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홍조(弘祖). 참찬 안성(安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섬시령(司贍寺令) 안철산(安鐵山)이고, 아버지는 현감 안극변(安克辨)이다. 어머니는 사성 김최(金最)의 딸이다.
1474년(성종 5) 생원·진사시에 잇달아 합격하고, 147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478년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어서 기사관이 되어 한명회(韓明澮)가 남효온(南孝溫) 등 재야사림을 비방 탄핵하려 하자 이를 변호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전경(典經)이 되어 수렵의 폐단과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였다. 1482년 검토관(檢討官)으로 경연에 참여하면서 내수사 장리(長利)의 혁파를 건의하였다.
이듬해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가 되어 왕명을 받고 궐군(闕軍)을 적발하였고, 곧 이어 전주에 내려가서 수령의 불법행위와 교육 현황을 조사, 감독하고 왔다. 1484년 지평(持平)이 되어서는 안주판관 이빈(李濱)의 비행을 고발하여 처벌하였고, 충청도관찰사 이공(李拱)이 무능하다고 탄핵, 체직시켰다.
그 뒤 장령(掌令)이 되어 언론의 창달과 기강확립에 힘쓴 뒤 1494년 회령통판이 되어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1499년(연산군 5) 전라북도수군절도사가 되었으나, 때마침 침입해온 왜구를 막지 못하였다고 하여 파직되었다. 그 뒤 곧 복직되어 1502년 사간원대사간을 지냈다.
이듬해 형조참의가 되었으며 청백리로 이름났다. 중종반정 이후 한성부우윤을 지내고 1507년(중종 2) 대사헌에 이르렀다. 그 뒤 함경북도절도사·한성부좌윤을 역임하고 1512년 형조참판이 되었으나, 아들 안자문(安子文)의 부정행위로 인하여 파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