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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곤(李長坤)

조선시대사인물

 조선전기 대사헌, 이조판서, 우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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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조선전기 대사헌, 이조판서, 우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희강(希剛), 호는 학고(鶴皐)·금헌(琴軒)·금재(琴齋)·우만(寓灣). 이신지(李愼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흥해군사(知興海郡事) 이호겸(李好謙)이다. 아버지는 참군(參軍) 이승언(李承彦)이며, 어머니는 이조참판 이래(李徠)의 딸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1492년(성종 23) 유자광(柳子光)에 의해 유장(儒將)의 적격자로 천거된 적이 있으며, 1495년(연산군 1)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02년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04년 교리로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이듬 해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이 때 연산군이 무예와 용맹이 있는 이장곤이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해 서울에 잡아올려 처형하려 하자, 이를 눈치채고 함흥으로 달아나 양수척(楊水尺)의 무리에 발을 붙이고 숨어 살았다.
이 해 중종반정으로 자유의 몸이 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주 01)하고, 1508년(중종 3) 박원종(朴元宗)의 추천으로 다시 기용되어 홍문관부교리·교리·사헌부장령을 거쳐 이듬 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512년 중국 산동성에서 도적이 크게 일어나자 그 화가 우리나라에 미칠 것을 걱정해, 비변사에 이를 보고하는 동시에 성곽을 수축하고 양곡을 비축해 대비하도록 건의하였다.
또, 이 해 7월에 야인 2,000여 명이 창성에 침입하자 군사를 거느리고 맞서 싸워 격파하였다. 이듬 해 이조참판이 되고, 1514년에 예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15년 대사헌이 되고, 이듬 해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북쪽 변경의 일을 잘 안다 하여 곧 함경도관찰사로 교체되었다.
1518년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이듬 해 우찬성으로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이 되고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이 때 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에게 속아 기묘사화를 일으키는 데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이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신진 사류들의 숙청임을 알고 이들의 처형을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심정 등의 미움을 사서 결국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경기도 여강(驪江)과 경상도 창녕에서 은거하였다.
학문과 무예를 겸비해 일찍부터 중종의 신임을 받아 승진이 빨랐으며, 관직을 삭탈당한 뒤에도 귀양을 보내자는 대간의 요구가 관철되지 못하였다. 중종은 이장곤의 재질을 아깝게 여겨 군직(軍職)을 주어 유사시에 쓰려고 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현하지 못하였다. 창녕의 연암서원(燕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금헌집(琴軒集)』이 있다. 시호는 정도(貞度)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문흥을 위해 젊고 재능있는 관료에게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휴가를 내리던 제도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7년)
신해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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