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여온(汝溫). 황징(黃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준원(黃浚源)이고, 아버지는 황순경(黃舜卿)이며, 어머니는 조계상(曺繼商)의 딸이다.
1543년(중종 38)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1552년(명종 7) 식년 문과에 급제, 그 뒤 예문관검열을 거쳐 정언이 되었다. 정언 역임 시 부경(赴京)하는 통사의 불법행위를 근절시키기 위해 공무(公貿)를 금지토록 해야 한다고 상소하자 왕이 윤허하였다.
그 해 사헌부지평으로 전임되어, 사헌부의 여러 관원들과 같이 김홍도(金弘度)·김계휘(金繼輝)·이구수(李龜壽) 등의 탐학을 탄핵하였다. 1558년 사간원헌납이 되고, 이후 선공감판관·병조정랑, 부수찬·수찬 등을 거쳐 사헌부장령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세자시강원문학이 되었다가 다시 장령이 되었다. 1560년 의정부사인, 이후 사간원사간·홍문관교리·군자감정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후 호조참의와 우부승지·우승지·좌승지로서 계속 임금을 시종하였다.
1573년(선조 6) 나주목사를 거쳐 여주목사로 재임 당시 지방관 중에서 가장 고을을 잘 다스려 특지로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풍헌(風憲)의 수장으로는 적합치 못하다는 사론으로 탄핵되어 체직되었다. 1577년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 왔으며, 공조판서·호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역임하다가 75세로 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