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가족
개념
친인척 관계를 계통적으로 증빙하는 명부.
이칭
이칭
종보(宗譜), 세보(世譜), 가보(家譜), 가첩(家牒), 가승(家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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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족보는 친인척 관계를 계통적으로 증빙하는 명부이다. 족보는 동아시아 고대 왕조 국가가 지배층에 대한 집권적 통치의 필요성에 따라 작성토록 한 것에서 유래한다. 귀족의 특권이 부정됨에 따라 민간에서 이에 대응하는 형태로 족보가 편찬되기 시작했다. 조선 전기의 족보는 편찬에 참여한 여러 성씨의 가족들이 선조들의 혼인 관계에 근거하여 신분적 결합을 꾀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조선 후기 족보는 부계 남성 중심의 계보로 전환되었는데, 여러 성씨의 부계 친족들이 부계 남성의 신분적 정통성과 통혼권 내의 혼인 관계 증빙을 분담했다.

정의
친인척 관계를 계통적으로 증빙하는 명부.
1. 동아시아의 관찬 족보

족보는 친인척 관계를 계통적으로 증빙하는 명부를 말한다. 동아시아 고대 왕조 국가가 지배층에 대한 집권적 통치의 필요성에 따라 작성토록 하였는데, 대체로 부계 성씨를 기준으로 작성하였다. 중국 송대에 과거제를 통한 관료로의 진출이 모든 양민에게 열리고 귀족 신분이 부정되면서, 이에 대해 민간에서 스스로 부계 남성 중심의 계보를 작성하게 되었다. 정부가 편찬을 주관하는 족보를 ‘관찬 족보’라고 하고, 민간에서 스스로 편찬한 족보를 ‘민간 족보’라고 나누어 이해하기도 한다.

동아시아 고대국가에는 백관의 출신을 확인하기 위한 계보를 ‘도보국(圖譜局)’에 제출하게 하고, 여러 성씨를 통합하여 족보를 편찬하였다. 한대(漢代)에 편찬된 ‘관보(官譜)’, ‘씨족편(氏族篇)’, ‘만성보(萬姓譜)’ 등이 초기의 것이다. 또한 ‘성망씨족보(姓望氏族譜)’는 정부가 족보를 통해 지역마다 몇 개의 유력 성씨들을 파악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고려 왕조 초기에 지역마다 ‘성관(姓貫)’을 나누어 정한 정책도 이것과 맥이 닿아 있다. 한식 성씨가 지배층에 일반화되면서, 정부는 부계 선조의 출신지에 따라 본관을 붙여 유력 성씨를 구분하고, 지역 사회의 지배권을 인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편찬된 ‘관찬 족보’에는 현재의 오키나와[沖縄]에 존재했던 류큐국[流求國]의 족보가 있다. 류큐국은 14세기 말에 명의 건국과 더불어 조공 책봉 체제하에 들어간 이래, 15세기 초에 통일 왕국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17세기 초에는 일본 사츠마[薩摩] 번의 침공을 받은 이후, 그쪽으로도 공물을 바치기 시작했다. 류큐국의 족보는 화교의 영향으로 작성되기 시작했지만, 귀족 신분제가 강하게 존속한 일본의 ‘가보(家譜)’ 형태를 띠었다. 류큐국은 1689년에 ‘계도좌(系圖座)’를 설치하여, 상층 신분인 ‘사족(士族)’에 한해서 족보를 작성하게 하고 정기적으로 새로운 기재 내용을 확인했다. 류큐의 사족은 주로 장남이 지속적으로 가계를 잇는 본가가 가보를 작성했다. 가보에는 해당 가계를 단독으로 잇는 자의 자식들만 등재하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다시 계보를 이어 그의 자식들만 등재하는 식의 세계도(世系圖)를 그렸다. 출생자마다 관인을 찍어 사족 신분의 가족원임을 증명해 주는 류큐국의 족보는 신분제에 근거한 관찬 족보로 편찬된 것이다.

