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은 집현전에 2인, 홍문관에 1인이었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을 설치할 때, 처음 2인을 두었다가 1456년(세조 2) 사육신사건으로 집현전과 함께 혁파되었다.
1470년(성종 1) 두었는데, 1478년 예문관에서 홍문관이 분리 독립할 때 그대로 직제화되었다. 홍문관은 집현전을 계승한 조선시대 최고의 학문 · 문필기관이었다. 관원들은 영예로운 청요직(淸要職)으로 간주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부제학은 가장 핵심적인 자리였다.
홍문관에는 정1품인 영사(領事), 정2품인 대제학, 종2품인 제학 등의 고위직이 있었다. 그러나 모두 다른 관원들이 겸하는 명예직이었고 실제 책임자는 부제학이었다. 따라서 보통 부제학을 홍문관의 장관으로 불렀다.
부제학은 홍문관의 업무를 총괄하는 외에도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 · 지제교(知製敎)를 당연직으로 겸해 국왕의 학문연찬과 역사편찬, 교서제찬에 참여하였다. 또 삼사(三司) 장관의 일원으로서 언론 활동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부제학과 전한(典翰)도 타관직에서 겸직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는 실상 부제학의 겸직영역을 확대한 조처였다. 홍문관 부제학은 조선 문치주의 양반 관료 체제에서 핵심적인 관직의 하나로 당대의 가장 명망있는 문신학자들이 임명되었고, 유신(儒臣)으로 호칭되는 등 특별한 존중을 받았다.
이 자리는 또한 의정 · 판서로 승진하는 첩경이 되었으므로 조선시대의 저명한 고관 문신들이 대부분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즉, 조광조(趙光祖) · 이황(李滉) · 이이(李珥) · 정경세(鄭經世) · 이경석(李景奭) · 김수항(金壽恒) · 조상치(曺尙治) 등이 모두 부제학 출신이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부학사(副學士)로, 다음해 다시 부시강(副侍講)으로 바뀌었다가, 1897년 대한제국의 성립과 함께 부학사로 이름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