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31본산 중 하나로 황해도 9개 군의 절을 관장하였던 사찰이었다. 신라 말기에 도선(道詵)이 창건하였고, 1327년(충숙왕 14)에 응진전을 지었으며, 1374년(공민왕 23)에 나옹(懶翁)이 중창하였다. 나옹은 건물의 중창뿐 아니라 다수의 석물을 새로 조성하였는데, 성불사를 비롯한 산내암자에 15기의 석탑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대규모의 중창 기록은 없으며, 1569년(선조 2) 설숭(雪崇)이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진되었다. 1632년(인조 10)에 외적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정방산에 성을 쌓은 이후부터 이 절은 해서지방의 종찰이 되었다.
1650년(효종 1) 언택(彦澤)이 중건하였고, 1684년(숙종 10)에 도행(道行)이 장육탱화를 모시고 400근 짜리 대종을 조성하였으며, 1709년(숙종 35)에 명부전을 지었고, 1751년(영조 27)에는 찬훈(贊訓)이 중수하였다. 1924년에는 주지 이보담(李寶潭)이 3차 중수하였는데, 그 때 명부전·향로전·청풍루·극락전·응진전(應眞殿)·승방(僧房) 등을 수리하였다.
성불사의 본사와 말사에는 휴정(休靜)의 법손이 주지가 되게끔 지정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산내말사인 안국사(安國寺)·원통사(圓通寺)·상원암(上院庵)을 비롯하여 산외말사로서 황주군의 10개 사찰, 봉산군의 5개 사찰, 서흥군의 2개 사찰, 수안군의 4개 사찰, 곡산군의 6개 사찰, 평산군의 3개 사찰, 연백군의 1개 사찰, 금천군의 1개 사찰, 신계군의 1개 사찰 등 총 36개소의 말사를 관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