‘가보’라는 류큐 족보의 명칭이나 계보의 형태는 일본의 가보에서 연유했다. 일본은 가족 가운데 한 명이 가산과 제사를 단독으로 계승하는 ‘가독상속(家督相續)’을 실시하고 있었다. 나머지 자식들은 분가하여 경제적으로 독립할 기회가 줄어들겠지만, ‘이에[家]’ 단위로 가산을 유지하는 상속 방법이기도 했다. ‘가보’는 단독 상속자의 자녀만 남기고 형제자매들의 후손 계보는 표시하지 않아 계보 형태를 대나무에 비유하기도 한다. 왕족 및 귀족이나 영주들의 가보는 집권적인 통치를 위해 전국적으로 집대성되었다. 일본의 초기 계보집인 『존비분맥(尊卑分脈)』은 14세기 말에 편찬되었는데, 이후 에도[江戶] 시대에도 그러한 가보의 집대성 작업이 지속되었다. 신분제가 견고하게 존속하는 상황에서 귀족과 영주에 대한 집권적 파악의 필요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관찬 족보로 청대 랴오닝[遼寧] 호구책(戶口冊)으로 작성한 족보가 있다. 청황실은 랴오닝 지역에 만주족만이 아니라 한족(漢族)을 비롯한 여러 민족들을 이주시켜 정착하게 하고, 18~19세기에 걸쳐 이들에 대한 호구 조사를 실시했다. 호적에는 호의 대표자인 호주에게 그의 부와 조부를 표기했는데, 이 기록에 근거하여 부계 남성 중심의 계보를 별도로 작성했다. 중국의 부계 사회 전통에 기초하여 이들 특수 이민 사회에 대하여 대가족 또는 종족적인 파악이 요구되었음을 의미한다.

계보를 기록한 호적은 일찍이 고려 왕조부터 발견된다. 현존하는 고려 왕조의 호적에는 족보를 대신해서 호의 대표자 부부에게 각각 부, 조, 증조, 외조를 포함하는 ‘사조(四祖)’를 기재하도록 했다. 호적이 신분적 연원을 확인하기 위한 일종의 ‘관찬 족보’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고려 사대부의 호적에는 소위 ‘팔조호구(八祖戶口)’가 다수 발견된다. 호의 대표자 부부에게 각각 사조를 기록할 뿐 아니라, 조모, 증조부모, 외조부모의 사조 등을 번잡하게 기록하는 호적이다. 지배층 내에서 혼인이 이루어져 왔는가를 밝히는 계통적 확인은 고려 왕조에 관료를 임명하는 증빙으로 요구되었다. 사조들의 사조까지 기록하는 호적은 고려 왕조 말기부터 조선 왕조 초기까지 발견된다. 이런 호적의 계보 기록은 고려 말기 귀족적 신분제가 동요함과 더불어 조선 초기에 그러한 신분제가 소멸함을 나타낸다. 조선 왕조 초기의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관직자 호의 부부에게 다시 사조까지만 기재하는 호구식(戶口式)이 제시되었다.

조선 왕조의 관찬 족보는 왕과 친인척의 계보를 기록한 왕실 족보로 시작되었다. 태종은 왕위 계승 분쟁을 막고자 왕들의 직계 선조를 기재한 『선원록(璿源錄)』, 태조와 태종의 적자들을 기록한 『종친록(宗親錄)』, 적녀와 서얼을 기록한 『유부록(類附錄)』을 작성하게 했다. 초기의 이 왕실 족보는 소실되고 이후 수정 작업이 진행되다가 17세기 말 숙종 대에 왕의 자녀 후손들을 기록한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을 편찬하기에 이르렀다. 『돈녕보첩(敦寧譜牒)』은 1649년 이후 1872년 사이에 간행된 판본이 전해지는데, 이 보첩에는 왕비의 부모를 기준으로 각각의 사조를 기록하고, 사조 각자의 부계 계보를 기재했다. 왕실 족보는 종부시(宗簿寺), 선원록이정청(璿源錄釐正廳)과 같은 관리 기관을 정해 정기적으로 계보를 수정하여 왕실의 친인척 범위를 법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2. 민간 족보의 출현

