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돌은 선사시대에 땅 위에 자연석이나 그 일부를 가공한 큰 돌을 하나 이상 세워 기념물 또는 신앙대상물 등으로 삼은 돌기둥 유적이다. 입석(立石)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선돌은 대부분 자연석을 그대로 세우거나 극히 일부만을 치석해 세웠다. 둥근 뿔이나 둥근 기둥, 또는 모난 뿔이나 모난 기둥 형태가 많다. 외경 또는 예배, 기원의 대상으로서 정령숭배 또는 생식기숭배같은 원시신앙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 지방에서는 남방식 고인돌과 선돌이 공존하고 있어서 그 상호간의 기능적 성격에 대해 밝혀져야 할 것이다.
일명 ‘입석(立石, menhir)’이라고도 한다. 고인돌〔支石墓, dolmen〕, 열석(列石, alignement)과 함께 대표적인 거석문화(巨石文化)의 하나이다. 그러나 고고학에서 일컫는 선돌이란 선사시대, 특히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걸쳐 이루어진 유적에 한정시키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선돌은 세계 도처에 널리 분포하고 있지만, 특히 동아시아와 서유럽에서 밀집된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 밖에도 근동지방과 북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분포되어 있다. 이들은 대개 고인돌 등 다른 여러 종류의 거석 유적과 직접 혹은 간접적인 상관관계를 갖고 있어, 분포에 있어서도 서로 혼재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유적지로 프랑스의 브르타뉴(Bretagne)를 들 수 있다. 이곳에서는 단독으로 세워지거나 혹은 수천 개에 달하는 입석이 열을 지어 늘어서 하나의 열석군을 이루고 있다. 높이는 2∼4m 가량 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로크마리아케르(Locmariaquer)의 한 거대한 선돌처럼 원래 높이 20.3m에 무게 350톤에 이르는 것도 있다. 이 지역에 있어서 이들 거석문화의 성행과 함께 선돌을 뜻하는 ‘멘허(menhir: stone-long)’도 사실은 이 지방의 고유어인 브레튼어(Breton語)에서 연유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선돌은 고인돌에 비해서는 매우 적은 숫자에 지나지 않지만 그 분포 범위는 거의 반도 전역에 미치고 있다. 그러나 이렇듯 넓은 분포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구조와 대부분 단독으로 세워지는 유적으로서의 취약성 때문에 이에 대한 학술적인 발굴조사는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대구광역시 달서구 진천동에 자리한 선돌을 들 수 있다. 조사 당시에는 고인돌의 덮개돌로 추정하였으나 조사과정에서 기단석들이 노출되어 선돌로 확인되었다. 재질은 화강암이며 크기는 210×150×110㎝이다. 선돌의 우측 상부에는 6개의 홈구멍이, 서쪽면 상부에는 동심원무늬가 있다. 선돌 하부의 기단부와 석축 내부에서는 각종 토기가 출토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확인된 선돌 하부의 기단으로 학술적 가치가 크다.
우리나라에서도 선돌은 자연석을 그대로 세우거나 극히 일부만을 치석해 세운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드물게는 원래부터 있던 거석을 선돌로 삼는 경우도 있다. 형태는 주로 둥근 뿔〔圓錐〕이나 둥근 기둥〔圓柱〕, 또는 모난 뿔〔角錐〕이나 모난 기둥〔角柱〕이지만 드물게는 넓적한 판석도 있다. 높이는 1∼2m되는 것이 많고 충청남도 서산 입석동의 경우처럼 6m가 넘는 것도 있다.
기능에 있어서는 대체로 선돌에 얽힌 전설이나 신앙이 주를 이루며, 예배의 대상물로서의 성격이 본질을 이루고 있다. 그 까닭은 선돌 자체가 가지는 외형적 특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뚝 솟은 모습에 따라 사람들에게 외경감을 불러일으킨다든가, 그 형태가 흡사 남성의 성기와 비슷해 생식기숭배같은 원시신앙과 결부되기도 한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입석에 대한 외경 또는 예배, 기원(祈願)의 대상으로서의 성격은 원시사회에서 이루어진 정령숭배(精靈崇拜)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기념물 또는 신앙대상물로서의 입석은 처음 세워진 후 오랜 세월동안 기능을 유지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근세에 이르러서 여기에 각자(刻字)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볏집이나 새끼로 묶는 등 의인화(擬人化) 또는 신격화시켜 마을의 수호신, 기자암(祈子巖)같은 역할을 담당해왔다. 이러한 형태와 기능에 따라 여기에서부터 비석이나 장승의 원류를 찾고자 하는 연구가 시도되기도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더욱 많은 실증적 자료를 기다려야 할 처지이다.
선돌은 대부분 단독으로 마을 어귀같은 평지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고 간혹 낮은 구릉 위나 비탈에 세워지기도 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고인돌과 바로 인접되어 있는 곳도 있다. 그러한 유적으로서는 충청남도 보령군 미산면 삼계리 · 동곡리와 주산면 삼곡리, 대전광역시 대덕구 교촌동, 청양군 목면 지곡리 등 충청남도 지방 일원에서 많은 예를 볼 수가 있다. 전라남도 지방에서도 순천시 입석리 · 석현리, 구례군 토지면 금내리와 담양 등지에서 확인된 바 있다.
구례군 금내리의 경우, 주위의 경작지보다 약간 도드라진 대지 위에 남방식 고인돌 1기와 선돌 1기가 동서로 약 6m의 거리를 두고 위치해 있다. 선돌은 네모기둥 모양의 화강암으로 높이는 2.4m, 너비 0.3∼1.1m이다. 선돌 둘레에는 직경 3m의 돌을 깐 유구〔敷石遺構〕가 있었다. 인접한 고인돌은 상석이 파손되고 하부구조도 분명히 확인할 수 없었다.
남한 지방에서는 모두가 남방식 고인돌과 선돌이 함께 공존하고 있지만, 황해도 연백군 문창리에서는 구릉에 분포한 북방식 고인돌군의 가운데 수 미상의 선돌군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고인돌과 선돌의 공존관계로 보아서는 일단 이들이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가진 유적으로 생각되지만 그 상호간의 기능적 성격에 대해서는 전혀 밝혀진 바가 없다. 이를테면 선돌이 고인돌의 존재를 표시해주는 묘표적(墓標的)을 갖춘 것인지 또는 제단석(祭壇石)으로서의 기능을 가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다 구체적이고 면밀한 조사에 의해 그 성격이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