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욱 ()

백성욱
백성욱
불교
인물
해방 이후 동국학원 이사장, 고려대장경보존동지회 회장 등을 역임한 승려.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7년
사망 연도
1981년
출생지
서울 연지동
정의
해방 이후 동국학원 이사장, 고려대장경보존동지회 회장 등을 역임한 승려.
개설

서울 연지동에서 윤기(潤基)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1년곤동학교(壼洞學校)에 입학하였고, 1904년 서숙(書塾)에 들어가 한문을 수학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0년 봉국사(奉國寺)에서 최하옹(崔荷翁)을 은사로 하여 득도하였다. 1919년경성불교중앙학림(京城佛敎中央學林)을 졸업하였고, 3·1운동 때에는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0년 프랑스 파리의 보배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독일어 등을 공부한 뒤, 1922년 독일의 벌츠불룩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고희랍어와 독일신화사(獨逸神話史) 및 문명사와 천주교의식 등을 연구하였다.

1925년 벌츠불룩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귀국, 불교지 등에 많은 논문을 발표하다가 1928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 또한 이 때에 금강산안양암(安養庵)에서 단신수도에 들어가 ≪대방광불화엄경 大方廣佛華嚴經≫을 제창하면서 많은 논문을 남겼다.

1930년 많은 사람들과 함께 금강산지장암(地藏庵)으로 옮겨 회중수도(會衆修道)를 8년간 계속하였으나 1938년 일본경찰의 압력으로 그만두었다. 1939년부터 서울 돈암동 자택에서 좌선수도하다가 1945년 광복과 동시에 애국단체인 중앙공작대(中央工作隊)를 지도하여 민중계몽운동을 하였으며, 또 군정을 종식하고 이승만에게 정권을 양도하라는 연판장을 만들어 재동경점령군사령관 및 재한미군사령관에게 보내었다.

1946년부터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건국운동에 참여하였고, 1950년 건국운동에 참여한 공로로 내무부장관에 임명되었으나 뜻과 같지 않음을 개탄하여 5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1951년 한국광업진흥주식회사 사장으로 취임하였고, 1952년에는 부통령에 입후보하기도 하였다.

1953년 8월 동국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였고, 1954년 5월 동국학원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55년 대광유지(大光油脂) 사장에 취임한 뒤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금강삼매경론 金剛三昧經論≫·≪보장론 寶藏論≫·≪화엄경 華嚴經≫ 등을 차례로 강의하였다.

그 뒤에도 광업진흥주식회사 사장, 경기학원 이사장, 고려대장경보존동지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불교의 전포 및 학교의 발전에 기여하다가 태어난 날인 8월 19일에 입적하였다.

다비하여 경기도 양주군대승사(大乘寺)에 사리탑과 비를 건립하였다. 조명기(趙明基)·김갑수(金甲洙)·박동기(朴東璂) 등 전국으로 흩어진 700여 명의 제자들이 금강경독송회(金剛經讀誦會)를 조직하여 그의 유지를 이었다.

참고문헌

『불교학 논문집』-백성욱박사송수기념논총(白性郁博士頌壽記念論叢)-(백성욱박사송수기념사업회, 1959)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김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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