소위 ‘민간 족보’는 중국 송대 구양수(歐陽修)의 ‘구양씨보도(歐陽氏譜圖)’와 소순(蘇洵)의 ‘소씨보도(蘇氏譜圖)’에서 그 전형이 구해진다. 구양수가 작성한 보도는 구양경달(歐陽景達)로부터 구양수에 이르는 여러 세대의 세계(世系)를 기록하나, 직계 선조의 중간 수 대에 걸친 계보가 단절되기도 한다. 소씨보도는 소순의 고조로부터 시작하여 형제의 자식에 이르는 계보만을 제시한다. 소순은 황제의 자손과 처음으로 관직에 오른 자의 자손만이 대종(大宗)의 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하여, 계보에 고조를 넘지 않는 소종(小宗)의 법을 중시했다. 구양수도 계보는 알 수 있는 세대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민간에서도 고조를 넘는 대종의 법이 적용될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의 족보에도 이러한 종법이 적용됨으로써, 불천위(不遷位)를 제외한 고조까지의 4대 봉사(奉祀)만 허용하는 등의 제사 원칙이 제시될 수 있다.

중국의 민간 족보는 송대의 신분제 변동에 대응하는 형태로 생겨났다. 귀족제가 부정됨으로써 고대사회에서처럼 관찬 족보로 귀족 신분이 보장되지 못했다. 주로 관료를 역임한 상부 계층의 가족들이 선조로부터 계승되는 신분적 정통성을 재천명하며 대내외적으로 결속력을 과시하고자 민간 차원에서 족보를 작성하게 되었다. 더불어 이민족과 구별되는 한족으로의 정통성도 종법 질서를 적용할 수 있는 부계 남성의 계보를 통해 주장되었다. 중국 대부분의 성씨는 전설의 삼황오제(三皇五帝)와 이후의 천자를 의미하는 황제 및 제후를 뜻하는 왕들에게로 부계적 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 송대 이후의 족보는 이러한 부계적 계보가 방계의 여러 가족으로 확산되어 가는 과정을 통해, 부계 친족의 종족 집단을 형성하는 근거가 되었다. 명대 후반 이후, 종족의 방대한 재력과 문화적 고흥에 힘입어 족보가 대대적으로 편찬되어 갔다.

한편, 한국의 민간 족보는 15세기에 비로소 편찬되었다. 계보를 볼 수 있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1476년에 편찬된 『안동권씨세보(安東權氏世譜)』 ‘성화보’이다. 1565년에 중간된 『문화류씨세보(文化柳氏世譜)』 ‘가정보’에는 1423년에 간행되었다는 ‘영락보’의 서문이 실려 있으나, 계보 부분은 현존하지 않는다. 이들 초기의 족보는 중국의 족보와 같이 부자 관계로 연결되는 계보가 아니라 부계 여성과 그 자손, 즉 사위와 외손의 자녀로도 지속적으로 연결되는 ‘자녀보(子女譜)’, 혹은 ‘내외자손보(內外子孫譜)’의 계보 형태를 띤다. 따라서 족보 편찬에 참여한 인물들은 여러 다른 성씨를 가졌으며, 그 가운데 계보의 기준을 제시한 안동 권씨나 문화 류씨 인물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에 족보 편찬에 참여한 자들은 주로 중앙 관료를 지내거나 그 가족으로 구성되는데, 각자의 선조들이 맺은 혼인 관계를 근거로 계층적 연대를 꾀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들 족보의 계보 정보는 우선 호적의 사조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선조 계보를 증빙하기 위해 족보에 부록으로 호적을 기재하는 경우가 있다. 그 가운데 『용인이씨족보(龍仁李氏族譜)』에 별록으로 기재된 이광시(李光時) 호적은 이광시의 사조와 증조의 사조, 그리고 그 부계 직계 존속이 기재되어 있다. 이광시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내려오던 호적에서 부계 선조의 정보만을 모아서 하나의 호적에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계보 형태는 가첩(家牒), 혹은 가승(家乘)에서도 흔하게 발견된다. 가첩은 시조나 파조로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단선의 부계 직계 선조들을 기재한다. 이러한 부계 직계 선조 단선의 계보 말미에 호적과 같이 사조를 기재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사조는 물론, 모의 사조, 조의 외조, 조모의 사조를 기재하고 여기에 더해 ‘사증조(四曾祖)’, ‘팔고조(八高祖)’ 등의 성씨가 다른 여러 선조들을 별도로 기록하기도 한다. 가첩에도 가진 본인의 부모와 조부모, 증조부모 등의 혼인 관계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단지 호적의 사조는 본인으로부터 선조로 거슬러 올라가는 계보인 반면, 족보는 동일 선조로부터 후손으로 내려오는 계보이다. 조선 전기의 족보에 보이는 ‘자녀보’는 각자의 호적에서 부에서부터 조, 증조로 올라가는 직계 존속이나 외조 가운데 동일 인물을 찾아 서로 연결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족보 편찬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부모 양측의 선조들에 대한 혼인 정보 가운데 다른 사람이 제시한 계보의 동일 인물에 선택적으로 연결하였다. 궁극적으로는 안동 권씨나 문화 류씨의 부계 자녀에 닿도록 함으로써, 그 시조로부터 자녀의 자녀 후손들로 내려가는 여러 성씨의 가족을 하나의 족보에 담게 되었다.

