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과 자·호를 비롯하여 출신배경 등이 알려져 있지 않다. 벼슬은 종6품 봉의랑(奉議郎)·국자감승(國子監丞)을 지냈으며, 1026년(현종 17)에 왕명으로 창건된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의 개창비문(開創碑文)을 썼다.
이 비의 글씨에 대하여 이조묵(李祖默)과 오경석(吳慶錫)은 당나라 구양순(歐陽詢)의 해서체와 비슷하고, 서법이 매우 힘차서 대각국사비와 비견되는 의의를 지닌다고 평한 바 있다. 현재 전하는 유작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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