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경리(景履). 이주원(李胄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희석(李喜錫)이다. 아버지는 이상용(李尙龍)이며, 어머니는 한몽상(韓夢相)의 딸이다.
1740년(영조 16)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1744년(영조 20)에 한림(翰林)의 권점(圈點: 후보자에게 자신이 원하는 인물에게 찍는 둥근 점)을 받은 사람들을 왕이 친림하여, 과차(科次: 과거급제의 성적 순위에 따른 선택)하여 뽑혔다.
1747년(영조 23)에 지평의 관직이 제수된 뒤, 정언에 올랐으나, 1753년(영조 29) 패초(牌招: 왕이 패를 내려 신하를 부름.)를 어긴 죄로 삭직되었다. 이듬해에 다시 장령으로 임용된 뒤, 필선이 되었고, 1755년에는 경기도암행어사가 되었다.
어사에서 돌아와 장령·헌납·집의를 거쳐 1762년(영조 38) 강관이 되었다. 이어 사간에 올랐으나, 조강(朝講)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단천부(端川府)에 유배당했으나, 삭출만 시행되었다.
이듬해 다시 사간에 임명되어 경기고을에 진전(陳田: 경작을 하지 않은 토지)을 다시 측량하여 세금을 고르게 해야 한다고 상소하였으나 시행되지는 않았다. 이어 집의를 거쳐 1768년(영조 44)에는 청송부사(靑松府使)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