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

도덕경
도덕경
도교
문헌
중국 도가철학의 시조인 노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도가서.
내용 요약

『도덕경』은 중국 도가철학의 시조인 노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도가서이다. 『노자』 또는 『노자도덕경』이라고도 한다. 총 81장이며, 상편 37장의 내용을 「도경」, 하편 44장의 내용을 「덕경」이라고 한다. 노자가 지었다고 하나 한 사람이 쓴 것이라고는 볼 수 없고, 오랜 과정을 거쳐 기원전 4세기경에 지금과 같은 형태로 고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덕경』의 사상은 한마디로 무위자연의 사상으로, 모든 거짓됨과 인위적인 것에서 벗어나 자연에 합일하려는 사상이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전해졌고 도교신앙과 접합되면서 민중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혀 남아 있다.

목차
정의
중국 도가철학의 시조인 노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도가서.
서지사항

『노자』 또는 『노자도덕경』이라고도 한다. 약 5,000자, 81장으로 되어 있으며, 상편 37장의 내용을 「도경(道經)」, 하편 44장의 내용을 「덕경(德經)」이라고 한다. 주10가 지었다고 하나 한 사람이 쓴 것이라고는 볼 수 없고, 여러 차례에 걸쳐 편집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 기간 동안 많은 변형 과정을 거쳐 기원전 4세기경 지금과 같은 형태로 고정되었다고 여겨진다.

여러 가지 판본이 전해 오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한(漢)나라 주1 때 하상공(河上公)이 주석한 것으로 알려진 하상공본과, 위(魏)나라 주2이 주석하였다는 왕필본의 두 가지가 있다. 그리고 전문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둔황(敦煌)에서 발견된 당사본(唐寫本)과 육조인사본(六朝人寫本)이 있고, 여러 곳에 도덕경비(道德經碑)가 아직도 흩어져 있어 노자의 경문을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근년에 주12 주3의 한묘(漢墓)에서 출토된 백서노자(帛書老子)와 색담사본도덕경(索紞寫本道德經)은 『도덕경』의 옛 형태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원래 『도덕경』은 상 · 하로만 나누어졌을 뿐이지만, 주11이 성행한 한대(漢代)에 들어와서 장 · 절로 나누어졌다고 보인다.

