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리유적은 1985년 주암(住巖)댐 수몰지구 지표조사를 통해 확인하였다. 이후 대곡리를 남쪽과 북쪽으로 나누어 서울대학교 발굴팀과 국립광주박물관팀이 1986·1987·1989년의 3차에 걸쳐 총 200여 기의 집자리, 구덩유구[竪穴遺構] 약 50여 기와 2기의 가마터를 조사하였다. 지리상 대곡리는 보성강을 사이에 두고 한실지구와 도롱지구로 나뉜다. 이중 도롱마을은 동쪽으로 강에 접해 있고, 서쪽·남쪽·북쪽은 높이 100∼250m 내외의 나지막한 구릉과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일찍부터 대규모의 취락이 들어서기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도롱지구에서 집자리로는 청동기시대 후기의 원형 집자리(대곡리 Ⅰ기, 서기전 5∼3세기), 철기시대 초기의 말각방형 집자리(대곡리 Ⅱ기, 서기전 3세기∼0), 삼국시대 전기의 말각방형 집자리(대곡리 Ⅲ기, 0∼300년) 등이 있으며, 삼국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가마터 1기가 있다.
원형 집자리는 다른 집자리에 비해 규모가 큰 편으로, 대개 25∼40㎡ 정도이다. 내부에는 기둥구멍이 4∼6개 존재해 부여 송국리, 광주 송암동, 영암 장천리 등지에서 확인된 집자리들과 공통적인 면이 있다. 유물은 다른 집자리에 비해 빈약한 편으로 약간의 바리형[鉢形] 민무늬토기와 화살촉 등이 있을 뿐이다.
철기시대 초기와 삼국시대 전기의 말각방형 집자리에서 바닥처리는 모래바닥에 점토를 얇게 입힌 뒤 불을 먹여 다진 형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특별한 화덕시설은 확인하지 못했다. 또한 양 시기의 집자리는 층위상의 변화가 없이 같은 평면상에 공존하고 있어, 두 문화는 시기적인 단절이 없이 계기적으로 발전했다고 보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철기시대 초기 집자리의 유물로는 바리형토기류, 토제·석제 가락바퀴, 그물추·화살촉·홈자귀 등이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 전기 집자리에서는 삿무늬나 문살무늬가 타날된 둥근 밑단지[圓底短頸壺]·포탄형토기·시루형토기·쇠뿔형손잡이가 달린 토기·바리형토기 등의 토기류가 새로이 등장한다. 이중 포탄형토기는 이 시기에 해당하는 모든 집자리에서 예외없이 출토하고 있다.
도롱지구에서는 집자리 외에 삼국시대 전기의 토기가마터 1기를 확인하였다. 규모는 길이 6.3m, 최대 폭 3.7m에 이르며, 장축방향은 남북이다. 전반적인 형태는 중국의 전국시대 원요(圓窯)와 상통하며, 요의 바닥면이 두 기의 단을 이루며 비스듬히 경사진 점은 아산 운곡리(雲谷里)가마와 유사하다. 출토유물로는 완형으로 출토된 시루 1점 외에 삿무늬와 문살무늬가 시문된 회백색·흑회색을 띤 연질토기편, 그리고 토기의 기벽을 두드릴 때 기벽 내면을 받치던 토제모루 1점 등이 있다.
발굴지역 남쪽에 위치한 구릉지대에서도 삼국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5기의 집자리를 확인하였다. 그 중 발굴된 3기의 집자리에서는 모두 집자리의 벽 밑으로 5∼10㎝에 이르는 벽도랑[壁溝]시설을 확인하였다. 이는 인접한 낙수리 집자리에서도 보이고 있어 그 연관관계를 생각할 수 있게 한다. 구릉상에서 확인된 집자리의 출토유물로는 기형의 파악이 불가능한 토기편 몇 점과 석촉 몇 점이 있을 뿐 극히 빈약하다. 한편 집자리 내부에서는 일본형 벼·보리·녹두·콩 등의 곡물류가 출토되어 당시 사회에서 농경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한편 한실지구는 청동기시대의 주거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철기시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집단취락이 형성되었다. 주거지의 발굴상황은 도롱지구 동일시기 주거지와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한실지구 주거지는 대부분 회청색경질토기를 출토한다는 점에서 수혈(竪穴)식 주거지로서는 가장 늦은 시기인 5세기 이후까지도 내려온다.
또한 한실지구는 도롱지구와 비교하면 흙이 점성이 매우 약하여 유구의 윤곽이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집자리의 모양도 도롱지구와는 달리 원형이 없고, 대형집자리가 보이지 않아서 크기가 20㎡의 작은 규모이며, 바닥은 딱딱하게 다진 흔적이 있다. 유물의 출토상황은 도롱지구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철기시대 초기에 속하는 5호 집자리에서 거의 사용흔적이 없는 방추차·반달형돌칼·대팻날·돌검·숫돌을 비롯한 석기류와 석기 반제품 10여 점 등 수십 점에 이르는 석기들을 발굴하였다. 이로 보아 5호 집자리는 일상적인 집자리라기보다는 석기제작과 관련된 유구인 듯하다. 또한 수십 점에 이르는 소형의 바리형토기가 출토된 점으로 보아서 당시 촌락의 공동창고로서의 기능도 상정해 볼 수 있다.
도롱지구에서 삼국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집자리 중 특이한 예는 89·3호 집자리로 장축 8m, 단축 6m에 이르는 장방형의 대형이었다. 여기서는 포탄형토기 8점을 비롯한 완형으로서 복원가능한 20개체분 이상의 토기류 외에 철제[鐵刀子]·철제낫[鐵鎌] 등의 풍부한 유물을 발굴하였다. 이 3호 집자리는 2차 발굴 당시 집자리군의 중심부에 위치하였다. 다른 집자리에 비해 훨씬 큰 규모의 철제품을 포함한 풍부한 유물 등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대곡리 도롱마을에서 상당한 권력을 지니고 있던 족장의 집자리였을 것으로 상정해볼 수 있다.
대곡리유적과 그곳으로부터 5㎞ 이내에 위치한 낙수리유적, 10㎞ 정도 떨어진 보성군 문덕면 죽산마을 등은 전남지방의 대규모 취락유적이다. 전남지방에서 이와 같은 집단취락유적이 주는 의의는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이행되는 시기, 즉 청동기시대로부터 철기시대 초기 및 삼국시대까지의 고고학적 기초자료가 다량으로 제공되었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