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중부(仲父), 호는 저곡(樗谷). 고려 말기에 문과에 급제, 사헌부규정·전라도안렴사·전법총랑(典法摠郎)·전리총랑(典理摠郎) 등을 역임한 뒤, 공주와 나주의 목사 등을 지냈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양광·경상·전라도의 조전부사(漕轉副使)가 되었다. 이어 판합문사(判閤門事)·승추부우군동지총제(承樞府右軍同知摠制) 등을 역임하였을 때에는 근면하고 치밀한 사람으로 정평이 있었다.
그 뒤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참지의정부사가 되었다. 1400년(정종 2) 병조 전서(典書)가 되고, 1402년(태종 2) 태상왕이 된 태조가 북쪽지방을 순행할 때에 동북면의 도순문찰리사(都巡問察理使)로 배종하였다.
1404년에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들어가서 왕실의 계통이 잘못 전해진 것을 바로잡는 데 힘쓰는 한편, 그때 명나라에 억류되어 있던 우리 동포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데 노력하였다.
명나라에서 돌아와 곧 서북면의 도순문찰리사로 병마도절제사를 겸하였다. 1407년에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를 거쳐, 1412년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 형조 판서,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역임했다.
1413년 지의정부사로서 흠문기거부사(欽問起居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에 곧 사직, 은거하였다. 시호는 정평(靖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