개설

『도덕경』의 구성 체재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학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하였고, 성립 연대 및 실질 저자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았는데, 한 사람이 한꺼번에 저술하였다는 관점과 도가학파의 손에 의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당시의 여러 사상을 융합시켜 만들어진 것이라는 관점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한 사람의 전작물임을 주장하는 관점은 노자를 주4와 같은 시대의 실존인물로 보아 『도덕경』을 그의 작품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부정하는 관점은 노자가 가공인물이라는 점과, 또한 비록 실존인물이라 하여도 『도덕경』과는 상관이 없다는 관점에서 현존하는 『도덕경』은 여러 사람에 의하여 오랜 기간 동안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경』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많은 문제점과 상반된 처지에도 불구하고, 『도덕경』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기본 사상이 변함없이 계속해서 일관성을 유지해 오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도덕경』의 사상은 한마디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위는 ‘도는 언제나 무위이지만 하지 않는 일이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의 무위이고, 자연은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天法道道法自然).’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국 『도덕경』의 사상은 모든 거짓됨과 인위적인 것에서 벗어나려는 사상이다. 좋다 · 나쁘다, 크다 · 작다, 높다 · 낮다 등의 판단들은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비교하여 만들어낸 상대적 개념이며, 이런 개념들로는 도(道)를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언어라는 것은 상대적 개념들의 집합체이므로 『도덕경』에서는 언어에 대한 부정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 점에서 유가사상과 현격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유가사상에서는 인위적 설정이 강조되는 예학(禮學)이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으며 언어에 의한 규정이 강력하게 요청되기 때문이다. 반면, 『도덕경』에서는 규정성의 파기와 언어에 대한 부정을 강조하는데, 유가사상이 중국 북방의 황하유역에서 형성된 것인 반면, 이런 무위자연의 사상은 중국 남방의 양쯔강유역에서 형성되었다는 기질적인 차이로 설명되기도 한다. 즉, 북방은 생존조건이 열악하기 때문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현실적이고 투쟁적이어야 하지만, 남방은 날씨가 온화하고 자연 조건이 순조로워 평화적이고 낭만적이었는데, 이런 분위기의 차이가 사상 형성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유가사상이 인(仁) · 의(義) · 예(禮) · 지(智)의 덕목을 설정하여 주6를 강조하면서 현실적인 상쟁대립이 전제된 반면, 『도덕경』의 사상은 상쟁의 대립이 인위적인 것으로 말미암아 생긴다고 보고, 무(無)와 자연의 불상쟁(不相爭) 논리를 펴나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도덕경』의 사상은 학문적인 진리 탐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위 · 진 주7처럼 사회가 혼란과 역경에 빠져 있을 때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지혜를 밝혀 주는 수양서로서도 받아들여졌으며, 민간신앙과 융합되면서 피지배계급에게 호소력을 지닌 사상 및 세계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우리 나라 자료에는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2 근구수왕 즉위년조에 근구수왕이 태자로 있을 때 침입해 온 고구려군을 패퇴시키고 계속 추격하려 하는 순간, 휘하의 장수 막고해(莫古解)가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듣기로는 도가의 말에, 족함을 알면 치욕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제 얻은 것이 많은데 더 욕심을 내어서 무엇합니까?” 이 말을 듣고 추격이 중지되었다고 하는데, 이 구절은 『도덕경』 제44장에 나오는 말이다.

『도덕경』의 구절이 장수의 입에까지 오를 정도였다면 당시 사회에서는 상당히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졌던 것임에 틀림이 없고, 나중의 일이지만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도 비슷한 내용의 시를 수나라 장수에게 보낸 것이 『삼국사기』에 나타나 있다. 『삼국유사』 보장봉로조(寶藏奉老條)에는 당나라 고조(高祖)가 고구려인의 주8 신봉 이야기를 듣고 624년 천존상과 함께 도사를 보내어 『도덕경』을 강론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듬해 영류왕은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불(佛) · 노(老)를 배우고자 하였고, 고조는 이를 허락하였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보장왕연개소문(淵蓋蘇文)의 건의에 따라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도교를 배우도록 하였는데, 당나라 주9이 도사 8명과 『도덕경』을 보내 주자 왕은 기뻐하며 승사(僧寺)를 지어 도사를 거처하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신라에서는 575년 화랑도를 만들고 그 정신을 현묘지도(玄妙之道)라 칭하였는데, ‘현묘’라는 말은 『도덕경』 제1장에 나오는 ‘현지우현 중묘지문(玄之又玄衆妙之門)’을 연상시키는 용어로 도가의 영향을 받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한 상황에서 도술연구에 골몰하였던 김가기(金可紀)에 대해서는 홍만종(洪萬宗)『해동이적(海東異蹟)』에 나타나 있는데, 그는 『도덕경』을 비롯하여 여러 선경(仙經)을 계속해서 낭송하고 수련을 계속한 끝에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고려 때는 왕 중에서도 도교신앙이 제일 돈독하고 재위 당시 도교가 융성하였던 예종청연각(淸燕閣)에서 한안인(韓安仁)에게 명하여 『도덕경』을 강론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유교경전과 대등하게 다루어서 강론시켰을 정도이므로, 당시 『도덕경』을 연구하던 사람의 숫자도 많았고 수준도 높았으리라 짐작된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엄격한 주자학적 사상(朱子學的思想)과 그 배타적 성격 때문에 『도덕경』에 대한 연구가 위축되었지만, 유학자들 가운데서 주석서를 펴내어 끊임없는 관심을 보여 주던 사람들이 있었다. 박세당(朴世堂)은 『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을 저술하였고, 이이(李珥)는 『도덕경』 81장을 40여 장으로 줄여 『순언(醇言)』이라는 주석서를 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도덕경』에 관한 관심은 희박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신 이외는 모든 사상을 이단으로 보는 성리학의 성격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덕경』의 기본 흐름은 일찍부터 도교신앙과 접합되어 오면서 민중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혀 기층의 민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한국의 도교사상』(차주환, 동화출판공사, 1984)
『노자와 도교사상』(김학주, 태양문화사, 1978)
주석
주1

