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목왕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제29대(1344~1348) 왕.
이칭
시호
현효(顯孝), 충목(忠穆)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337년(충숙왕 복위 6)
사망 연도
1348년(충목왕 4)
본관
개성(開城)
출생지
개경
주요 관직
국왕
관련 사건
기삼만 옥사 사건
내용 요약

충목왕은 고려 제29대(1344~1348) 왕이다. 1337년(충숙왕 복위 6)생으로, 1344년(충혜왕 5) 충혜왕이 사망한 후 왕위를 계승하였다. 재위기간 중 폐정 개혁이 진행되어 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되기도 했으나, 정치도감의 활동 중 기황후의 일족인 기삼만이 옥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 활동이 중단되었다. 1348년(충목왕 4)에 사망하였다.

정의
고려, 제29대(1344~1348) 왕.
가계 및 인적사항

재위 1344~1348년. 이름은 왕흔(王昕)이며, 몽골 이름은 팔사마타아지(八思麻朶兒只, 바스마도르지)이다. 충혜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덕녕공주(德寧公主)이다.

주요 활동

1337년(충숙왕 복위6) 출생하여, 어린 나이에 원에 들어가 주6하던 중, 1344년(충혜왕 5) 충혜왕이 사망하자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고, 원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 정동행중서성좌승상 상주국 고려국왕(開府儀同三司征東行中書省左丞相上柱國高麗國王)에 임명되었다.

충목왕이 왕위에 오른 후 충혜왕의 주1들은 대거 유배되거나 파직되었다. 4월, 작은아버지 왕기(王祺: 뒤의 공민왕)를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으로, 왕현(王玹)을 익흥부원군(益興府院君)으로 봉하고, 채하중(蔡河中) · 한종유(韓宗愈) · 이제현(李齊賢)을 각기 우정승(右政丞) · 좌정승(左政丞) · 주7에 임명하는 인사를 단행하였다. 같은 해 5월, 이제현(李齊賢)은 정방(政房) 혁파 및 녹과전(祿科田) 복구 등을 주요 내용을 하는 개혁안을 제출했지만, 이때는 보흥고(寶興庫) · 덕녕고(德寧庫) · 내승(內乘) · 응방(鷹坊) 폐지 등 부분적으로만 수용되었다. 10월, 왕후(王煦) · 김륜(金倫) · 김영후(金永煦)를 각기 우정승 · 좌정승 · 주8로 임명하는 인사를 단행하였고, 12월에는 정방이 혁파되고 경기 지역의 녹과전 가운데 권세가에게 빼앗긴 것을 모두 그 주인에게 돌려주는 조처가 이루어졌지만, 이듬해 정월, 정방은 복구되었고, 녹과전의 복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347년(충목왕 3) 2월, 고려의 주9을 개혁하라는 원 순제(順帝)의 명에 따라 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되었다. 직접 원 순제의 명을 받은 계림군공(鷄林君公) 왕후, 좌정승 김영돈(金永旽)과 찬성사 안축(安軸), 주10 김광철(金光轍)판사(判事)로, 이외 33인의 주11이 임명되었다. 정치도감의 개혁 활동은 1345년(충목왕 1)의 정리도감장(整理都監狀)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정치관(整治官)들로 하여금 안렴존무사(按廉存撫使)를 겸하게 하여 각도에 보내 토지의 주2주3을 조사하고, 폐단을 적발하고 응징하도록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남의 토지를 빼앗고 불법을 자행한 것이 발각되어 주4에 처해진 후 수감된, 기황후의 일족 기삼만(奇三萬)이 옥에서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그 부인이 이를 정동행성 주5에 고발하였고, 이문소에서 정치도감의 정치관 서호(徐浩)전녹생(田祿生)을 잡아 심문하고 이어 모든 정치관들을 가두어 정치도감의 활동이 중단되었다. 마침 왕후 등의 정치(整治) 활동을 격려하기 위해 황제의 사신이 고려에 왔고, 이에 정치관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기삼만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원에서 같은 해 10월, 다시 사신을 보내어 정치관들을 주12하였고, 왕후와 안축을 제외한 정치관들을 처벌하였다. 곧이어 황제가 주13를 내려 다시 정치도감을 설치하게 하고 왕후를 판사(判事)로 임명해 정치(整治) 활동을 계속하게 하였다.

1348년(충목왕 4)에는 서해도(西海道)와 양광도(楊廣道)의 기근을 진휼하고 진제도감(賑濟都監)을 설치하게 했다. 같은 해, 병에 걸려 1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상훈과 추모

1357년(공민왕 6) 고려에서는 현효(顯孝)라는 시호를 올렸고, 1367년(공민왕 16) 원에서 충목(忠穆)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능은 명릉(明陵)이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김창현, 『고려 후기 정방 연구』(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998)
김인호, 『고려 후기 사대부의 경세론 연구』(혜안, 1999)

논문

민현구, 「정치도감의 성격」(『동방학지』 23·24,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80)
변은숙, 「고려 충목왕 대 정치 세력의 성격」(『중앙사학』 19, 중앙대학교 중앙사학연구소, 2004)
이강한, 「정치도감 운영의 제양상에 대한 재검토」(『역사와 현실』 67, 한국역사연구회, 2008)
주석
주1

임금에게 아첨하여 신임을 받는 신하. 우리말샘

주2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 차지함. 우리말샘

주3

둘 이상의 것을 하나로 합치어 가짐. 우리말샘

주4

오형(五刑) 가운데 죄인의 볼기를 큰 형장으로 치던 형벌. 육십 대부터 백 대까지 다섯 등급이 있었다. 우리말샘

주5

고려 충렬왕 때에, 중국 원나라가 고려의 개경에 둔 관아. 원나라의 세조가 일본을 정벌하려고 개경에 정동행중서성을 설치하였다가 일본 정벌 계획을 그만둔 뒤로는 이것으로 고치고, 원나라의 관리를 두어 고려의 내정을 감시하고 간섭하게 하였다. 우리말샘

주6

황제를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속국의 왕족들이 볼모로 가서 머물던 일. 또는 그런 지위. 우리말샘

주7

고려 시대에 둔, 삼사(三司)의 으뜸 벼슬. 품계는 종일품으로 재신(宰臣)이 겸하였다. 우리말샘

주8

고려 시대에, 문하부ㆍ첨의부ㆍ도첨의사사ㆍ도첨의부에 둔 정이품 벼슬. 시중(侍中) 또는 정승의 다음 서열이다. 충렬왕 1년(1275)에 첨의부를 두면서 평장사를 고친 것으로, 24년(1298)에 없앴다가 곧 회복하여 34년(1308)에 중호(中護)로 고쳤다. 우리말샘

주9

폐단이 많은 정치. 우리말샘

주10

고려 시대에 둔, 밀직사의 으뜸 벼슬. 종이품 벼슬로 충렬왕 1년(1275)에 판추밀원사를 고친 것이다. 우리말샘

주11

장관에게 속한 관원. 우리말샘

주12

국청(鞠廳)에서 형장(刑杖)을 가하여 중죄인(重罪人)을 신문하던 일. 임금의 명령이 필요하였다. 우리말샘

주13

옥새가 찍혀 있는 문서.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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