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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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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촌에서 농민들이 농사일이나 길쌈 등을 협력하여 함께 하기 위해 마을 단위로 만든 공동노동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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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심기 / 두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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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촌에서 농민들이 농사일이나 길쌈 등을 협력하여 함께 하기 위해 마을 단위로 만든 공동노동조직.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남자들의 일은 주로 모내기·김매기 때와 같이 단기간 내에 대규모의 노동력을 집약적으로 투입해야 할 때 관행되어 왔다. 두레는 지역에 따라 구성이나 기능이 다르기 때문에 명칭도 다양하여 ‘농사(農社)’·‘농계(農契)’·‘농청(農廳)’·‘농악(農樂)’·‘농기(農旗)’·‘목청(牧廳)’·‘갹사(醵社)’·‘동네논매기’·‘길쌈’·‘돌개기음’ 등으로 불렸다. 또, 두레는 공동노동조직이기도 하면서 줄다리기·홰싸움·편싸움 등의 오락에서도 큰 몫을 하였다.
    두레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고대 씨족공동사회에서 찾는 견해가 많다. 삼한시대에 농사의 시작과 끝에 행하던 음주가무가 두레라는 주장이 있다.
    또한, 두레는 지역공동체의 호칭이었다가 차츰 인위적 공동체로 변하여, 근로단체·군사단체·도의단체·공제단체·신앙단체·경기단체 등의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토지소유 형태면에서는 토지가 촌락공동체, 즉 두레에 속했으므로 공동경작·공동분배를 했을 것이고, 따라서 전체 주민의 공동노동조직도 두레로 불리게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고대 농촌공동체의 경우 인간상호간의 관계는 물론, 집단과 생산수단의 관계도 견고한 결합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토지소유관계의 변화에 따라 점차 약화되었지만 토지의 사적 소유가 확립될 때까지는 남아 있었다. 따라서 공동노동조직으로서의 두레는 공동체적 유제(共同體的遺制)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집단성과 강제성을 짙게 지닐 수 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두레의 기원은 어디까지나 추정에 지나지 않으며, 19세기 말까지의 두레에 관한 기록은 지극히 엉성하기 때문에 그 존재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구체적인 모습은 밝힐 수 없다. 그러므로 20세기 전반 이후에 조사된 자료에 입각하여 두레의 조직·성격·기능 등을 살필 수 밖에 없다.
    두레의 종류는 다양하다. 성별에 따라 남자두레와 여자두레로 나눌 수 있고, 발생의 선후와 세력의 우열에 따라 선생두레와 제자두레, 또는 형두레와 아우두레가 있으며, 세대별로는 청년두레·장년두레·노인두레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농악의 유무에 따라 농악 있는 두레와 농악 없는 두레가 있었다. 특히 제자두레나 아우두레는 선생두레와 형두레에 대해서 존경과 복종을 표시해야 했다.
    또한 두레는 크기에 따라 작은 두레와 큰 두레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6∼10명 정도로 대개 경제적 지위와 농지 소유 규모가 비슷한 이웃 사람끼리 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 전통적인 두레가 축소, 변형된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한 마을의 경지 분포상 큰 두레를 만들 수 없는 경우에는 몇 개의 작은 두레를 만드는 예는 있다.
