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9년(선조 2) 왕비에 간택되어 가례(嘉禮)를 치렀다. 1572년(선조 5) 친잠례(親蠶禮)를 행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양으로 피란하였다. 이후 피란과 한양으로의 환도에 선조와 함께하지 못하였고, 광해군이 의인왕후를 모시고 다녔다.
1593년(선조 26) 선조가 정주(定州)에서 안주목 영유현(永柔縣)으로 이어할 때 세자 광해군과 의인왕후는 정주에 계속 남아 있었다. 관군이 한양을 수복하자 선조는 환도를 결정하고 해주(海州)에 머무른 후 10월 한양에 도착하였다. 의인왕후는 해주에서 묘사(廟社)와 신주(神主)를 모신 광해군과 함께 머무르게 되었다. 1595년(선조 28) 의인왕후의 어머니가 사망하였고, 그해 10월 중전의 환도를 사간원에서 청하여 11월 10일 환궁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수안(遂安)으로 피란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1598년(선조 31) 11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듬해 4월까지 계속 수안에 거처하였으며, 병이 들어 위중하기까지 하였다. 1599년(선조 32) 윤 4월 한양으로 환도하였으나, 1600년(선조 33) 6월 27일 경운궁(慶運宮)에서 승하하였다. 후사를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향년 46세이다.
선조는 의인왕후가 사망한 후 비망기를 내려 그녀의 죽음을 추모하였다. 이를 보면 의인왕후는 궁궐 내에서 내명부의 빈들을 대할 때에도 은애가 넘쳤으며, 후궁들이 낳은 어린 아이들을 곁에 두고 잘 돌봐주었다고 한다. 의인왕후는 성품이 인자하고 유순하여 궁인과 여종들을 너그럽게 대하였으며, 해주에서 피란살이할 때도 굶고 있는 백성들에게 구휼을 할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외척들로 인한 폐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였다. 선조는 이러한 의인왕후가 자녀를 두지 못하였고, 수명이 길지 못했다며 그녀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렇지만 선조와 금슬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의인왕후가 아닌 인빈김씨를 피란 여정에 동행하였으며, 1602년(선조 35) 6월 27일 의인왕후의 대상(大祥)이 끝나자 보름만에 인목왕후와 가례를 치렀던 것에서 알 수 있다.
시호는 장성휘열정헌경목의인왕후(章聖徽烈貞憲敬穆懿仁王后)이며, 능호는 처음 유릉(裕陵)이었다가 목릉(穆陵)으로 하였고,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