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3책의 목판본이다.
책머리에 1632년 장유(張維)가 지은 서문이 있다. 권 1에 오언절구 6수, 칠언절구 75수, 오언율시 28수, 권 2에 칠언율시 84수, 칠언배율 1수, 권 3에 교서(敎書) 1수, 서계(書契) 1수, 서(書) 3수, 차자(箚子) 1수, 소(疏) 2수, 전(箋) 5수, 권 4에 서(序) 1수, 기(記) 2수, 명(銘) 1수, 발(跋) 2수, 애사(哀辭) 2수, 제문(祭文) 5수, 묘갈명 4수, 묘지명 2수 등이 수록되어 있다.부록(附錄) 상(上)에는 아들 황혁(黃赫)이 지은 행장을 비롯하여 윤근수(尹根壽)의 「수서(壽序)」, 저자의 시와 윤근수 등의 차운시 3수가 실려 있다. 하(下)에는 윤근수 등이 지은 제문(祭文) 4편, 심희수(沈喜壽) 등의 만시(挽詩) 19수와 저자의 신원과 관련한 상소와 논의가 실려 있고, 말미에 「개축주축문(改題主祝文)」이 있다.
지천 황정욱은 호음 정사룡(鄭士龍), 소재 노수신(盧守愼)과 함께 호(湖) · 소(蘇) · 지(芝)로 일컬어지는 3대가의 명성에 비하여 남은 작품의 수가 적은 편이다. 장유는 서문에서 황정욱의 시에 독창성이 있다고 평가하였으나, 문집에 수록된 시의 분량이 200여 수에 불과한 것이 아쉽다고 하였다.
시의 경우, 여러 친지 문인들과 나눈 시가 대부분이고,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길주(吉州)로 유배되어 있을 때 지은 시도 많다. 칠언절구의 「길주팔영(吉州八詠)」은 유배지에서 임금을 그리는 충심을 적었고, 칠언율시로 「증박첨지사호(贈朴僉知士豪)」는 길주에서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제자를 만난 감회를 표현하였다. 1수뿐인 칠언배율 「축단배대장이십운(築壇拜大將二十韻)」은 1583년에 문신(文臣) 정시(庭試)에서 장원한 작품이다.
「답일본서계(答日本書契)」는 임란 전인 1591년 도요토미(豊臣秀吉)의 서신에 대하여 의리로써 힐책하여 보낸 글이다. 「의여일본관백서(擬與日本關伯書)」와 「격일본관백서(檄日本國關伯書)」는 임진란 이후 유배 생활 중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을 획책하던 도요토미를 설득시키고자 작성했던 글로, 모두 당시 임진왜란 직전의 대왜(對倭) 상황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상도당서(上都堂書)」는 임진왜란 중 항복 문서와 관련하여 그가 위기에 처하게 되자 사건의 본말과 실상을 해명한 글로, 소 2편과 함께 당시 난중의 국내 사정을 살필 수 있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그 외에도 해주(海州) 목사(牧使) 시절 지은 「계영당기(桂影堂記)」, 길주(吉州) 유배 시절 지은 「몽서발(夢書跋)」, 신응시(辛應時) · 임익지(任翼之)에 대한 애사(哀辭), 조정기(趙廷機) · 정유일(鄭惟一) · 유희춘(柳希春) · 윤두수(尹斗壽) · 순화군(順和君)에 대한 제문, 기타 윤엄(尹儼) 등의 묘갈명(墓碣銘)과 성수익(成壽益) 등의 묘지명(墓誌銘)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