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종(穆宗) 때 형부낭중(刑部郎中)이 되었으며, 1010년(현종 1)에 거란의 성종(聖宗)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자 도순검사(都巡檢使)가 되어 진사(鎭使) 정성(鄭成)과 부사(副使) 이수화(李守和), 판관(判官) 장호(張顥) 등과 더불어 성을 굳게 지키며 완강히 저항하고 항복 권유를 물리쳤다.
이에 거란군은 포위를 풀고 통주(通州)에서 강조(康兆)가 이끄는 고려의 주력 부대를 격파한 뒤 남진하였다. 거란군은 이 때 사로잡은 노전(盧戩)을 흥화진에 보내 항복을 권했으나, 오히려 노전을 사로잡고 성을 더욱 굳게 지켰다. 그 뒤 군사 700여 명을 거느리고 흥화진을 출발하여 통주에서 강조의 부하였던 병사 1,000여 명을 수습해 곽주(郭州)에 머무르고 있던 거란병 6,000여 명을 공격하여 성을 탈환하고 성 안에 있던 남녀 7,000여 명을 통주로 옮겼다.
1011년에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顯祖)이 나주까지 피란 갔으나 거란군과의 철병교섭이 성공해 거란군이 물러가게 되었다. 이에 양규는 구주(龜州) 방면으로 돌아가는 거란군을 지키고 있다가 무로대(無老代)에서 2,000여 명을 베고 포로가 되었던 남녀 2,000여 명을 탈환하였으며, 석령(石嶺)에 이르러 다시 2,500여 명을 베고 포로가 된 1,000여 명을 탈환하였다.
또 여리참(余里站)에서 싸워 1,000여 명을 베고 포로가 된 1,000여 명을 탈환했으며, 다시 거란의 선봉과 애전(艾田)에서 싸워 1,000여 명을 베었다. 이 때 거란의 군사가 갑자기 몰려와 구주별장(龜州別將) 김숙흥(金叔興)과 더불어 싸웠으나, 남은 군사가 얼마 되지 않고 화살이 떨어져 진중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양규는 고군(孤軍)으로 한 달 사이에 7차례 싸워 적을 6,500명 베고 포로가 된 백성 3만여 명을 구했으며, 낙타 · 말 · 병장기 등 노획물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획득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전공으로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추증되고, 부인 은율군군(殷栗郡君) 홍씨(洪氏)에게는 교서와 함께 양곡 100석이 하사되었으며, 아들 양대춘(楊帶春)에게는 교서랑(校書郎)이 제수(除授)되었다. 1019년(현종 10)에 공신녹권(功臣錄券)이 내려지고, 1024년에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에 추봉(追封)되었다. 또 문종(文宗) 때 양곡 100석이 하사되었으며, 공신각(功臣閣)에 도형(圖形)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