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읍성 ()

건축
유적
국가유산
조선 성종 대,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에 초축한 조선시대 석축 읍성.
이칭
이칭
남원성(南原城)
유적
건립 시기
조선 전기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낙상지(駱尙志), 양원(楊元)
둘레
3,441m
소재지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향교동 ‧ 동충동 등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남원읍성(南原邑城)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지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1982년 11월 03일 지정)
소재지
전북 남원시 동충동 464-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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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남원읍성(南原邑城)은 1477년 성종의 명에 의해 축성하기 시작하여 1530년 이전에 완성되었다. 1593년 7월 임진왜란 때 파손된 남원읍성을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와 양원(楊元)이 옹성과 치성, 양마장과 해자 등을 설치하며 증축하였다. 남원읍성은 평지성으로, 4벽의 중간에 문이 개설되었으며, 지대석을 놓고 대형의 석재를 20cm 정도 들여쌓기한 조선시대의 축성법을 잘 보여주는 성이다. 이곳에서는 우리나라 성곽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양마장 시설도 발견된다.

정의
조선 성종 대,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에 초축한 조선시대 석축 읍성.
연혁

『성종실록』에는 성종의 명에 의해 1477년(성종 8) 현재의 남원읍성을 축성하기 시작하여 1479년 7월에 절반 가량 쌓았고, 1492년(성종 23) 이전에 완성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때부터 읍성이 너무 좁아 남원의 백성을 보호할 수 없으니 증축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났다. 초축된 남원읍성은 둘레가 3백여 척(尺), 뒤로 물려서 쌓았다고 하더라도 5,097척(尺)에 불과하여 소읍(小邑)의 성곽에도 미치지 못하는 규모였다. 그 후 어느 시기에 남원읍성을 증축하였는지는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원읍성의 둘레가 8,199척이라 적힌 것으로 보아, 남원읍성은 1530년 이전에는 현재의 규모로 증축된 것으로 보인다.

남원읍성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큰 변화를 맞이하였다. 1592년 6월 29일 진주성이 함락된 이후 남원읍성도 큰 피해를 입었다. 1593년 7월 임진왜란 때 파손된 읍성을 명나라의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가 수축(修築)하고 옹성(甕城)과 치성(雉城)을 설치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전에 명나라의 총병(總兵) 양원(楊元)은 체성을 수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마장(羊馬墻)과 해자를 설치하였고, 여장(女牆)을 이용하여 성벽의 높이를 16척으로 증축하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원읍성은 정유재란 때 함락되어 4곳의 문루가 파괴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1692년(숙종 18) 네 곳의 문루를 중건하고 치성 16곳을 복원하는 등 읍성을 재건하는 데 힘을 모았다.

1752년 『용성지』 「남원관부도」와 1872년 「남원부 지방지도」 등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남원읍성의 성내에는 동헌을 비롯해 객사였던 용성관(龍城館) 등 많은 건물들이 있었고, 성 밖에는 사직단(社稷壇), 성황단, 관왕묘 등이 있었다고 한다.

1894년 동학 농민군에 의해 남원읍성의 동 ‧ 서 ‧ 남문이 불에 탔다. 북문은 전주~순천 사이에 도로가 개설된 1911∼1913년 즈음에 사라졌다. 1935년 일제의 전라선 개통과 남원의 도시화로 성의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다. 그 후 북벽과 서벽의 일부 구간만 남아 있었는데 1989년부터 1999년까지 3차례의 정비 복원 사업을 실시하여 현재 약 200m 정도의 성벽이 복원되었다.

남원읍성의 규모는 동벽 866m, 서벽 850m, 남벽 870m, 북벽 855m이며, 총 둘레는 3,441m이다.

발굴경위 및 결과

1997년부터 2020년까지 남원읍성에 대한 20여 건의 시굴 및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어느 정도 남아 있는 북성벽을 중심으로 시 ·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북성벽을 비롯하여 북문지, 치성, 양마장(낮은 담장 형식의 방어 시설), 해자 등의 유구가 밝혀졌다.

