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서당은 신라통일기에 중앙에 배치한 9개 군부대이다. 국가적 단결과 민족적 융합을 위하여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까지 포함하여 조직한 수도방비군이다. 583년에 설치한 서당을 시작으로 비금서당이 설치되는 693년까지 약 100여 년간 정비되었다. 613년에 서당을 녹금서당으로 개칭하였고, 672년에 백제민으로 구성된 백금서당을 설치하였으며, 677년에 자금서당을 설치하였다. 그 이후 고구려 유민으로 구성된 황금서당, 말갈인으로 구성된 흑금서당, 보덕국인으로 구성된 벽금서당과 적금서당 등을 설치하였다. 693년 비금서당을 설치함으로써 완성되었다.
신라의 모든 제도와 마찬가지로 구서당도 점진적으로 정비되었다. 583년(진평왕 5) 서당(誓幢)으로 시작해 693년(효소왕 2)에 장창당(長槍幢)을 비금서당(緋衿誓幢)으로 개칭하기까지 약 100여 년 간에 걸친 정비 끝에 마련되었다.
신라는 6세기 이후 영토의 확장, 백제 · 고구려와의 충돌, 그리고 7세기의 통일 전쟁을 겪으면서 군사 조직의 정비와 강화가 절실히 요구되었다. 더구나 왕권 확립을 위해서는 관료 조직은 물론 왕궁이나 수도방어군의 존재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544년(진흥왕 5)의 대당(大幢)을 비롯해 육정(六停)이 성립하였고, 613년에는 583년에 만든 서당을 녹금서당(綠衿誓幢)으로 개칭하였다. 진평왕은 조부(調府) · 위화부(位和部) · 승부(乘府) · 예부(禮府) · 영객부(領客府) 등 중앙 관부를 설치했고, 622년에는 왕의 비서실에 해당하는 내성(內省)을 두어 전제 왕권 확립을 꾀하였다.
진평왕 때의 서당 · 낭당(郎幢)의 설치는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과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이 때는 구서당이 아니고 단지 서당 · 낭당의 이름으로 단순히 수도 방비와 치안 유지의 군대라는 의미가 컸다. 그런데 앞서 613년에 서당을 녹금서당으로 개칭했다는 기록은 660년(무열왕 8)의 백제공격과 661년(문무왕 원년) 및 668년의 고구려 공격 시에 여러 건의 서당부대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모순이 발생된다. 따라서 서당을 녹금서당으로 개칭한 시기를 백금서당이 만들어진 672년이나 낭당을 자금서당(紫衿誓幢)으로 개칭한 677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비슷한 관점에서 서당을 녹금서당으로 개칭한 시기를 613년의 계유년을 1주갑 늦춘 673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673년은 신라 정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던 김유신이 죽으면서 이를 기회로 아찬 대토(大吐)가 당나라와 연계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정치정세가 불안정한 시기였다. 이 당시 문무왕은 왕실의 안위와 부당(附唐)세력을 이용하여 신라를 조정하려고 하는 당나라의 책동을 제어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중앙주둔 군부대에 대한 통제력강화조치의 하나로 국왕에 직속하는 성격의 부대에 왕권에 충성하는 부대로서의 성격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녹금서당으로의 개칭을 추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르면 구서당 중 백제민으로 구성된 백금서당이 672년에 가장 먼저 설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문무왕은 백제 고지를 장악하고 소부리주를 설치하면서 신라의 영역임을 확실히 하였다. 그리고 백제 유민들도 신라왕의 지배와 보호를 받는 존재임을 인식시키고 신라왕조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확보하려는 목적에서 백금서당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다음해인 673년에 옛 백제의 귀족관료들을 신라의 귀족관료로 편입하기 위한 조처와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피정복민도 중앙의 핵심군단의 병원으로 편제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후 구서당은 자금서당이 설치됨으로써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자금서당은 문무왕 이전에 설치된 낭당을 677년(문무왕 17)에 개편해 만들었다. 그런데 이때의 낭당을 화랑도로 구성된 부대로 보는 견해가 있다. 우선 ‘낭(郎)’자가 화랑(花郞)의 ‘랑’자와 유사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진평왕대(眞平王代)부터 화랑도 출신들이 부장이나 소감(少監)과 낭당대감(郎幢大監)에 보임된 상태에서 참전하고 부대에 편성된 기록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특히 화랑인 김흠운(金歆運)이 낭당대감으로서 참전하였고 당시 함께 전사한 화랑들이 낭당 소속 군관명을 칭하였다는 점을 들어 낭당과 화랑도와의 관련성을 들고 있다.
