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순부(純夫), 호는 눌재(訥齋) 또는 송파(松坡)이며,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1415년(태종 15년)에 태어나 1482년(성종 13년) 6월 11일 사망하였다. 양성지의 증조할아버지는 종2품 봉익대부 판도판서(版圖判書) 양우(梁祐)이며, 할아버지는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추증된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양석륭(梁碩隆)이다.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관직은 모두 실직이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까지 양성지 가문은 중앙 관료로 진출하지 않고 남원에서 세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양성지의 아버지는 종3품 중훈대부 예빈시윤 양구주(梁九疇)이며, 사후에 숭정대부 의정부 우찬성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안동권씨는 전주부윤 권담(權湛)의 딸이다. 양성지의 형제는 현감 양경지(梁敬之)와 부장 양신지가 있다. 양성지의 부인 원주변씨는 호군 변상근(邊尙覲)의 딸이며, 변안열(邊安烈)의 후손이다.
양성지는 슬하에 4남을 두었다. 장남인 전첨 양원(梁瑗)은 초계정씨 부사 정잠(鄭箴)의 딸과 혼인하였다. 차남인 양수(梁琇)는 군수를 지냈으며, 나주박씨 호군 박병중(朴秉中)의 딸과 혼인하였다. 또한, 3남 승지 양찬(梁瓚)은 진천송씨 생원 송상(宋裳)의 딸과, 4남 현령 양호(梁琥)는 진주유씨 좌랑 유인로(柳仁老)의 딸과 혼인하였다.
1441년(세종 23년)에 진사 · 생원시에 입격하고, 또 문과에 제2인으로 합격하였다. 처음에 경창 부승에 제수되었다가 성균관 주부로 옮겼다. 1442년(세종 24년)에 집현전 부수찬에 임명되었고, 사간원 좌정언을 거쳐 다시 집현전 직제학에 제수되었다. 집현전 시절 양성지의 주요 활동으로는 『 고려사』 개찬에 참여하였고, 1450년(세종 32년)에는 관방론(關防論)을 담은 비변십책(備邊十策)을 건의하였다.
1451년(문종 1년)에는 동국양계일체비어(東國兩界一體備禦) 소를 올려 국토 전반의 방어책을 제시하였고, 단종이 즉위하자 논군도(論君道) 소를 올렸다. 1453년(단종 1년)에는 「조선도도(朝鮮都圖)」 · 「팔도각도(八道各圖)」 등 지도를 제작하였고, 이듬해 「황극치평도(皇極治平圖)」를 찬진하였다.
1455년(세조 1년)에는 『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찬진하였고, 평안도 경차관이 되어 폐사군(廢四郡) 사업을 수행하였으며, 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1459년(세조 5년)에는 『명황계감(明皇誡鑑)』을 번역하고 『의방유취(醫方類聚)』를 교정하였다.
1460년(세조 6년)에는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가 이듬해에 가정대부에 올랐다. 1463년(세조 9년)에 홍문관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세조가 이것을 따라 양성지를 제학으로 삼고, 자헌대부로 올렸다.
이해에 양성지는 『 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제작하였다. 1464년(세조 10년)에는 방납(防納)의 폐지를 건의하였고,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에는 권농책을 상소하였고, 오륜록(五倫錄)을 찬수하였으며,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1466년(세조 12년)에는 서적의 간행과 보관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 1467년(세조 13년)에는 「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을 찬진하였고, 북방 방어책을 개진하였다.
1468년(예종 즉위년)에는 『 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에는 공조판서에 제수되었고, 1471년(성종 2년)에 좌리공신에 녹훈되어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졌다. 그 해에는 당시 완성된 『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수정해야 할 곳 45개 부분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였고, 『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74년(성종 5년)에는 「양계연변방수도(兩界沿邊防戍圖)」를 제작하였다. 1477년(성종 8년)에는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었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공조판서로 전직되었고, 1481년(성종 12년)에는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에 2품 이하의 당상 문신을 대상으로 국왕이 개최한 시험에서 양성지는 장원을 차지하면서 자품을 뛰어넘어 숭정대부가 되었다. 1482년(성종 13년)에 6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양성지는 40여 년에 걸친 관직 생활 동안 다양한 관각 문헌 및 지도 편찬 사업에 참여하였고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방면에 걸쳐 풍부한 내용을 담은 다수의 상소문을 올렸다. 실록에서 확인되는 그의 상소문은 일부에 지나지 않고, 후손들이 편찬한 『남원군주의(南原君奏議)』나 『눌재집(訥齋集)』에서 대부분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양성지가 활동한 당시에는 그 주장의 과다함과 정책적 실현 불가능성 등이 세간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세조의 신임을 받으며 당대의 문교 · 국방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성종 대 이후에는 부정비리 혐의로 여러 차례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정치 활동은 정국의 추이와 군주의 통치 경향에 따라 규정되는 친왕적인 성격을 띠면서, 특히 세조와 호의적 관계를 형성하였다. 이는 역으로 동료 관원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사관에게 아첨꾼으로 각인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양성지에 대한 평가는 그가 활동하였던 시대에는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다. 그러나 18세기 정조 대에는 그의 정책적 주장이 소환되어 재평가되면서 양성지가 구상하였던 서적 편찬과 보관에 대한 건의안이 규장각의 설치에 영향을 미쳤고, 정조는 그의 학문과 사상을 수집 복원하고 기리는 의도에서 『눌재집』의 간행을 명하였다.