3. 조선 전기 족보의 특징

안동 권씨 ‘성화보’에서 ‘자녀보’의 계보적 특징을 몇 가지 살펴보자. ‘성화보’에는 조선 후기 안동 권씨 족보에 기재되는 십여 계파 가운데 두 계파의 부계 남성만이 기재되었다. 안동 권씨의 사위로 기재된 안동 권씨 남성도 있는데, 동성동본 혼인이 문제시되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선조를 안동 권씨 남성 계보에 잇지 못한 것인지, 사위로 등재되는 데에 그치고 있다. 이 사람의 후손들은 이후의 족보에 훨씬 윗대의 선조로부터 연결되는 별도의 계파를 형성했다. 18세기 이후에 중간되는 안동 권씨 족보에는 이 이외에도 성화보에 나타나지 않던 안동 권씨 부계 남성의 후손들이 새로운 선조와 그로부터의 계파를 새롭게 형성하며 족보 등재에 참여하게 된다. 그 가운데에는 부자나 형제 관계가 의심되는 사례도 있지만, 족보가 편찬되는 당시에는 ‘일족’으로 표명되는 사람들의 사회적 위상이 동일하다고 인식되었다.

다음으로 자녀는 출생하는 순서대로 등재한다. 그리고 딸은 사위의 직역과 성명을 기재하는데, 딸의 재혼 상대는 ‘후부(後夫)’라 기재한다. 당연히 족보 편찬에 참여한 가족들에 이르기까지 안동 권씨 부계 남성으로 연속되는 계보보다 여러 대에 결쳐 외손의 자녀 후손으로 연결되는 계보가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이러한 기재 사항은 18세기 이후의 대부분 족보와 구별되는 요소로 거론된다.

이와 같은 ‘자녀보’는 이후 17세기까지 족보의 일반적인 계보 형태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1590년대 편찬된 『사성강목(四姓綱目)』은 ‘사성’, 즉 편찬자 부모의 사조에 해당하는 네 가계로 나누어 자녀보를 기록하고 있다. 부계인 고성 이씨와 조모의 창녕 성씨, 모친의 남평 문씨, 외조모의 안악 이씨로 나누어 각각 선조로부터의 자녀보를 수집하여 기재한 것이다. 자녀보라 하더라도 방계 형제자매들의 계보는 5세대나 6세대 정도에 그치지만, 이 족보의 기록이 이전의 자녀보와 다른 점은 부계 남성마다 처의 사조나 처부의 정보를 기록한다는 것이다. 선조의 혼인 관계에 근거한 이러한 족보는 ‘내외보(內外譜)’로 별칭되기도 한다.