황금서당(黃衿誓幢)은 683년에 설치된 고구려 유민으로 구성된 부대이다. 흑금서당(黑衿誓幢)은 683년에 말갈인으로 구성, 설치하였다. 벽금서당(碧衿誓幢) · 적금서당(赤衿誓幢)은 686년 보덕국인으로 구성해 만든 부대이다. 684년에 안승(安勝)의 조카인 대문(大文)이 금마저(金馬渚 :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에서 반란을 일으켜 신라가 이들을 토벌하고 국남(國南)의 주군으로 옮겼는데, 그들에 대한 억압과 통제의 수단으로 만들었다. 청금서당은 687년에 백제 잔민으로 구성해 만들었다. 비금서당은 693년(효소왕 2) 장창당을 개편해 만들었으며, 기병이 주가 되었다. 이로써 9서당이 완성되었다.
『삼국사기』 직관 하 범군호(凡軍號)조에는 구서당이 육정(六停) 다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금색(衿色)에 의해 구별되는 획일적인 부대명칭을 가지고 있고, 배속된 군관(軍官)이 21종이나 되는 등 다른 군단(軍團)보다 그 수가 많았으며, 중요한 군관을 모두 망라하고 있다. 또한 무관조에 나오는 많은 부대들 가운데, 그 구성원들의 출자(出自)를 밝히고 있는 것은 구서당이 유일하다. 또한 9개의 부대 가운데 2/3나 되는 6개의 부대가 피정복민으로 구성된 것도 구서당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서당은 통일 전까지 2개가 있었으나 당나라군 축출 이후 9개로 늘어났는데, 그 대부분이 신문왕 때 설치된 것이다. 그리고 신라인 3개 부대, 고구려인 1개 부대, 백제인 2개 부대, 보덕국인 2개 부대, 말갈인 1개 부대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실제로 보덕국인은 고구려 잔민이므로 고구려인으로 구성된 부대는 3개인 셈이다. 이것은 민족간의 배려나 안배를 위한 것이었다. 특히 687년(신문왕 7)의 청금서당(靑衿誓幢)이 ‘백제잔민위당(百濟殘民爲幢)’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백금서당(白衿誓幢)은 ‘백제민위당(百濟民爲幢)’인 데 비해 청금서당은 ‘잔(殘)’자가 붙어 있어 양자간에 의미상의 차이를 느끼게 한다. 백제잔민위당은 관용과 포용의 뜻이 아니며, 백제 유민 중에서 반란자나 적대자를 따로 뽑아 노예로 만들어 구성한 군대가 아닌가 추측된다.
