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들은 고래를 설치하여 화기가 고래 위에 덮여 있는 구들장을 뜨겁게 덥혀 방바닥 전체를 난방하는 구조물이다. 온돌이라고도 한다. 아궁이에 불을 때서 불길이 고래를 통과하여 돌로 된 구들장을 데우고 굴뚝으로 연기가 빠져나가는 난방 방식으로 한국 고유의 것이다.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고 철기시대 유적에서는 구들이 확실히 확인될 정도로 그 연원이 오래되었다. 방의 한쪽에만 1줄~3줄로 구들을 들이는 초기의 쪽구들에서 방 전체에 구들을 들이는 전면구들로 발전했는데, 아궁이·부뚜막·고래·축조재료·굴뚝의 형식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구들은 불 때는 아궁이, 불길을 통과시켜 구들장을 덥히는 고래, 연기를 배출하는 굴뚝으로 구성된다. 아궁이에 지핀 불이 고래를 통과하면서 그 위에 깔린 구들장을 덥혀 난방하는 바닥 난방방식으로 화재에도 안전한 한국 고유의 이상적인 채난법(採暖法)이다.
구들은 온돌(溫突)이라고도 하는데, 구들은 ‘구운 돌’, 온돌(溫突, 溫堗, 煖堗, 燠室)은 '따뜻하게 데운 돌'에서 유래된 단어로 추정되므로 동일한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보통 구들은 '들인다'고 하고 온돌은 '놓는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이는 구들은 고래와 고래뚝으로 구성된 구조를 설명하는 느낌이 강하고, 온돌은 구들장 자체를 지칭하는 경향이 강하다. 또 구들은 한자표현이 없는데 온돌은 한자표현이 있다. 그러면 구들의 한자표현이 온돌이라고 인식하기 쉬우나 온돌의 '돌'은 돌멩이와 같이 순수한 국어를 한자로 차음하여 표현했을 뿐이다. 따라서 구들과 온돌은 다 같이 순수한국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구들은 고래와 고래뚝을 한정적으로 지칭하는 느낌이 강하고, 온돌은 구들장에서 유래했겠지만 아궁이와 고래, 굴뚝으로 구성된 난방방식 전체를 지칭하는 느낌이 강하다.
지금은 온돌이나 구들이라고 하면 방 전체에 구들을 들인 것을 지칭하지만, 남북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쪽에만 1∼3줄로 구들을 들이는 부분 구들방식도 있었다. 전면구들과 부분구들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부분구들을 ' 쪽구들'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쪽온돌은 표현이 어색하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구들은 고래를 중심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구들과 온돌을 혼용해서 사용하는 것은 큰 문제는 없으나 전면구들은 온돌이라고 하고 부분구들은 쪽구들로 구분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쪽구들의 경우 고래의 숫자에 따라 고래가 하나인 경우를 외줄고래, 두 줄인 경우를 쌍줄고래, 세 개인 경우를 세줄고래 등으로 구분하여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구들이 언제부터 설치되기 시작하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일부에서는 함경북도 웅기 지방의 청동기시대 움집에서 발견된 구들의 흔적을 예로 들기도 한다. 초기 철기시대 이후에는 구들이 확실히 등장하였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나타나는데, 수원시 서둔동 움집터에서 발굴된 'ㄱ'자형 쪽구들을 통해 볼 수 있다. 이는 기원전 300년 이후 초기철기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한지역에서는 더 많은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평북 영변의 세죽리 움집에서 'ㄱ'자 쪽구들이 나타났고, 북창 대평리와 노남리 움집터에서도 초기철기시대 쪽구들이 발굴되었는데, 이 두 유적은 쌍줄고래라는 것이 특징이다.
쪽구들의 분포지를 보면 초기철기시대에는 흥개호(興凱湖) 남쪽의 중국 러시아 국경지대에 집중되어 있고, 고구려 중기 이후로 오면 고구려의 수도였던 환인과 집안에 집중되면서 한반도 남부까지 발견된다. 즉, 쪽구들의 중심지는 초기철기시대에 만주 동부와 연해주였다가 고구려 때에 만주 중남부와 압록강 중류 일대로 이동하였다가, 발해 때에 다시 만주 동부로 이동해 간다.