1606년에 편찬된 『진양하씨세보(晉陽河氏世譜)』는 편찬자가 자신의 직계 선조와 사조들을 기록한 ‘가첩’에 골격을 두고, 이들 선조들이 작성한 자녀보를 두루 수집하여 편찬하였다. 우선 직계 선조들의 자녀보는 부계 남성의 자녀보를 ‘자파(子派)’, 부계 여성의 자녀보를 ‘여파(女派)’로 구분하여 수집하였다. 그리고 ‘외보(外譜)’라 하여 편찬자의 고조에 이르는 직계 선조들의 외가 계보를 별도로 수합하였다. 족보에 기재된 이들 각각의 자녀보는 안동 권씨 ‘성화보’와 같이 윗대 선조로부터 이어진다. 단지 선조들이 작성한 자녀보를 두루 모으더라도 부계 남성을 뚜렷한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 부계 남성의 배우자에 대한 정보가 기록되기 시작했다는 점 등은 조선 후기 족보의 계보 형태로 전환됨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주목되는 것은 부계 직계 선조들의 계보와 함께 가까운 친인척들을 망라하는 자녀보를 여러 성씨의 가족들이 각자 확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476년 안동 권씨 ‘성화보’가 3권으로 편찬된 이래, 1606년에 안동 권씨 ‘을사보’가 동일한 자녀보의 형태로 16권이 편찬되었으나 간행에 이르지는 못했다. 여기에는 ‘성화보’에 나타나지 않던 안동 권씨 부계 남성의 계파가 새롭게 기재되었다. 그런데 1654년에 간행된 안동 권씨 ‘갑오보’는 부계 남성의 계보만을 추려서 단권으로 작성되었다. 여러 성씨의 인물들을 등재하기 위해 내외 선조들을 두루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부계 친족에 한해서 여러 방계의 계보가 수합된 것이다. 나아가 1701년에 편찬된 ‘신사보’는 안동 권씨 부계 남성 중심의 계보 기록으로 13권에 이르렀다.

4. 조선 후기의 족보

족보가 편찬된 이후 수십 년이 지나 부계 친족 중심으로 족보가 중간될 때에는 이후 출생한 부계 후손들을 포함하여 이전 족보에 나타나지 않았던 방계의 친족들이 새롭게 등재되었다. 조선 후기 족보에는 증가한 부계 친족을 여러 방계 계보로 나누어 등재하는 한편, 몇 대나 이어가던 외손 계보는 1대나 2대로 축소시켜 등재했다. 그렇다고 족보에 등재되는 인물들 가운데 부계 남성들의 비율이 증대한 것은 아니다. 부계 여성의 계보가 축소되는 대신에, 부계 남성들의 처부로 여러 성씨의 인물들이 기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외보’ 등의 이름으로 가까운 친인척을 망라하는 자녀보 형식의 족보가 조선 후기에 지속적으로 편찬된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조선 후기 족보의 대부분은 조선 전기의 ‘자녀보’와 달리 부계 남성 중심의 계보 형태를 보여 준다. 계보 형태의 변화 요인은 우선 등재 인물의 기하급수적인 증가에 있다. 동일 계층에 한정된 통혼권 내의 혼인이라 하더라도 후대로 가면서 혼인 관계를 맺은 많은 성씨의 후손들을 하나의 족보에 망라하기는 불가능해졌다. 부계 남성 자손만 보더라도, 새롭게 등장하는 계파의 인물들을 포함하면 그 수가 급증하게 된다. 따라서 각 성씨별로 족보 편찬을 분담하되, 부계 남성 계보를 주축으로 그 배우자 정보를 병기하여, 혼인 관계로 맺어지는 인물 이외에는 중복되는 인물의 등재를 최소화하게 되었다. 각 가문의 족보는 부계 남성의 신분과 혼인 관계의 정통성을 밝히고, 그것을 다른 가문의 족보와 대조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가족의 사회 경제적 위상을 고려하여 혼사를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족보에 등재되는 인물들과 그 자녀들의 인신 정보를 훤히 꿰뚫고 있는 ‘보학(譜學)’의 발달이 요구되었다. 조선 전기 족보와 같이 동일 계층 사이의 혼인 관계로 맺어진 인물들의 신분적 결합이라는 성격은 조선 후기 족보에도 일관된다.

