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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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사
제도
고려 충선왕 때 왕명의 출납과 문서를 작성하고 인사행정을 관장하던 중앙관청.
이칭
이칭
한림원, 문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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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충선왕 때 왕명의 출납과 문서를 작성하고 인사행정을 관장하던 중앙관청.
개설

충선왕이 즉위한 1298년 초에 설치되었다가 원나라에 의해 강제로 퇴위를 당하던 그 해 8월까지 존속되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일찍이 그 이름을 볼 수 없었던 예로, 현종 때는 한림원(翰林院), 충렬왕 때는 문한서(文翰署)라고 하였다.

내용

설치 시기는 정방(政房)승지방(承旨房)이 각각 폐지되는 4월과 5월 사이로 추측되는데, 5월에 전면적인 관제개혁이 실시되고, 이에 따른 인사발령에서 비로소 사림원의 명칭이 나타나므로 이때로 봄이 타당하다.

직제로 장(長)은 학사승지(學士承旨, 종2품)이며, 그 밑에 학사(學士, 정3품) 2인, 시독학사(侍讀學士, 종3품) · 시강학사(侍講學士, 종3품) 각각 1인, 그리고 새로이 대제(待制, 정4품) 1인을 두었다. 직제상으로는 전에 비해 장의 품질(品秩)이 정3품에서 종2품으로 올랐고, 관원이 1인 증원되어 한림원이 약간 강화된 데 불과하다.

그러나 기능을 보면 종래의 한림원과는 성질이 다른 관부로 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림원의 임무는 첫째로 한림원의 기능인 왕명을 맡아 문서를 작성하는 일과, 둘째로 정방의 기능이었던 인사행정이 추가된 것이며, 셋째로 승지방이 폐지되면서 맡겨진 왕명의 출납과, 마지막으로 정치의 고문 구실을 한 것이다.

따라서, 품질은 높지 않으나 대단한 권력기관이었다. 특히 충선왕의 개혁을 담당한 핵심 기구로서 왕권강화와 직결되고 있었다. 한림원을 강화하고 승지방을 흡수하면서, 문음(門蔭)이 아닌 과거(科擧) 출신의 신진관료를 등용한 점이나, 재상들도 관여하지 못했던 왕명출납을 담당케 한 점으로 볼 때, 설치 목적이 충선왕의 관제개혁과 왕권강화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성원은 박전지(朴全之) · 최참(崔旵) · 오한경(吳漢卿) · 이진(李瑱) 등 4학사와 이승휴(李承休) · 권영(權永)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문과에 급제한 신진세력으로서 청렴하고 선정을 베풀기 위해 노력한 사대부적(士大夫的)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4학사는 충선왕의 즉위교서를 지은 사람들로, 이전부터 정치에 참여하고 있었으나 충선왕의 관제개혁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중용(重用)되었다. 개혁 목적이 원나라를 배경으로 한 신흥권력층을 거세하고 왕권을 강화해 원나라로부터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종래의 권신자제보다는 신진세력이 요구되었다. 즉, 양자의 세력교체를 꾀한 것이 곧 설립 의도였던 것이다.

의의와 평가

원나라의 간섭으로 충선왕이 퇴위되어 3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존속되었지만, 사대부 사회가 성립되어 나가는 하나의 과정을 나타내주고 있다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충선왕(忠宣王)의 개혁(改革)과 사림원(詞林院)의 설치(設置)」(이기남, 『역사학보(歷史學報)』 53,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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