남원읍성은 북문지를 기준으로 동쪽 114m, 서쪽 73m 구간의 북성벽이 발굴 조사되었다. 북성벽은 전체적으로 편축식으로 축조되었으며, 북문지 구간 일부만 협축식으로 축조된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 무너져 1∼2단의 면석과 지대석만 남아 있다. 북성벽의 기저부는 너비 360∼380cm 정도의 기반층을 정리한 후 20cm 내외의 할석(割石)을 5단 내외로 깔고 그 위에 지대석을 놓은 형태로 만들었다. 이처럼 잡석을 높게 깐 이유는 성을 평지에 만들었기 때문에 성벽의 기초를 튼튼하게 세우기 위해서였다. 지대석으로는 길이 100cm, 너비 60cm, 높이 25∼30cm 내외의 장방형(長方形) 석재를 사용하였으며, 지대석 바깥쪽 끝에 1∼2열 정도 잇대어 박석(薄石)을 깔았다. 체성(体城)은 지대석의 끝에서 약 20cm 정도 안쪽으로 체성의 첫 단을 놓았으며, 면석은 너비 80∼110cm, 높이 60∼80cm의 대형석을 사용했다.

북문지는 북성벽 전체 구간에서 동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북문은 체성과 나란히 있는 직선형 성문이다. 북문 문지 안쪽에 정면 3칸, 측면 2칸짜리 문루의 초석이 발견되어 북문은 문루를 갖춘 개거식 성문으로 밝혀졌다. 문지 내에서 길이 11.5m, 너비 3.5m 정도의 보도 시설도 확인되었다.

치성은 북문지에서 동쪽으로 13m 떨어진 곳에 있다. 치성의 규모는 길이 9.2m, 너비 5.8m 정도이고 장방형 형태이다. 치성의 축성 기법은 체성의 축성 기법과 같다.

양마장은 북성벽에서 북쪽으로 7∼8m 떨어진 곳에 있는데, 체성과 나란히 동-서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다. 양마장의 상단부는 파괴되어 없어졌고, 편평한 천석과 할석을 사용한 너비 80cm 내외의 기저부 일부만 남아 있다. 양마장의 이 기저부는 남원읍성 담장의 기저부와 비슷하다. 양마장에서 북쪽으로 2.5∼3m 정도 떨어져 있는 해자는 북성벽의 진행 방향과 일치하는 동-서 방향으로 나 있다. 해자의 너비는 4∼5m, 현재 깊이는 1.3m 정도이다. 해자의 외측과 내측은 석축이며, 외측은 하단에 장대석(長臺石) 또는 대형의 석재를 놓고 그 위에 천석으로 쌓았다.

남원읍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 기와, 자기, 금속류 등 다양하다. 자기류로는 분청사기와 백자가 많이 출토되었다. 한편 양마장에서 유통식(有筒式) 화기인 총통(銃筒) 1점은 완형으로 출토되었다.

의의

남원읍성은 평지성으로, 4벽의 중간에 문이 개설되었으며, 내부는 바둑판 모양으로 가로(街路)를 구성하였다. 남원읍성의 성벽은 얇은 지대석을 놓고 대형의 석재를 20cm 정도 들여쌓기를 한 조선시대의 성곽 축성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하동읍성에서만 볼 수 있는 양마장 시설을 이곳에서도 볼 수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남원읍성에는 양마장 시설이 성벽과 나란히 축조되어 있고, 양마장 밖으로 너비 4∼5m의 해자 시설이 정연하게 축조되어 있어 조선시대 성곽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
『성종실록』
『선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눌재집(訥齋集)』
『서애집(西厓集)』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성호사설(星湖僿說)』
『순암집(順菴集)』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만기요람(萬機要覽)』
『담헌서(湛軒書)』

단행본

조선문화유산연구원, 『남원읍성–북문지 및 북성벽-』(문화재청‧남원시‧조선문화유산연구원, 2022)
전북문화재연구원, 『남원읍성Ⅱ-해자‧양마장-』(남원시, 2020)
전북문화재연구원, 『남원읍성Ⅰ-양마장』(남원시, 2018)
전라문화유산연구원, 『南原 鄕校洞 南原邑城 北城壁』(2016)
남원시·군산대학교박물관, 『남원성 북벽 일대 시(발)굴조사 보고서』(2010)

논문

양선아, 「남원의 토지이용 및 가로변천 연구-조선후기 남원읍성을 기준으로-」(전북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오준영·김영모, 「조선시대 남원읍성의 축성 변천에 관한 연구」(『문화재』 46-4, 2013)
관련 미디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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