    전통적인 공동노동조직으로는 두레 외에도 ‘품앗이’가 있으나, 품앗이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의사에 따라 이루어지는 소규모의 노동력 상호교환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반하여 두레에는 한 마을의 성년남자 전원이 거의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했다. 두레에 가입하려는 남자는 자기의 힘을 마을사람들에게 시험해 보여서 그들의 찬동을 얻어야 했다.
    이러한 신참례(新參禮)는 지방에 따라 진새·팔례·공배·주먹다드미·들창례·바구리·나다리 등으로 불렸는데, 여기에서 고대부터 있어 온 성년식의 유풍을 찾을 수도 있다.
    두레의 임원구성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전체 통솔자인 행수(行首) 또는 황수(皇首)라고도 하는 지휘자 1명, 행수의 보좌인 도감(都監) 1명, 작업의 진행을 지휘하는 수총각(首總角) 1명, 규약에 따라 두레꾼의 행동을 감시하는 조사총각(調査總角) 1명, 기록과 회계를 맡은 유사서기(有司書記) 1명, 방목지(放牧地)의 가축을 돌보며 가축으로부터 논밭을 보호하는 방목감(放牧監) 1명으로 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행수와 도감은 그 지휘자적 지위로 인하여 자작 농가 가운데에서 덕망과 능력이 있는 사람을 선출하며, 그 밖의 임원은 소작농이나 머슴 가운데에서 선출한다. 임원의 임기는 1년이지만 별 사고가 없으면 중임하게 된다.
    그런데 두레의 조직과 임원이 동계(洞契)와 중복되는 예가 있는 것으로 보아, 범공동체적 조직인 동계가 행정·사법의 기능 외에 노동조직적인 기능도 수행했다고 생각된다.
    두레에 의한 공동노동은 모내기·물대기·김매기·벼베기·타작 등 경작 전 과정에 걸친 것이고, 특히 일시적으로 많은 품이 요구되는 모내기와 김매기에는 거의 반드시 두레가 동원되었다.
    1970년대 중반 강원도 횡성군에서 조사된 두레는 그 조직이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온전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모내기를 1주일 정도 앞두고 두레를 짜게 된다. 그것을 ‘못날 받으러 간다’고 하며, ‘모공론’·‘질공론’·‘일공론’이라고도 하였다.
    그 날 행수 격인 영좌(領座)는 일할 사람과 못날의 순번을 정해 준다. 그 순번은 농토의 많고 적음도 고려되지만, 겨릿소(소 두 마리가 끄는 쟁기인 겨리를 끄는 소)가 나오는 집이라든지 쟁기질 등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의 집에 못날을 먼저 준다.
    모내기는 새벽 4시 무렵 모찌기부터 시작된다. 두레꾼들이 모이면 주인은 해장술을 권한다. 해가 뜰 때쯤 각자의 집에 돌아가 아침을 먹고 다시 나온다. 한두 시간 일하다 ‘단오리’를 부르면 주인은 참을 내온다.
    아침 ‘제누리’로 술과 국수, 또는 감잣국이 나온다. 점심은 주인집에서 마련하고, 하루에 모를 심는 집이 여러 집이면 제일 많이 심는 집에서 낸다. 주인집의 집안이나 이웃 아낙네들은 하루 종일 부엌일을 도와 준다.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잔 뒤 깸술을 먹고 논으로 나간다. 조금 있다 다시 새참으로 술을 마시고, 오후 4∼5시경에 ‘제누리’를 먹는다. 저녁은 힘든 일을 한 ‘쉰일꾼’만 주인집에서 먹는다. 그러나 타작할 때는 양식이 넉넉하므로 모든 사람이 주인집에서 저녁을 먹는다.
    두레는 엄격한 규율 아래 작업이 진행되던 것이 두레의 특성 가운데 하나였다. 작업에 앞서 숫총각이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썼거나 용을 그린 농기를 논두렁에 세우고 난 뒤, 나팔을 신호로 작업을 시작하였다. 작업과정 뿐만 아니라 휴식에서도 일사불란한 단체행동을 취해야 했다.
    심지어 식사를 끝마쳤다고 해서 타인의 식사중에 먼저 눕는다거나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되었다. 작업시간은 행수가 정하는데, 시계가 없을 때는 구멍 뚫린 초롱에 물을 채워 그것이 다 없어지는 것으로 기준을 삼았다.
    두레의 운영과 기능에서 또 한 가지 불가결한 요소는 공동회연(共同會宴)이다. 공동회연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은 풋굿·호미씻이[洗鋤宴]였다. 대체로 김매기를 마친 뒤 공동작업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모여, 음식과 술을 먹고 농악에 맞추어 여러 가지 연희를 곁들여 뛰고 놀면서 1년의 노고를 잊고 결속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그 날을 ‘머슴의 생일’ 또는 ‘머슴날’이라고 하여 주인집에서 음식을 장만해 주기도 하였다.
    두레와 떼어 놓을 수 없는 가운데 농악이 있다. 농악 있는 두레는 작업을 하러 갈 때 농기를 앞세우고 장구·꽹과리·북을 풍물재비들이 치며 간다. 김맬 때는 장구재비 혼자만 소리를 하면서 풍물을 잡는다.