양성지의 학문적 경향은 실용적 관학파 성리학으로 분류된다. 그의 학문 영역은 법 · 군사 · 교육 · 문화 · 역사 · 지리 · 예제 · 예술 · 의학 등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국초부터 정비된 통치 이념을 견지하면서도 국가 체제를 강화하고 국익을 도모할 수 있는 다방면의 여러 제도적 장치를 제안하였다는 점에서, 관념과 이상의 복합적 혹은 이중적 구조로 그의 학문 · 사상적 입장을 정의하기도 한다.
또한 법에 내포된 권위와 강제력을 국가 정부의 정책과 사고를 관철시킬 효과적인 통치 수단으로 인식하는 동시에, 법과 형정 등 인간의 행위를 외적으로 규제하는 사회적 장치를 중시하였던 점에 주목하여 그의 사유를 파악하기도 한다.
양성지의 상소를 비롯한 정책 건의 방식의 특징으로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위해 경전의 해석을 인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중국 및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전거를 찾아 활용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당대 학자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방식이다.
양성지 학문과 사상의 특징은 몇 가지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다. 법제 측면에서, 경국대전 편찬에 참여할 때 양성지가 제시한 건의안을 통해 그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다. 1455년(세조 즉위년) 7월에 법제 개혁을 주장하고, 1457년(세조 3년)에는 이전의 법전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법전의 제정을 촉구하였다.
또한, 1472년(성종 3년)에는 『경국대전』의 45항목에 대한 개정안을 만들고, 호전과 형전의 교정을 맡았다. 법전 편찬 방식 면에서 양성지가 『경국대전』에 미친 영향은 이전까지 『 경제육전(經濟六典)』을 기본으로 증보하는 방식에서 나아가 일시적이고 구체적인 조문 형식을 배제하고 추상화하자는 주장이 수용되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군사 및 국방 측면에서, 15세기 중반 북 몽골 세력의 흥기와 이로 인한 명과 여진, 그리고 조선의 정세가 동요하던 상황에서 양성지가 새롭게 제시한 방위책이 주목된다. 양성지는 집현전 시절 지리지 및 지도 편찬에 참여하면서 얻은 지리 지식을 기반으로 대규모의 적을 방어하는 데 유리한 내지방어론인 요읍관방론(要邑關防論)을 건의하였다. 당시 행성(行城) 중심의 방어책은 소규모 적을 방어하는 데 유리한 방식으로서 북방의 여진 부족을 의식한 것이었는데, 양성지의 방어론은 대규모 몽골 군대를 대비한 요충지 중심의 방어 체계로 해석된다.
교육 사상의 측면에서, 양성지는 당시 국가 사회의 문제를 풍속과 교화의 미흡함에서 찾았고, 임금이 솔선수범하여 도덕을 시행하면, 그에 의한 감화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학교 교육에서는 임금의 도덕을 대리하여 백성들에게 베풀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또한 국속과 예제를 중시하고 서적을 간행하고, 장서를 보관하기 위해 홍문관 설치를 건의하였는데, 홍문관은 사고 · 규장각의 설치 및 서적 관리와 문한 업무를 관장하는 기관이었다. 그가 홍문관 설치를 건의한 것을 두고, 그의 사상 저변에 실용성과 아울러 전통과 민족 의식을 계승해야 한다는 문화적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파악하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단군을 역사의 기원으로 파악하고, 국사를 경연과 과거에 적용하고 역사서를 간행 · 보관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요동이 삼한 이래 영토였음을 주장한 점은, 양성지 역사 · 지리 인식의 민족주의적이고 실용적인 성격의 소산으로 이해된다.
예제 · 예학적 측면에서는 중국과 구별되는 풍토와 역사를 조선이 지닌 자생적 능력의 기반으로 인식하였다. 원구제(圓丘祭)의 부활, 문묘에 고려 · 조선의 유학자 배향, 무성왕묘(武成王廟)의 신설, 역대 시조의 제사, 산천의 제사처 재편 등으로 취합되는 그의 사전(祀典) 개혁안은 조선의 독자성과 고유성을 강조하는 형태로 일관된다는 점에서 양성지의 사상적 특징이 반영된 결과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