을 살해하면서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정변이 성공한 이후 의종은 거제현으로, 태자는 진도현으로 각각 추방되었고, 새 왕으로 의종의 동생인 익양공 왕호(王皓)가 명종으로 즉위하였다. 이에 의하여 무신정변이 실제적으로 정치세력의 전면적 개편을 가져왔음을 보여 주었다.
무신란에 대한 반발로 1173년 김보당(金甫當) 등이 의종의 복위를 명분으로 난을 일으킨 것에 자극되어 문신들에 대한 살육과 숙청이 재연되었다. 그러나 집권 무신 1인이 권력을 독점하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정변 이후 한동안 정치는 무신들의 회의기구인 중방(重房)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동시에 무신들이 승선, 이부, 병부 등 문반 관직에 참여하거나 재추에 올라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무신 정권 초기에는 봉기를 주도한 무신 간에 권력의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이 이어진다. 그 결과 이의방이 이고를 제거하고, 이어 이의방도 살해됨으로써 권력은 정중부에게 옮겨졌다. 그 사이 김보당의 난, 조위총(趙位寵)의 난 등 무신정권에 대항하는 이른바 반무신란이 이어지면서 혼란이 계속되는 과도기였다.
정중부는 이후 경대승(慶大升)에게 살해되고, 다음에는 천민 출신 이의민(李義旼)에 의하여 정권이 계승되었으나 안정된 지배 체제를 구축하지는 못하였다.
이 기간 무신들의 회의체인 중방이 중요한 정치기구가 되었으며, 불안정한 체제하에서 문신들에 대한 탄압이 자행되었다. 무신이 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데 자극을 받아, 농민과 노비, 향 · 소 · 부곡민들이 전국 각처에서 봉기하는 사회적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1196년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집권한 이후 비로소 독재 권력 구축에 성공하였다. 1170년 무신란으로 성립한 무신 정권은 몽고의 대대적 침입에도 불구하고 강화도에의 천도를 불사하며 1270년까지 100년 간을 지속하였다.
고려시대는 문과 무를 나누어 국정을 운영하는 시스템을 갖추었던 시기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문반의 귀족 중심으로 정치가 운영되었다. 이러한 문무 간의 불균형이 심화되는 모순 때문에 무신란이 촉발되었다는 점에서 무신란은 문신 중심의 지배 체제를 재점검하는 기회가 되었다.
정치세력의 전면적 교체와 함께 문반 귀족 중심 사회에서 축적된 사회적 모순이 무신 정권 시대에 다양하게 표출됨으로써 무신란 이후 정치적 불안정을 피할 수는 없었다. 무신란이 가져온 고려 사회에 대한 충격과 변화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무신란을 고려 역사에서 전 · 후기의 분수령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