    농악의 연주와 무악의 형식 중에서 농기롱은 논농사의 노동과정을 흉내내며 삼베길쌈하기는 여장을 한 무동들이 부녀자의 공동마적(共同麻績)을 흉내낸다. 농악의 ‘선왕굿’은 서낭제의식[城隍祭儀式]을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제의(祭儀)와 노동의 관계를 보여주는 예이다. 농악은 노동의 고통을 경감시켜 더욱 힘을 내게 하고, 협동심을 북돋우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두레의 변형과 소멸은 불균등한 토지소유의 확대과정에서 비롯되었다. 경지는 개발 경영자의 이해에 의해 경영되고 있는 데 반하여, 두레의 공동작업은 마을의 전체 경지를 하나의 공동경영지로 간주하는 본질적인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논농사의 특수성과 농업생산력의 미발달 등 현실적인 여건은 이와 같은 공동노동조직을 존속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경지면적의 차이가 심해지자 두레의 운영과 성격도 변하게 되었다. 특히 두레의 능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유지 내지는 제고시킬 공동체의 강제력도 약화되었다. 따라서 공동노동의 결과는 각 농가에게 합리적으로 분배되는 방향으로 해결을 보게 되었다.
    즉, 각 농가의 경지면적과 가족 노동력의 크기가 정확히 계산되어, 자기 경지에 투하된 노동량 이상을 두레에 제공한 자는 그만큼의 대가를 보상받았으며, 그 이하를 투하한 농가는 그에 상당하는 노임을 지불하게 되었다. 그것을 ‘심본다’, ‘모간조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공동체적 유제와 현실적 요청과의 절충적인 타협은 상품 화폐경제가 발달하던 조선 후기에 비롯된 것이라고 추측된다. 1940년대까지도 두레는 각지에서 이따금 행해지고 있었으나, 품앗이·고지제도(雇只制度)와 각종 형태의 임금노동이 성행한 것으로 보아, 그 때 두레는 변형, 소멸하던 과정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두레는 20세기 후반에는 거의 소멸하거나 변형을 면하지 못하였다. 예를 들어, 마을사람들이 대토지 경영자의 경지를 일제히 경작해 주고 임금을 받지만, 임원이나 농악이 따르지 않던 전라남도 보성지방의 ‘모듬차레’는 두레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임금을 개인에게 지급하지 않고 모두 공동기금으로 적립하던 좀더 고풍적(古風的)인 두레도 여전히 존속하였다. 그러나 영세농이 두레에 참가하여 고용 또는 피고용의 형태가 아닌, 다른 형태의 노임을 얻는 경향이 더욱 현저해졌다.
    오늘날에는 원형적인 두레는 없어지고 변형적인 형태로 부분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두레라는 명칭으로 공동노동을 하더라도 아무런 강제성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니며, 마을 주민 전체가 참여하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두레의 소멸은 토지사유화의 발달과 화폐경제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사회의 발전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한국의 두레  (주강현, 집문당, 1997)

    • 『한국민속대관』 Ⅰ(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편,1980)

    • 한국의 촌락  (문병집, 진명문화사, 1973)

    • 「17·18세기 향도조직의 분화와 두레 발생」(이태진,『진단학보』 67,1989)

    • 「두레공동체와 농민문화」(신용하,『현대자본주의와 공동체이론』,한길사,1987)

    • 「두레공동체와 농악의 사회사」(신용하,『한국사회연구』 2,한길사,1984)

    • 「한국부락관습사」(김택규,『한국문화사대계』 Ⅳ,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1969)

    • 「두레와 그 어원에 대한 재고찰」(이병도,『이병기박사송수논문집』,1966)

    • 「조선각도풍속개관 Ⅱ」(송석하,『신동아』 51,1936)

    • 朝鮮農村社會の硏究  (鈴木榮太郞, 未來社, 1973)

    • 韓國土地農産調査報告  (日本農商務省 編, 1906)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김택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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