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광릉 ( )

조선시대사
유적
문화재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조선 제7대 왕 세조와 정희왕후의 동원이강릉.
이칭
약칭
광릉(光陵)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동원이강릉
건립 시기
1468년|1483년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세조|정희왕후
소재지
경기도 남양주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70년 05월 26일 지정)
소재지
경기도 남양주시 광릉수목원로 354 (진접읍, 광릉)
내용 요약

남양주광릉(南楊州光陵)은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조선 제7대 왕 세조와 정희왕후의 동원이강릉이다. 세조의 유언대로 석실과 병풍석을 폐지하고, 석회와 모래 · 황토를 섞어 회격을 만들고 난간석만으로 치장한 첫 사례이다. 또 왕과 왕후의 능이 같은 능역에 각각의 언덕으로 형성된 동원이강릉으로, 삼년상 동안에만 가정자각을 세워 각각 제례를 지내지만, 기간을 마치면 정자각을 두 능의 중심에 옮겨 짓고 합하여 제향하도록 규례를 정하였다.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조선 제7대 왕 세조와 정희왕후의 동원이강릉.
건립경위

1468년 9월 8일에 세조가 수강궁 정침에서 승하하였다. 세조가 죽음을 앞두고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주1주2을 마련하지 말라.”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간에 왕릉은 당연히 석실로 지어 왔으며, 석실이 없다면 부장품을 넣을 곳이 없으니, 석실을 폐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종은 세조의 명을 준행함으로써 산릉 공역으로 생기는 백성의 폐해를 줄이겠다고 결정하였다.

산릉 터는 풍양에 있던 정흠지의 무덤 영역으로 정하고, 예종이 직접 간산에 참여하여 지형을 확인하였다. 기존 묘역을 이장하기 위하여 자손들에게 필요한 물품과 일꾼을 내려 주는 것으로 공역이 시작되어 11월 28일에 국장이 이루어졌다.

1483년 3월 30일에 정희왕후가 온양행궁에서 승하하였다. 왕후의 능은 광릉의 동쪽에 축좌미향(丑坐未向)으로 자리 잡았으며, 6월 12일에 국장을 행하였다. 같은 골짜기에 두 개의 능이 각각의 언덕에 조성되는 동원이강릉의 첫 번째 사례였다.

변천

1471년에 광릉을 조성한 지 3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봉분이 무너졌다. 원인은 주3을 사용하지 않은 것과 능 안쪽에 삼물회를 과다히 높이 쌓아서 잔디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해결책으로 능을 넓히고 흙을 두텁게 덮어서 주4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하고, 지형의 경사를 높여서 물이 잘 흐르도록 하였다.

1483년에 정희왕후의 능이 동쪽에 자리 잡으면서 동원이강릉을 이루었으며, 삼년상을 마친 1485년 3월 30일에 주5을 가운데로 옮겨 세워, 왕과 왕후의 제향 공간을 합하였다. 1754년에 표석을 세우고 주6을 갖추었다. 1962년에 광릉 주변 산림이 주7로 지정되었으며, 1999년에 주8을 건립하였다.

형태와 특징

서쪽에는 세조의 능침이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배치되고, 동쪽에는 정희왕후의 능침이 축좌미향(丑坐未向)으로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V’ 자 형태를 보인다. 두 축이 만나는 곳에 정자각이 있다.

왕과 왕후의 주9주10으로 만들었으며, 봉릉에는 주11 없이 난간석만을 둘렀다. 왕후의 난간석에 주12에는 십이지상이 세겨져 있어 특징적이다. 병풍석의 면석에 십이지신을 조각하여 방향을 상징한 것을 병풍석을 생략하면서 난간석 동자주에 표현한 것이다.

광릉의 정자각은 본래 8칸에 주13으로 건립되었으나, 현재는 정전 3칸, 배위청 2칸으로 총 5칸 규모이다. 정자각 뒤쪽으로 28보 위치에 주14가 있으며, 서북쪽으로 27보 위치에 비각을 갖추어 표석이 서 있다. 정자각의 남쪽으로 270보 자리에 주15이 있다.

의의 및 평가

광릉은 조선왕릉이 석실릉에서 회격릉으로 전환되는 사례이다. 조선 건국 초기부터 주16』를 따라 회격으로 현궁을 조성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조의 유언을 계기로 석회와 모래 · 황토를 비율에 따라 섞어 반죽하여 회격릉을 만드는 첫 시도를 하였다. 또 왕과 왕후의 능이 동원이강릉으로 조성되면서 가정자각 제도를 정립하게 되었다. 광릉의 8칸 규모의 정자각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정자각이 8칸으로 건립되는 전례가 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춘관통고(春官通考)』

단행본

『종합학술조사보고서-조선왕릉Ⅱ』(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인터넷 자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s://www.heritage.go.kr/)
위키실록사전(http://dh.aks.ac.kr/sillokwiki)
주석
주1

고분 안의 돌로 된 방.    우리말샘

주2

자연 석괴로 토광 내 장방형의 곽을 쌓아서 만든 것.    우리말샘

주3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둘레에 병풍석 대신으로 둘러 세운 돌.    우리말샘

주4

무덤에 떼를 입혀 잘 다듬는 일.    우리말샘

주5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    우리말샘

주6

비를 세우고 비바람 따위를 막기 위하여 그 위를 덮어 지은 집.    우리말샘

주7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조류 서식지. 남양주시 진접읍(榛接邑)ㆍ별내면(別內面)ㆍ수동면(水洞面), 포천시(抱川市) 소흘면(蘇屹面)ㆍ내촌면(內村面)에 소재한다. 우리나라 천연기념물이다.    우리말샘

주8

경기도 포천시 소홀읍 광릉숲 안에 있는 수목원. 1,123ha의 자연림에 6,873종의 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전문 전시원, 산림 박물관, 산림 생물 표본관, 산림 동물 보전원, 난대 온실, 열대 식물 자원 연구 센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999년에 광릉 수목원에서 이름이 바뀌었다.    우리말샘

주9

임금의 관(棺)을 묻던 광중(壙中).    우리말샘

주10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    우리말샘

주11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주12

들보 위에 세우는 짧은 기둥. 상량(上樑), 오량(五樑), 칠량(七樑) 따위를 받치고 있다.    우리말샘

주13

위 절반은 박공지붕으로 되어 있고 아래 절반은 네모꼴로 된 지붕.    우리말샘

주14

임금이 능에서 제사를 지내고 축문(祝文)을 태우던 곳.    우리말샘

주15

능(陵), 원(園), 묘(廟), 대궐, 관아(官衙) 따위의 정면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門).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지붕 없이 붉은 살을 세워서 죽 박는다.    우리말샘

주16

중국 명나라 때에 구준(丘濬)이 가례에 관한 주자의 학설을 수집하여 만든 책. 주로 관혼상제의 사례(四禮)에 관한 사항을 담았다.    우리말샘

집필자
신지혜(건축문헌고고스튜디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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