중국문헌에 기록된 고구려의 살림집에 관한 내용에는 구들시설이 있어 겨울철에 따뜻하게 지낸다고 하였으며, 구들을 중국에는 없는 고구려적 특색으로 표현하였다. 백제에 관한 기록에는 구들에 관한 내용이 없고, 다락집이 있어 거기에서 기거한다는 기록만이 남아 있다. 이로 미루어 백제는 남방주거형식의 특색을 보이고, 고구려는 청동기시대 이래의 북방주거의 특색을 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아직 방 전체에 구들을 들이는 전면구들을 설치하지는 않았다. 이 당시에 지어졌던 미륵사지 온돌 유적은 'ㄷ'자 평면을 이룬 쌍줄고래이다. 감은사의 온돌은 4줄 고래로서, 이러한 유형은 완도의 법화사 유적에서도 보인다. 또, 조령원구기(鳥嶺院舊基)의 발굴조사 때 고려시대의 건물터에서 구들 시설이 발견되어, 고려시대에는 이미 구들이 소백산맥의 남쪽지역에까지 설치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실은 북방의 구들이 그만큼 남하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전면구들은 고려시대에 와서도 민가나 궁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우나, 최근 발굴된 강화도의 선원사지나 양주의 회암사지에서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시기의 전면구들이 나타났다. 온돌의 전파경로를 보았을 때, 조선 초기에 들어와서는 구들이 조령을 넘어 남부지방으로 남하하고 있는 사실이 여러 기록에서 나타나고 있다. 즉, 선산 · 상주 · 안동 등지의 관아와 궁실에 관계되는 건축물들이 보수되거나 신축된 사실을 기록한 초중창 중수기에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시설을 구비하였다는 구절이 언급된다. 이것은 구들의 전파가 분명히 남부지방에까지 이루어졌음을 보이는 내용이라 하겠다.
이러한 구들전파의 예는 제주도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15세기 말엽에 벼슬한 제주출신의 고득종(高得宗)이 기록한 「홍화각중수기(弘化閣重修記)」에는 구들을 서쪽 방에 설치했다고 하였다. 즉, 조선시대에 들어서 16∼17세기에는 전면구들이 사대부집에 널리 퍼져나갔던 것은 분명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구들의 전파는 북방, 즉 한양에서 파견되는 관리들을 위하여 지어진 건물에 먼저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 뒤에 백성들에게까지 보급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홍화각중수기」 와 비슷한 시기의 사항을 기록하였다고 인정되는 『동국여지승람』에는 “백성들의 집에는 아궁이와 구들이 없어 땅바닥에서 잔다.”고 되어 있고, 17세기 후반에 제주 목사를 역임한 이형상(李衡祥)의 『남환박물지』에도 제주도 민가에는 구들이 없다는 기록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이익(李瀷)도 같은 기록을 하면서 이익이 살고 있었던 시절에 제주도 민가에 비로소 방 하나 정도에 구들시설이 존재하기 시작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백성들의 집에 구들이 보급되기 1∼2세기 전에 관리들의 집에는 구들이 시설되었던 것이므로 선산지방 일대의 경우도 관료들에 의하여 선도되고 백성들에게 보급된 것은 그보다 뒤졌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나 중앙관리가 향리에 돌아와 사는 집이나 궁실에 연관된 사찰 등에는 구들을 놓은 방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구들은 병을 치료하는 시설로 활용되기도 하고 노인들을 위한 시설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면구들의 설치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와 한반도 전역에 놓이기 시작한 시점 등은 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구들의 종류는 아궁이와 부뚜막, 고래의 형식, 축조재료, 굴뚝 및 고래의 형식 등에 따라 나눌 수 있다. 고래의 형식에 따른 유형으로는 외줄고래, 쌍줄고래, 세줄고래, 나란히고래, 선자고래, 맞선고래, 굽은고래, 허튼고래 등이 있다.
구들은 아궁이, 고래, 개자리, 연도(煙道), 굴뚝 등 각 부분으로 구성되며, 아궁이와 굴뚝의 배치는 서로 먼 위치에 두는 것이 효과적이고, 구들과 굴뚝을 연결하는 연도는 될 수 있는 한 짧게 하는 것이 좋다. 아궁이는 장방형 평면에서는 짧은 벽 중간에 두는 것이 가장 좋다. 불을 땐 열기는 구들 속을 장거리 우회하여 구들 축조재가 열을 많이 받을 수 있도록 꾸미는 것이 유리하다.
그러나 기체는 위치의 높낮이에 상관없이 단거리를 통하여 유통하므로 열기나 연기가 구들 속을 돌아나간다는 것은 기대할 수가 없다. 불길이 아궁이 밖으로 나오는 이유는 구들 속의 연기가 체류되거나 굴뚝에서 역기류가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것을 피하는 길은 아궁이에서 부채질(환풍작용)을 하거나 굴뚝을 높게 만드는 것이다. 아궁이 중에서 고막이 벽에 낸 아궁이를 함실아궁이, 그 바깥에 부뚜막을 만든 것은 부뚜막아궁이라고 한다. 부뚜막아궁에서는 고막이에 직접 구들을 만든다.
하지만 방밑에 불목을 두 세 개 만들어 두 골 이상이 모이게 하여 솥 숫자에 맞추어 만들기도 한다. 아궁이는 좌우에 둑을 쌓거나 돌을 세워 대고 위에 이맛돌을 건너질러 축조한다. 구들 안에 둔 불목은 2∼3자 정도로 평평하게 만들고 고래가 시작되는 곳에는 부넘기를 만든다.
