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왕후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 14대 국왕 선조의 왕비.
이칭
시호
장성휘열정헌경목의인왕후(章聖徽烈貞憲敬穆懿仁王后)
인물/전통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555년(명종 10)
사망 연도
1600(선조 33) 6월 27일
본관
반남(潘南)
내용 요약

의인왕후는 조선 전기 14대 국왕 선조의 왕비이다. 본관은 반남박씨이며, 아버지는 반성부원군 박응순, 어머니는 전주이씨 이수갑의 딸이다. 1569년(선조 2) 왕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치렀다. 성품이 후덕하고 인자하였지만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선조와 피란을 동행하지 못하였고, 세자였던 광해군과 함께 난을 피하였다. 1600년(선조 33) 사망하였다.

정의
조선 전기 14대 국왕 선조의 왕비.
가계 및 인적 사항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본관은 반남(潘南), 아버지는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이다. 할아버지는 사간을 지낸 박소(朴紹), 증조할아버지는 이조정랑을 역임한 박조년(朴兆年)이다. 어머니 전주이씨는 이수갑(李壽甲)의 딸이다. 이수갑은 세종과 후궁 신빈김씨(愼嬪金氏)의 소생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의 증손이다. 선조인빈김씨(仁嬪金氏)의 소생 주1의 부마 박미(朴瀰)의 아버지 박동량(朴東亮)이 의인왕후의 사촌 동생이다.

주요 활동

1569년(선조 2) 왕비에 간택되어 가례(嘉禮)를 치렀다. 1572년(선조 5) 주2를 행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양으로 피란하였다. 이후 피란과 한양으로의 환도에 선조와 함께하지 못하였고, 광해군이 의인왕후를 모시고 다녔다.

1593년(선조 26) 선조가 정주(定州)에서 안주목 영유현(永柔縣)으로 이어할 때 세자 광해군과 의인왕후는 정주에 계속 남아 있었다. 관군이 한양을 수복하자 선조는 환도를 결정하고 해주(海州)에 머무른 후 10월 한양에 도착하였다. 의인왕후는 해주에서 묘사(廟社)와 신주(神主)를 모신 광해군과 함께 머무르게 되었다. 1595년(선조 28) 의인왕후의 어머니가 사망하였고, 그해 10월 중전의 환도를 사간원에서 청하여 11월 10일 환궁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수안(遂安)으로 피란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1598년(선조 31) 11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듬해 4월까지 계속 수안에 거처하였으며, 병이 들어 위중하기까지 하였다. 1599년(선조 32) 윤 4월 한양으로 환도하였으나, 1600년(선조 33) 6월 27일 경운궁(慶運宮)에서 승하하였다. 후사를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향년 46세이다.

선조는 의인왕후가 사망한 후 비망기를 내려 그녀의 죽음을 추모하였다. 이를 보면 의인왕후는 궁궐 내에서 내명부의 빈들을 대할 때에도 은애가 넘쳤으며, 후궁들이 낳은 어린 아이들을 곁에 두고 잘 돌봐주었다고 한다. 의인왕후는 성품이 인자하고 유순하여 궁인과 여종들을 너그럽게 대하였으며, 해주에서 피란살이할 때도 굶고 있는 백성들에게 구휼을 할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외척들로 인한 폐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였다. 선조는 이러한 의인왕후가 자녀를 두지 못하였고, 수명이 길지 못했다며 그녀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렇지만 선조와 금슬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의인왕후가 아닌 인빈김씨를 피란 여정에 동행하였으며, 1602년(선조 35) 6월 27일 의인왕후의 대상(大祥)이 끝나자 보름만에 인목왕후와 가례를 치렀던 것에서 알 수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장성휘열정헌경목의인왕후(章聖徽烈貞憲敬穆懿仁王后)이며, 능호는 처음 유릉(裕陵)이었다가 목릉(穆陵)으로 하였고,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다.

참고문헌

원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열성왕비세보(列聖王妃世譜)』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주석
주1

조선 선조의 딸(1590~1660). 인빈(仁嬪) 김씨(金氏)의 소생이며, 금양위(錦陽尉) 박미에게 하가하였다. 아들은 박세교(朴世橋)이다.    우리말샘

주2

양잠을 장려하기 위해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는 궁중 의식.    우리말샘

집필자
임혜련(충남대 강사)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