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달경(達卿), 호는 추담(秋潭)·환성당(喚醒堂).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나 문경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성호영(成虎英)이며, 어머니는 덕수이씨(德水李氏)로 통덕랑(通德郎) 이동야(李東野)의 딸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강문8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이다.
1703년(숙종 29)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과 왕자사부(王子師傅)가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죽기 바로 전에 부솔(副率)이 다시 제수되었으나 미처 사직서를 올리지 못하고 죽었다.
1696년 송시열(宋時烈)을 조광조(趙光祖)가 봉향된 도봉서원(道峰書院)에 배향할 때 일부에서 시비가 일자 앞장서서 변박하는 상소와 통문을 지었으며, 1704년 만동묘(萬東廟)의 향사(享祀)에 대한 말썽이 일어나자 곧 「만동사시비변(萬東祠是非辨)」을 지어 송시열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성만징은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친명배청사상(親明排淸思想)이 남달리 강하였다.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는 “성은 곧 이이다(性卽理).”라는 설과 “이기가 혼융(混融)하다.”는 설을 지지하여, 낙론(洛論)에 접근한 경향을 보였다.
특히 예설(禮說)에 밝아 권상하(權尙夏)·이세필(李世弼) 등과는 상당히 깊이 있는 이론적 문답을 주고받았다. 또한 「학성도(學聖圖)」를 만들어 후학들에게 학문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문경의 한천사(寒泉祠)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추담문집(秋潭文集)』 3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