조선 후기 족보에서 이전과 달라진 기재 사항으로 부계 남성의 처부를 기록하는 이외에도 부계 남성 부부의 생몰년도와 각자의 묘지가 기록된다는 점이 주목된다. 특히 사망 월일과 묘지 위치 정보는 제삿날인 기일(忌日)을 공시하고 선영(先塋)에서의 묘제(墓祭)를 함께하기 위한 기록이다. 조선 전기에 자녀 모두가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는 ‘윤회봉사(輪迴奉祀)’나 적자가 없는 경우에 외손이 제사를 지내는 ‘외손봉사(外孫奉祀)’가 행해지고 있었던 것에 반해, 부계 남성이 선조의 제사를 주관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18세기 이후에 장남을 계보 계승의 기준으로 삼는 세대 질서, 즉 ‘종법 질서’가 강조된 것과 관련하여, 이러한 족보를 ‘부계 친족 집단의 결집을 강화하기 위한 물적 근거’로 이해하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족보가 ‘부계 친족’ 모두를 하나의 집단으로 조직화하기 위한 목표로 편찬되었는지는 재고를 필요로 한다.

선조들의 혼인 관계가 여러 성씨의 가족들을 신분적으로 결속하는 계기를 제공했던 조선 전기의 족보와 마찬가지로, 조선 후기의 족보도 여전히 혼인 관계 결성이 신분적 정당성을 증빙하는 자료였다. 족보에는 부계 친족이라 하더라도 적자녀에 한해서 등재되었으며, 향리층과 상민도 배제되었다. 첩의 자식인 서얼은 신분을 밝히고 등재될 수 있었다. 이러한 신분을 가진 인물과 혼인 관계도 족보에 좀처럼 기록되지 않는다. 족보를 중간할 당시에 ‘양반’으로 인식되지 않을 정도로 몰락한 후손들도 그 선조의 계보와 더불어 삭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인물 등재의 이러한 배타성은 어머니의 신분을 판별 기준으로 삼고 아버지의 신분은 부차적인 신분제 원칙에 기인한다. 족보에는 부계 자손 가운데 신분적으로 선택된 자만이 등재되었던 것이다.

한편, 혼인하는 남녀의 신분적 격차를 계기로, 사회 경제적 변동과 함께 신분 간 이동이 가능한 유동성이 신분제의 또 다른 특징이다. 족보 등재에서 배제되었던 향리와 서자의 후손들이 족보에 등재되어 ‘양반화’를 실현하는 경우가 19세기 이후에 늘어나고, 20세기 전반의 족보에 이들의 편입이 급증하게 된다. 신분 격차를 전제하지 않는 부계 친족의 결집은 이로부터 거론될 수 있다.

중앙일보사에서 간행한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은 15세기 이후의 동성동본 각 성관들의 ‘대동보’ 편찬 상황을 알려 준다. 성관별로 처음 편찬된 ‘창시보’는 총 380여 건으로 파악되는데, 18세기에 가장 많은 수치를 보이다가 19세기 이후에 급감한다. 반면에 중간되는 족보를 포함하여 전체 대동보 편찬 수는 총 2,210여 건으로 집계되는데, 18세기 이후 증가하여 20세기에 급증하는 현상을 보인다. 18세기에 대부분의 성씨들이 족보를 처음으로 편찬하고 또 기왕의 족보를 중간하였으며, 이후 20세기에 다시 대대적으로 족보가 중간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족보는 대부분 20세기 전반의 것으로 2천여 건을 넘는데, 대부분 191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후반에 걸쳐 편찬된 것으로, 후기로 갈수록 증가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사이에 출판 허가를 받은 서적 가운데 족보가 단일 1~2위의 건수를 보인다. 족보는 여러 부계 계파를 망라하는 대동보로 편찬되기 시작하여 중간이 거듭되었다. 그런데 20세기 전반의 족보에는 일부 계파의 후손에 한정한 ‘파보’의 편찬이 많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대동보를 중간하는 데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된 파보도 있겠지만, 다른 신분 출신의 계보가 포함된 대동보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고 신분적 정통성을 견지하려는 파보 편찬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동보 편찬 비용이나 분배 문제 등을 둘러싸고 적파와 서파 사이의 소송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조선 후기 대동보의 편찬은 부계 선조로부터 대대로 거주해 온 세거지에서 타지로 이주하는 친족들로부터 제기되는 경우가 많았다. 종손이나 장손이 대를 이을 적자가 끊어져 계자(系子)를 들이는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한 지역에 경제적 기반을 유지하며 수 대에 걸쳐 세거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거지에 거주하는 가족은 신분적 위상을 분명히 할 수 있었지만, 그로부터 이주한 가족들은 신분적 위상이 타지에서 바로 인정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족보에 등재되어 출신 성분이 증명될 필요가 있었으며, 이것은 혼인 관계를 맺는 데에도 중요한 문제였다. 동일 성관의 부계 남성이 모여 사는 ‘집성촌’ 내부에서 부계 친족들 사이의 혈연관계는 후대로 갈수록 점차 멀어지기 마련이다. 반면에 족보 편찬에 참가한 후손들 사이의 유대 강화나 집단적 결집은 주거 지역을 넘어서서 요구되었다. 조선시대 족보가 ‘문중’이나 ‘종중’과 같은 부계 집단을 결집하기에는 여전히 관념적이며 비효능적인 측면이 여기에 있다.

