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곡재사(孝谷齋舍)는 조선 중기의 문신 우곡(愚谷) 송량(宋亮, 1534~1618)의 향사(享祀)와 자제의 훈육을 위하여 그가 살았던 상주 효곡리에 그의 증손 송영(宋穎)이 1685년(숙종 11) 건립한 건물로 추정된다. 현존 건물은 효곡1리에서 약간 남쪽에 있는 재실마에 있다.
송량은 성운(成運, 14971579)에게 배웠고, 정구(鄭逑, 15431620)의 천거로 관직에 나아갔다. 아버지 송당에 대한 효행이 극진하여 송량이 살던 마을 이름을 소곡리에서 효곡리로 고치게 되었다고 한다. 송량 자신은 임진왜란 중 의병으로 공을 세웠고, 아들 송이회와 송이필은 양친을 구하다 죽었으며, 딸인 노경건(盧景健)의 처와 정이괄의 처는 수절하여 한 집에 다섯 충효 열인이 있었다. 송량은 일찍부터 상주의 풍속교화에 앞장서, 1566년(명종 21) 병인년 낙사계(洛社稽)와 1578년(선조 11) 무인년 낙사계 조직, 그리고 1599년(선조 32) 두 낙사계의 합사를 이끌었고, 1606년(선조 39)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창설하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상주 효곡리와 인접한 상주 용신리의 효곡서원(孝谷書院) 또한 1685년 효곡리에 건물을 짓고 송량을 향사한 때를 서원의 시작으로 친다. 효곡서원은 이후 지세가 좁아 1724년(경종 4) 용신리에서 중건하면서 서대(西臺) 김충(金沖, 15131572), 월봉(月峯) 고인계(高仁繼, 15641647)를 추배하였고, 1786년(정조 10) 일묵재(一默齋) 김광두(金光斗, 1562~1608)를 추배하였다. 단, 효곡리의 원래 자리의 건물은 효곡재사로 송씨 문중에서 계속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효곡리 재실마 버스정류장에서 마을길로 들어서면 마을 제일 안쪽 뒷산 기슭에 남향해 있다. 돌담으로 둘러싸인 앞쪽에 맞배지붕 사주문이 있는데 근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사주문을 지나 마당에 들어가면 맞은편 경사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집이 있는데 이 재사의 중심 건물인 백원당(百源堂)이다. 정면에서 볼 때 백원당의 가운데 2칸이 대청이다. 대청 양쪽에는 정면 1칸에 깊이 1칸반의 온돌방과 그 앞의 반칸 깊이 툇마루를 설치하였고 측면과 후면으로 쪽마루가 이어진다. 전면은 이익공(二翼工), 후면은 대청 뒷벽에 소로수장(小櫨修粧)하였다. 대청 가운데 종보 위에는 파련대공(波蓮臺工)을 꾸미고 대청 양측 벽 위에는 사다리꼴 가로판대공을 올린 것은 16세기에 나타난 조선 중기적 수법이 17세기 후반에도 이어진 사례이다.
백원당 온돌방의 대청쪽 입면은 기둥을 경계로 한칸 쪽과 반칸 쪽으로 나뉜다. 한칸 쪽의 문 두 짝은 모두 띠살이고 밑단에 궁창을 달았는데, 3분의 2칸 크기의 넓은 들어열개 분합과 3분의 1칸 크기로 평소 여닫이 출입구 역할을 하는 문짝으로 나뉜다. 반칸 쪽은 들어열개 분합문 한 짝인데 격자살과 궁창으로 꾸몄으며, 격자살 가운데를 뚫고 띠살로 꾸민 외여닫이 눈꼽재기창을 달아 평소 사용에 간편하도록 만든 것이 특징이다. 온돌방 전면 쪽에는 쌍여닫이 창호를 달았는데 고식 기법인 창 가운데의 설주, 연귀맞춤의 수법 등이 건립 연대에 부합한다.
백원당 뒤에 신문과 담장을 설치한 별도의 일곽 내에 정면 3칸, 측면 2칸반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익공집인 사당이 있다. 반칸 깊이의 전퇴칸 안쪽의 정면은 골판문과 판벽으로 마감하였다. 익공은 연봉형 쇠서와 용머리로 꾸몄다.
효곡재사의 배치와 백원당의 세부는 조선 중기 경상북도 지역의 소규모 재실, 강당 건물 형식이 잘 보존된 사례이며, 인접한 송량 일가 정려각, 효곡서원 등 우곡 관련 문화유산들과 연계하여 지역 인물의 업적을 전승한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