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處)는 신라 녹읍제(祿邑制)부터 내려오던 제도로, 비슷한 것으로 장(莊)이 있었다. 장과 함께 주로 왕실에 소속되어 재정적 기초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궁원(宮院) · 사원(寺院) 또는 개인에게 귀속된 사처(私處)도 있었다.
처의 형성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장의 경우와 같이 신라 말 고려 초로 추정된다. 즉,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지방 호족(豪族)의 지배 아래에 있던 일부 촌락이 장 또는 처라는 이름으로 왕실에 편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7, 여주목(驪州牧) 고적(古跡), 등신장(登神莊)조에 의하면 “고려 때 (중략) 처(處)라 부르는 곳과 장(莊)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었는데, 각각 궁전, 사원, 내장택(內莊宅)에 나누어 소속되어 그 세(稅)를 바쳤다.”라고 하여 장처는 궁전이나 사원, 내장택에 소속되어 거기에 소속된 민(民)들이 토지를 경작하여 세를 바쳤던 곳이었다. 이에 의하면 처나 장은 왕실이나 사원에 소속된 촌락으로 해당 촌락의 토지를 경작하여 그 수확물의 일부를 궁원이나 사원에 세를 바친 촌락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처는 장과 함께 고려 왕실 재정의 수입원과 관련된 군현제(郡縣制)의 하부 촌락으로서 장처전(莊處田)은 장과 처에 분포된 토지이다. 『고려사(高麗史)』권78, 식화(食貨)1, 전제(田制), 녹과전(祿科田) 우왕(禑王) 14년 7월 조인옥(趙仁沃)의 상서(上書)에 의하면 전국에 걸쳐 있는 360여 곳의 장처전은 공상(供上)을 위한, 받들기 위함이라고 하여 장처전이 공상과 밀접하게 관련된 토지임을 적시하고 있다. 여기서 공상은 왕실 재정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는 용어로 궁원전(宮院田)이나 장처전으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조세 수입으로 충당한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고려시대에는 양계(兩界) 지역을 제외한 전국에 360개의 장과 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여러 지리지(地理志)에서 확인되는 곳은 30여 개뿐으로 경기도 · 충청도 지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이들 처는 단순한 면적 단위의 장원(莊園)이 아니라, 단수 또는 복수의 촌락으로 구성된 지역적 행정 구획의 하나로서 군현(郡縣)의 하부 단위였다. 그러므로 처는 현(縣)으로 승격되기도 했으며,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군현에 흡수되었다.
처에는 일반 군현이나 부곡(部曲) 등과 같이 처리(處吏)라 불리는 이속층(吏屬層)이 있었다. 이들은 처에 부과된 각종 조세(租稅)의 수취 및 납부를 담당하였다. 또한 양인(良人)이지만 군현인과는 차별 대우를 받았던 처간(處干)이 있었다. 『고려사』 권28, 세가(世家) 충렬왕(忠烈王) 4년 7월 을유조에 따르면 “‘상하(上下)를 불문하고 모두 처간(處干)을 없애고 부역(賦役)을 부과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처간이란 다른 사람의 밭을 경작하여 주인에게는 조(租)를 주고 관청에는 용(庸)과 조(調)를 바치는 자들로 바로 전호(佃戶)를 말한다. 당시에 권세가들이 백성들을 많이 끌어 모아 처간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삼세를 포탈하여 그 폐단이 특히 심하였다.”라고 하여 장처전 가운데 처전(處田)을 경작하던 농민을 처간이라고 불렀으며, 이들은 원래 전호로서 다른 사람의 토지를 경작하여 조를 바치고 용과 조는 국가에 바쳤던 농민들이었다. 즉, 이들은 전주(田主)인 왕실 · 궁원 · 사원 등에 조세를 부담하고, 국가에는 공물(貢物)과 요역(徭役)을 바치는 존재로서, 처의 토지 경작에 직접 참여하는 자영 농민이었다.
장처전은 소속 기관의 수조지(收租地)로서 소정의 전조(田租)를 내야 하는 농민 소유의 민전(民田)이었다. 고려 후기에 왕실은 요물고(料物庫)를 두어 처의 관리와 이곳에서의 조세 수취를 관장하게 하였다. 고려 후기에 들어 권세가들이 일반 농민들을 모아서 처간이라고 부르면서 삼세를 모두 포탈하는 폐단을 일으키자 강수형(康守衡) 등은 처간의 폐지를 건의하였다.
한편, 처는 장과는 달리 고려 초기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충렬왕 대를 전후한 시기에 왕실 · 궁원 · 사원 및 권세가들이 왕지(王旨)를 얻어 촌락 전체를 집단적으로 탈점(奪占)하면서 성립되었다는 설도 있다. 따라서 처의 토지는 소속 기관이나 개인의 집단적인 사유지이며, 처간 역시 소작인이었다는 주장이다. 한편 처간은 고려 전기 이래 처에 소속되어 삼세를 모두 왕실에 내는 사실상 사적 예속민이었다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