따라서 성립 당시의 뜻과는 달리 구서당은 후기로 오면서 의미가 변질된 듯하다. 이러한 구서당에는 장군 18명을 비롯해 21군관이 1,094명이나 되었다. 특히 신라 전체의 장군 수가 36명인데, 그 절반이 구서당의 지휘관이 되었다. 각 서당에는 사령관으로서 장군이 2명씩 있고, 그 아래 부사령관인 대관대감(大官大監)이 4명씩 있으며, 여러 종류의 군관들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비금서당의 전신이 ‘창당(槍幢)’이라든가, ‘흑의장창말보당주(黑衣長槍末步幢主)’ 등에서 나타난 창병의 뜻은 보기당주(步騎幢主) · 보기감(步騎監) 같은 기마병과 함께 구서당의 성격을 나타낸다. 다시 말하면 대개의 부대가 보병 · 기병으로 나뉘어 각기 전문적인 전술과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구서당(九誓幢)에서의 ‘서(誓)’자는 ‘맹세하다’ · ‘약속(約束)하다’ · ‘계(戒)하다’ · ‘호령(號令)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구서당의 성격을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군대’로 보고 왕의 서(호령)를 받은 군대 즉 왕에 직속한 군대로 파악한 견해가 있다. 이 서당을 구성한 구성원들은 소모(召募)병이었으며, 병부(兵部)가 이 소모업무를 담당하였다. 따라서 서당은 소모병으로 구성된 부대로서 국왕에 충성을 서약한 국왕 직속의 부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왕권 강화를 추진하고 있던 중대의 집권세력으로서는 통일 전쟁을 치루는 과정에서 비록 규모의 차이는 있다고 하더라도 사적으로 무장 세력을 거느리고 있던 장군세력들의 힘을 억제하여야 했다. 이러한 각도에서 보면 국왕의 군사권 강화의도와 서당의 성격은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이에 중대 왕실은 서당을 바탕으로 중앙군단을 설치하였고 그 결과 구서당을 핵심적인 중앙군단으로 편제하였던 것이다.
이 구서당을 구성한 병원(兵員)의 신분에 대해 피정복민 포로로서 천민적인 성격의 존재로 파악하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이들이 경제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군인이 되기에 적합한 각 지역의 유력자들로 보고 있다. 우선 신라민으로 구성된 3개 부대의 구성원들이 소모병으로 천민적 존재가 아니므로 역시 소모병들로 이루어진 나머지 부대의 구성원들도 천민적 존재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구서당은 보병과 기병의 혼합부대인데, 기병의 경우 말과 마장구(馬裝具)를 마련할 정도의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앙의 핵심군단으로서 국왕 직속부대를 천민적 존재의 포로로 충원한다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라는 신라의 백성과 피정복국의 백성 가운데 경제력도 있고 날래고 용맹한 자들을 중앙의 핵심군단인 구서당의 병원으로 충당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정부가 피정복민들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을 뿐 아니라 각 지역의 유력세력들을 그들의 기반과 유리시킴으로써 재지적 성격도 약화시킬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통일 이후 신라는 당나라의 점령 지역에서 도망해 온 많은 유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면서 반당 세력을 구축해야 했음은 물론, 백제와 고구려의 잔민(殘民)을 포섭, 융합해야 하는 민족적 과제를 안게 되었다. 따라서 거족적인 대당(對唐) 투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민족적 융합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점 외에, 정복된 백제와 고구려의 백성에게도 국정 참여의 길을 열어줌으로써 새로운 민족 국가의 출범을 확인시키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구서당의 완성 배경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통일직후 평화기를 상정하고 구서당의 증설과 완성이 이민족에 대한 무관직 수여를 위한 것으로 보는 측면과 왕권 강화를 위한 무력적 기반의 완성으로 보는 견해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나당전쟁(羅唐戰爭) 기간에 벌어진 당과 토번(土蕃)과의 전쟁에 주목해 구서당의 조직이 전쟁재발의 우려가 팽배한 분위기 속에서 대규모 군비확장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는 676년에 나당전쟁이 전쟁의 종결이 아니라 토번의 침입으로 인해 당나라가 주력군을 서역으로 돌리게 되면서 잠시 휴전(休戰)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가 언제 바뀌어 다시 전쟁이 재발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구서당 등의 대규모 군조직의 개편과 확장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구서당은 왕권 수호를 위한 수도 방비의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서 통일 전쟁 과정에서 이민족에 대한 관용의 의미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전제 왕권이 확립된 이후에는 그러한 의미보다 반발하는 귀화민에 대한 억압과 통제의 수단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