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황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아버지와 함께 의병으로 활동하였으며, 가산을 처분하여 의주행재소에 화살을 헌납한 의병.
이칭
학기(學器)
진우재(眞愚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75년(선조 8)
사망 연도
1597년(선조 30)
본관
남원(南原)
주요 관직
의병
관련 사건
임진왜란
정의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아버지와 함께 의병으로 활동하였으며, 가산을 처분하여 의주행재소에 화살을 헌납한 의병.
개설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학기(學器), 호는 진우재(眞愚齋). 동지중추부사 양관(梁灌)의 고손으로, 증조는 첨정 양응곤(梁應鵾)이고, 할아버지는 이조참판 양희(梁喜)이며, 아버지는 양홍주(梁弘澍)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용모가 준수하고 풍채가 늠름하였다. 어려서부터 문장력이 뛰어났으며 성혼(成渾)에게 수학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양홍주는 의병을 일으켜 때마침 경상도에서 의병대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정인홍(鄭仁弘)에게 합세하려고 하였다. 그 때 18살의 어린 나이로 아버지를 설득하여 김성일(金誠一)의 휘하로 달려가서 크게 용맹을 떨치다가, 다시 가재를 정리하여 많은 화살을 준비한 뒤 해로(海路)로 의주의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거동하며 임시로 쓰는 처소)에 이르러 헌납하였다.

그 때 마침 명장 이여송(李如松)이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오니, 행재소의 문무백관들이 모두 나아가 환영하였다. 이 때 많은 문무백관들 앞에서 양황이 이여송을 환영하는 시를 낭독하자, 그 유려한 문장력에 모두 놀랐다. 난이 끝나자 다시 파산(坡山)에 있는 정사(精舍)로 돌아가 수학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송자대전(宋子大全)』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집필자
이재범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