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장미산성 ( )

충주 장미산성
충주 장미산성
건축
유적
국가유산
삼국 시대 신라가 충주 장미산에 축조한 둘레 294m의 포곡식 석축 산성.
유적
건립 시기
삼국시대
관련 국가
신라
관련 단체
충주시
둘레
290m
면적
442,382㎡
소재지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장천리 산77-1번지 외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국가유산청 사적(1997년11월11일 지정)
소재지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장천리 산77-1번지 외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충주 장미산성은 국가 사적으로, 충주시 가금면에 있는 장미산의 능선을 따라 쌓은 둘레 294m 가량의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충주 장미산성은 남한강의 수로와 한강 유역으로 통하는 육로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다. 백제의 조족문 토기가 출토되었고, 충주가 삼국의 각축지였다는 점에서 백제, 고구려, 신라가 차례로 이 성을 점령하였을 것으로 추정된 바 있다. 하지만 발굴 조사를 통해 현재의 석축 성벽의 축조 기법과 구조를 살펴보았을 때 6세기 중반 충주로 진출한 신라가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정의
삼국 시대 신라가 충주 장미산에 축조한 둘레 294m의 포곡식 석축 산성.
발굴 경위 및 결과

충주 장미산성은 1992년 충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 조사를 실시한 이후, 충주 지역에서 삼국의 항쟁을 잘 보여 주는 산성으로 판단되어 1997년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2002년에는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에서 서벽 북쪽 구간에 대한 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후 2004년에 중원문화재연구원에서 서벽 북쪽 및 북서쪽 회절부와 북벽 중앙부에 대한 발굴 조사, 2010년에 충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북벽 북동쪽 회절부에 대한 조사, 2012년에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에서 남벽 중앙부에 대한 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과정에서 서벽과 북벽의 성벽을 정비하고 복원하였다. 2016년에 국강고고학연구소에서 동벽에 대한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으며, 2022년 가을부터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가 산성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 연차 발굴 조사에 착수하였다.

건립 경위

충주 장미산성에서는 백제 토기와 고구려계 철촉이 출토되었다. 또한 충주 장미산성은 남한강의 수로와 한강 유역으로 통하는 주변의 육로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어 일찍부터 백제- 고구려- 신라가 차례로 점유하였을 것으로 추정된 바 있다. 그러나 그간의 발굴 조사에 따르면, 현재의 석축 성벽은 그 축조 기법과 구조로 볼 때 6세기 중반에 충주로 진출한 신라가 축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변천

충주 장미산성은 신라가 충주에 진출한 6세기 중엽 이후 남한강변에 축조된 성이다. 고려 시대부터 장미산성의 남쪽에 조세 수납과 운반을 위한 창고가 있다가, 북으로 옮겨져 가흥창(可興倉)이 운영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충주목(忠州牧)의 서쪽 28리 지점에 장미산이 있고, 거기에 옛 석축의 성터가 있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 시대 이전에 폐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형태와 특징

충주 장미산성은 충주시 장미산(해발 337m)의 능선을 따라 석축 성벽을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성벽의 전체 둘레는 294m이다. 산성은 서쪽을 제외한 삼면이 남한강과 인접해 있어, 남한강의 수로와 한강 유역으로 통하는 주변의 육로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해 있다. 산성의 주변에는 백제의 취락인 탑평리 유적, 고구려가 조성한 충주 고구려비와 봉황리 마애불 상군, 그리고 신라의 중원경 등 삼국의 각축과 관련한 여러 유적이 있다. 또한 충주 장미산성에서는 4~5세기로 편년 되는 조족문이 시문된 백제 원저단경호와 신라의 토기와 철기가 출토되었다.

산성의 문지는 남문지와 서문지가 있는데, 서문지의 바깥쪽에는 외환도가 설치되어 있다. 성벽은 기본적으로 경사면을 ㄴ자로 파서 기저부를 평평하게 조성한 다음, 장방형으로 치석된 석재로 수평 줄을 맞춰 정연하게 쌓았다. 체성 벽은 외벽을 뒤채움 돌과 함께 쌓았는데, 일정 높이가 되면 윗면 일부에만 내벽을 쌓았다. 다만 북쪽 성벽의 경우에는 내벽의 뒤채움 토를 두텁게 만들었는데, 이는 계곡부의 특성상 물에 의한 성벽의 붕괴 위험을 줄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체성 벽의 바깥쪽에는 23단 가량 석재와 점질토 내지는 사질토를 다져서 덮은 형태의 보축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북쪽 성벽에는 회절부에 목책 치가 설치되었다. 또한 성벽에는 투석용 석환을 보관할 수 있는 시설도 발견되었는데, 240x90120cm 규모의 석곽이 450~900cm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다. 이밖에도 성벽 안쪽에는 북쪽 경사면을 따라 내려가면서 설치된 배수로가 확인되고 있는데, 성벽과 교차하는 지점에 별도의 수구(水口)가 확인되지 않고 있어 성벽 위로 물이 흘러 나가도록 설계된 것으로 보인다.

의의 및 평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충주 장미산성은 충주시의 북서쪽에 위치하며, 남한강이 장미산성의 동쪽을 돌아 북쪽으로 흘러 나간다. 장미산성의 서쪽을 제외한 삼면이 남한강과 접해 있어 수로와 육로를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삼국의 각축장이었던 충주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백제-고구려-신라에 의해 차례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실제로 성 내에서는 백제의 조족문이 타날된 원저단경호 등이 출토되고 있기는 하지만, 현재의 석축 성벽은 신라가 충주 지역으로 진출한 6세기 중엽 이후에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원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단행본

『중원 장미산성 -지표조사보고서』(충북대학교박물관, 1992)
『장미산성 -정비예정구간 시굴조사 보고서』(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2003)
『충주 장미산성 1차 발굴조사 보고서』(중원문화재연구원, 2006)
『충주 장미산성 시굴조사보고서』(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2014)
『충주 장미산성』(국강고고학연구소, 2018)
관련 미디어 (4)
집필자
양시은(충북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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