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에 성씨와 가족에 관한 사항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의 명예와 벼슬을 좋아하지 않아 스스로 거사라 칭하였다(不樂世間名官 自號爲居士)."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거사는 재가불자(在家佛者) 또는 벼슬을 하지 않는 선비를 뜻하므로, 기본적으로 문자 이해 능력을 가진 신분의 인물로 여겨진다. 평민 신분이기보다는 형식상 관직 진출은 할 수 있었던 하급 두품 신분의 인물로 추정된다.
중대 말 하대 초 청주(菁州: 지금의 경상남도 서부 지역) 일리현(一利縣: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에서 활동하였다. 법정사(法定寺)에 의지(依止)하였다는 것으로 볼 때 불교와 관련된 활동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의지라는 용어가 본래 불교에서 득도(得度) 이후 선배 승려의 지도를 받으며 참선, 수행하는 과정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원효가 스스로 소성 거사라 하였던 사실을 참고한다면, 성각이 불교와 관련된 활동을 한 인물로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성각은 현세에서 효행을 다하고, 부모가 죽은 후에는 불교에 의탁하여 복을 누리게 하려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각은 신라 중대 말에서 하대 초, 정확히는 선덕왕 대에 활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성각의 효행을 왕에게 아뢴 사람들이 각간 김경신(金敬信)과 이찬 주원이었다고 하였는데, 혜공왕이 시해될 당시 경신은 이찬(제2관등)이었으므로 각간(角干, 이벌찬의 별칭, 제1관등)이 된 것은 그 이후이기 때문이다. 또한, 경신이 선덕왕 사후 즉위하여 원성왕이 되었기에, 효행이 있었던 시기는 혜공왕 사후부터 원성왕 즉위 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