중국 전한의 제5대 황제(B.C.202~B.C.157). 성은 유(劉). 이름은 항(恒).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효문 황제(孝文皇帝). 대왕에 책봉되어 여씨의 난이 평정된 후 황제의 자리에 올라 뒷날 무제(武帝) 때의 전성기를 구축하는 기반을 닦았다. 재위 기간은 기원전 180~기원전 157년이다.    우리말샘

주2

중국 위나라의 학자(226~249). 자는 보사(輔嗣). 위진 시대 노장학(老莊學)의 시조로 불린다. 저서에 ≪노자주(老子注)≫, ≪주역주(周易注)≫가 있다.    우리말샘

주3

중국 둥팅호(洞庭湖) 남쪽 샹장강(湘江江) 하류의 동쪽 기슭에 있는 도시. 수륙 교통의 요충지이며 후난성(湖南省)의 성도(省都)이다. 면적은 178㎢.    우리말샘

주4

중국 춘추 시대의 사상가ㆍ학자(B.C.551~B.C.479).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 노나라 사람으로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인(仁)을 정치와 윤리의 이상으로 하는 도덕주의를 설파하여 덕치 정치를 강조하였다. 만년에는 교육에 전념하여 3,000여 명의 제자를 길러 내고, ≪시경≫과 ≪서경≫ 등의 중국 고전을 정리하였다. 제자들이 엮은 ≪논어≫에 그의 언행과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우리말샘

주5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 또는 그런 이상적인 경지.    우리말샘

주6

예의에 관한 가르침.    우리말샘

주7

중국 역사상 후한(後漢)이 멸망한 해로부터 수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까지의 시대. 220년에서 589년 까지로 삼국 시대, 서진의 통일 시대, 동진ㆍ오호 십육국 시대, 남북조 시대로 세분하기도 한다. 정치ㆍ경제ㆍ사회 분야는 혼란스러웠으나 사상이나 문학을 비롯한 예술 분야는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우리말샘

주8

후한 말에 일어났던 도교의 한 일파. 신도가 되려는 사람에게 다섯 말의 쌀을 바치게 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말샘

주9

중국 당나라의 제2대 황제(599~649). 성은 이(李). 이름은 세민(世民). 삼성 육부와 조용조 따위의 제도를 정비하였고, 외정(外征)을 행하여 나라의 기초를 쌓았다. 재위 기간은 626~649년이다.    우리말샘

주10

중국 춘추 시대의 사상가(?~?).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담(耼)ㆍ백양(伯陽). 도가(道家)의 시조로서, 상식적인 인의와 도덕에 구애되지 않고 만물의 근원인 도를 좇아서 살 것을 역설하고, 무위자연을 존중하였다.    우리말샘

주11

글의 장과 구의 풀이에만 치우쳐 전체 대의(大意)에는 통하지 않는 학문이라는 뜻으로, 중국 한(漢)나라의 훈고학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12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남쪽에 접하여 있는 성. 둥팅호(洞庭湖) 남쪽에 있으며 샹장강(湘江江)이 지난다. 쌀ㆍ보리와 세계적인 안티모니ㆍ납 따위가 나며, 기계ㆍ제련ㆍ화학 따위의 공업이 발달하였다. 성도(省都)는 창사(長沙), 면적은 21만 1800㎢.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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