5. 기타 다양한 족보

족보에 등재되는 인물들의 친인척 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고 여러 성씨의 부계 남성 계보를 망라한 족보가 있다. 우선 과시에 합격한 자들의 계보를 성관별로 기록한 족보로, 문과에 급제한 자들의 『문보(文譜)』, 무과에 급제한 자들의 『무보(武譜)』, 역과나 의과 등에 합격한 자들의 『역과보(譯科譜)』, 『의과보(醫科譜)』, 『의역주팔세보(醫譯籌八世譜)』 등이 있다. 이들 족보는 대체로 합격자 각각의 부계 직계 존속을 8대까지 기재하는 ‘팔세보’의 형태를 띠며, 여기에 외조와 처부를 기록하기도 한다. 또한 음직으로 관리에 진출한 자들의 『음보(蔭譜)』, 문과 급제자와 음직자의 계보를 기록한 『진신보(縉紳譜)』 등이 있다. 이외에 내시의 계자 계보를 기재한 『양계세보(養系世譜)』는 부자 관계로 계승되는 형식을 취한다. 관직과 관련하여 신분적 동질성을 구하는 족보이다. 한편, 19세기 후반에 편찬된 『남보(南譜)』와 『북보(北譜)』는 각각 영남 남인과 북인의 ‘당파보’로 당파의 주요 가계를 성씨별로 정리하였다. 중앙 정계의 변동에 대응하고자 하는 정치적 유대 관계의 성격을 갖는다.

유명 가계의 부계 남성 계보를 전국적 범위에서 망라한 ‘만성보’ 형태의 족보는 민간 족보가 편찬되기 시작하는 시기부터 작성되었다. 양성지(梁誠之)가 어명으로 편찬한 1466년의 『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은 조선 왕조 초기에 유력 성씨의 가족들을 집권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일종의 관찬 족보라 할 수 있다. 17세기 중엽의 『씨족원류(氏族源流)』, 『제성보(諸姓譜)』, 『성원총록(姓苑叢錄)』 등은 족보 편찬 방법의 전환에 즈음하여 작성된 족보이다. 혼인 네트워크로 연결된 민간 내부의 필요라기보다, 전국의 상층 신분에 대해 집권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정책적 의도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후 19세기에도 『잠영보(簪纓譜)』나 『동국세보(東國世譜)』와 같은 족보는 당시 주요 인물들의 성관별 부계 남성 계보를 밝히면서 특히 관직의 경임 관계에 주목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 또한 상층 신분의 정치적 유대 관계를 살피려는 목적과 관련이 있다.

일정 지역의 성씨를 망라하는 족보 가운데 1917년에 간행된 『하동향안세계원류(河東鄕案世系源流)』는 하동 향안에 등재되었던 인물들로부터 후대로 내려오는 부계 계보를 모은 것이다. 신분 제도가 소멸한 당시에도 지역 사회 유력자들이 ‘양반’으로의 신분적 연원을 분명히 하고자 편찬된 것이다. 한편, 20세기 초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백씨통보(百氏通譜)』나 1900년경에 작성되어 1931년에 간행된 『만성대동보(萬成大同譜)』, 1924년부터 1925년까지 편찬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청구씨보(靑丘氏譜)』 등은 전국 규모로 신분적 연원의 동질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반면, 부자 관계의 혈연적 연원을 확대하여 ‘민족’ 개념과 결부시키고자 하는 사고방식이 나타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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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손병규(성균관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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