아궁이에서 굴뚝 연도까지 도랑과 같이 축조하고, 그 위에 구들장을 덮어 연기가 흘러나가게 만든 곳을 고래 또는 방고래라고 한다. 고래 옆에 쌓아 구들장을 받치는 것을 고래둑이라 한다. 고래가 끝나는 곳에서는 고래방향과 수직을 이루도록 벽선을 따라 골을 깊에 파는데 이를 개자리라고 한다. 굴뚝 하부도 깊게 파는데 이를 굴뚝개자리라고 한다. 개자리는 공기가 식으면서 그을음 등을 떨구어 모으는 기능을 한다. 고래는 아궁이 쪽이 가장 낮고 굴뚝 쪽으로 갈수록 높게 경사가 있어서 불이 잘 든다. 고래의 깊이와 너비는 방의 크기와 아궁이와 굴뚝의 거리 또는 구들장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
불목은 아궁이 안쪽에서 연료가 타는 자리로서 부뚜막 속은 그 자체가 불목이 되며, 함실아궁에서는 방의 내부 구들 밑에 둔다. 불목은 고래 바닥보다 한 단 낮게 잡고 아궁이 밑바닥과 같거나 조금 높게 한다. 모든 고래는 불목에 접속되는 것이 좋지만 대개는 두 세 골이 한 골로 합쳐지게 된다. 부넘기는 고래 바닥 어귀에 세모꼴로 흙을 쌓아서 고래의 절반 정도를 막은 것이다. 불목에서 타는 화염의 열기가 높이 올라가 구들장에 닿고, 또한 불티나 재가 날아 들어가더라도 곧바로 내려앉아 고래가 메는 것을 막기 위한 시설이다.
바람막이는 고래가 개자리에 접속되는 곳에 삼각형으로 고래를 조금 막아놓은 턱이다. 이것은 고래의 끝 부분에 두둑 높이의 반 정도를 찰흙으로 채워서 굴뚝을 타고 들어오는 찬바람을 막고 고래에서 흘러나가는 열기를 더 오래 머무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온돌석이라고도 하는 얇고 판판한 구들장을 고래둑 위에 나누어 설치하고 윗면에 진흙을 발라서 방바닥을 꾸민다. 구들장은 아랫목에서 낮고 주변으로 갈수록 높게 놓으니까 위에 바르는 흙은 아랫목에서 가장 두껍다. 윗목에서는 구들장이 간신히 덮일 정도로 흙을 바른다. 또 불목에서는 고래가 서로 모이게 되지만 붙일 수는 없기 때문에 불목자리는 넓어서 두껍고 넓은 구들장을 쓰게 된다. 따라서 구들장이 얇은 것은 두 겹으로 놓아 빨리 뜨거워지는 것을 방지한다.
구들장은 고래둑 위에서 작은 돌로 네 귀를 받치는데 흔들리지 않게 놓는다. 그리고 구들장과 구들장 사이 또는 고막이 부근에서는 틈에 작은 돌을 끼우고 빈틈을 찰흙으로 메운 다음 윗면은 수평으로 흙을 바른다. 이 때 주의할 점은 모래를 많이 섞은 진흙을 고막이에 발라 갈라지지 않게 해야 한다. 이 고막이 바름을 소홀히 하면 근접되어 있는 기둥 밑이나 하방 등 목재로 된 부분에 불기가 새어들어 불이 날 염려가 있다.
진흙을 바른 뒤에는 건조시키기 위하여 불을 때고 덜 마른 곳에는 숯불 또는 곁불을 바닥에 놓아 말린다. 잘 말랐으면 부드러운 진흙이나 황토에 모래와 여물 등을 섞어서 재벌바름 한다. 재벌바름이 건조하면 논에서 채취한 회색의 끈기가 없는 매흙을 묽게 타 솔이나 비로 바르는데 이것을 맥질이라 한다. 다만 장판을 바를 때는 갈라진 곳만을 때워 바르고 맥질을 하지 않아도 된다.
고막이 밑을 통하여 굴뚝까지 수평으로 연기가 빠지게 만든 것을 연도라 하는데, 기단 밑을 통하여 뒷마당을 건너 굴뚝에 연결되기도 한다. 민가에서는 대개 기단 위에 굴뚝을 세우거나 반침 밑을 통하여 벽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세운 굴뚝까지 연도를 축조한다. 따라서 반침 밑을 통과하는 연도는 연기가 새지 않게 해야 한다. 구들은 4∼5년이 지나면 구들미, 굴재, 굴진 등을 제거해야 하므로 나무나 솔가리를 때던 시절에는 구들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일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