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덕국 ()

고대사
지명
삼국시대, 신라가 고구려 정벌 후 지금의 익산 지역인 금마저에 고구려 왕족 안승과 유민들을 이주시켜 세운 자치국 또는 보호국.
지명/고지명
제정 시기
674년(문무왕 14)
폐지 시기
683년(신문왕 3)
지역
전라북도 익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보덕국은 삼국시대에 신라가 고구려 정벌 후 지금의 익산 지역인 금마저에 고구려 왕족 안승과 유민들을 이주시켜 세운 자치국 또는 보호국이다. 674년(문무왕 14)에 고구려 유민을 금마저에 이주시키고 고구려 왕족인 안승을 책봉하여 성립시켰다. 삼국 통일 전쟁이 마무리되자 683년(신문왕 3)에 안승을 경주로 이주시키고 소판 벼슬을 하사하면서 보덕국은 소멸되었다.

정의
삼국시대, 신라가 고구려 정벌 후 지금의 익산 지역인 금마저에 고구려 왕족 안승과 유민들을 이주시켜 세운 자치국 또는 보호국.
형성 및 변천

신라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고구려 왕족 안승과 그가 이끄는 고구려 유민들을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익산 지역인 금마저에 정착시켜 세운 자치국 또는 보호국이다. 문무왕은 670년(문무왕 10)에 일길찬김수미산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 왕에 책봉하였다가, 674년(문무왕 14) 9월에 보덕왕으로 다시 책봉하면서 보덕국이라는 명칭이 등장하였다.

이후 681년(신문왕 원년)에 김흠돌의 난이 진압되자 보덕국왕 안승은 소형 수덕개를 보내어 평정을 축하하였는데, 보덕국이 신라의 정치적 영향 아래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683년(신문왕 3) 10월에 보덕왕 안승을 경주로 이주시키고 소판 벼슬과 김씨 성을 하사하면서 결국 보덕국은 성립 10년만에 소멸되었다.

보덕국이 소멸되어 고구려 유민의 공동체가 해체되자 안승의 족자인 대문이 반발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난은 진압되고 대문은 처형되었다. 이후 주민들은 남쪽의 주와 군으로 이주되었으며, 보덕국은 금마군으로 편제되었다.

의의 및 평가

보덕국은 고구려 유민을 옛 백제 지역을 지배하는 데 동원하려는 이이제이적 성격의 정책으로서 시행되었다. 이 지역의 유력한 백제 세력을 견제하려던 필요에 의해 성립된 것으로, 신문왕 대에 대내외적으로 상황이 변화하면서 그 존재의 필요성이 사라지자 해체된 것이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단행본

이영호, 『신라 중대의 정치와 권력구조』 (지식산업사, 2014)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9)
임기환,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2004)
이기동, 『신라사회사연구』(일조각, 1997)
이문기, 『신라병제사연구』(일조각, 1997)

논문

한준수, 「신라 통일기 삼무당의 설치와 여제 유민」(『한국고대사탐구』 30,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8)
이미경, 「신라의 보덕국 지배정책」(『대구사학』 120, 대구사학회, 2015)
조법종, 「고구려유민의 백제 금마저 배치와 보덕국」(『한국고대사연구』 78, 한국고대사학회, 2015)
정선여, 「신라 신문왕대 보덕국민의 반란」(『역사와 담론』 66, 호서사학회, 2013)
김주성, 「보덕전의 검토와 보덕의 고달산 이주」(『한국사연구』 121, 한국사연구회, 2003)
김수태, 「통일기 신라의 고구려유민지배」(『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 일조각, 1994)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