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건릉 ( )

조선시대사
유적
문화재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와 효의왕후 청풍김씨의 합장 단릉.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단릉(單陵)
건립 시기
조선 후기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정조, 효의왕후
소재지
경기도 화성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70년 05월 26일 지정)
소재지
경기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 (안녕동)
내용 요약

화성건릉(華城健陵)은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와 효의왕후 청풍김씨의 합장 단릉이다. 정조건릉은 1800년 현륭원 동쪽에 처음 조성되었다가 1821년 현재의 위치로 천릉하고, 효의왕후를 합장해 단릉으로 조성하였다. 장조(莊祖, 사도세자)와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 홍씨)의 융릉(隆陵)과 함께 사적 ‘화성 융릉과 건릉(華城 隆陵과 健陵)’으로 지정되어 있다.

정의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와 효의왕후 청풍김씨의 합장 단릉.
건립 경위

최초의 건릉은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 주1의 동쪽으로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가 미리 정해 놓은 자리였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한 뒤 이곳에 건릉이 조성되었으며, 1821년 3월 22일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이 상소로 주2이 결정되었다.

1821년 3월 9일 효의왕후(孝懿王后) 청풍김씨(淸風金氏, 1753~1821)가 승하하자 능호(陵號)를 정릉(靜陵)으로 정했지만, 3월 22일 정조 건릉의 천릉과 효의왕후의 합장이 결정되자 건릉의 능호를 따르게 되었다.

변천

건릉 천릉 시 건릉의 석물을 대체로 옮겨 사용하였으며, 난간의 주3, 좌향석(坐向石) 등 일부만 새로 제작하였다. 건릉에 사용된 석재는 현륭원과 마찬가지로 수원 앵봉(鶯峯)의 석재를 사용하였다.

형태와 특징

건릉의 상설은 봉분 주변에 12면의 난간석, 난간석 뒤편에 주4, 주5 각 2쌍과 주6이 있다. 봉분 남쪽에 석상(石床, 혼유석)이 주7 위에 올려져 있으며, 좌우에 주8 1쌍, 혼유석 남쪽에 8각의 주9이 있다. 장명등 남쪽에 주10 1쌍, 주11 1쌍과 마석(馬石) 2쌍이 있다.

정조는 생전에 주12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이를 따랐다. 현륭원에서 양석, 마석, 호석은 1쌍씩만 제작하였으나, 능침에서는 모두 2쌍을 사용한다는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의 내용에 따라 조성하였다.

능강(陵岡) 아래에는 주13주14이 남북으로 자리하고 그 사이에 향로(香路: 제향 시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와 주15가 설치되어 있다. 정자각 주변에는 예감(瘞坎)과 비각(碑閣), 수라간(水刺間), 수복방(守僕房) 등이 건립되었으며, 홍살문 곁에 주16가 있다.

금석문

건릉의 표석은 1800년 처음 건립하였으며, 1821년 합봉(合封) 표석을 개수(改修)하였다. 1899년 정종(正宗)의 묘호를 정조(正祖), 효의왕후를 효의황후(孝懿皇后)로 높이면서 현재의 표석으로 건립하였다.

의의 및 평가

1800년 조성된 건릉의 구릉지는 2011~2012년까지 발굴되어 곡장, 현궁, 퇴광 등의 위치가 확인되었으며, 각종 명기(明器)가 발견되어 조선 후기 왕릉 조성과 왕실 공예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장조(莊祖, 사도세자)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 홍씨)의 융릉(隆陵)과 함께 사적 ‘ 화성 융릉과 건릉(華城 隆陵과 健陵)’으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원전

『건릉지(健陵誌)』

단행본

『융건릉』(수원박물관, 2021)

기타 자료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Ⅷ」(국립문화재연구소, 2015)
주석
주1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사도 세자의 묘. 정조 때 영우원을 고친 것으로, 후에 사도 세자를 장조로 추존(追尊)하고부터 ‘융릉’이 되었다.    우리말샘

주2

천거하여 받듦.    우리말샘

주3

돌 난간의 기둥 사이에 동자석을 받쳐서 건너지른 돌.    우리말샘

주4

왕릉이나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돌로 만든 양 모양의 조각물.    우리말샘

주5

왕릉이나 큰 무덤 주위에 돌로 만들어 세운 호랑이.    우리말샘

주6

능, 원, 묘 따위의 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    우리말샘

주7

무덤 앞의 상석을 괴는 북 모양으로 생긴 둥근 돌.    우리말샘

주8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돌 받침 위에 여덟모 진 기둥을 세우고 맨 꼭대기에 둥근 대가리를 얹는다.    우리말샘

주9

대문 밖이나 처마 끝에 달아 두고 밤에 불을 켜는 등.    우리말샘

주10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11

능(陵) 앞에 세우는 무관(武官) 형상으로 만든 돌. 능 앞 셋째 줄의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하나씩 세운다.    우리말샘

주12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주13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    우리말샘

주14

능(陵), 원(園), 묘(廟), 대궐, 관아(官衙) 따위의 정면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門).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지붕 없이 붉은 살을 세워서 죽 박는다.    우리말샘

주15

임금이 거둥하는 길.    우리말샘

주16

조선 시대에, 신주를 모셔 두지 아니한 빈 신위(神位)를 만들어 놓던 일.    우리말샘

집필자
김민규(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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