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광 ()

지봉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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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인물
조선시대 공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이칭
윤경(潤卿)
지봉(芝峯)
시호
문간(文簡)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63년(명종 18)
사망 연도
1628년(인조 6) 12월
본관
전주(全州)
내용 요약

이수광은 조선시대 공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1563년(명종 18)에 태어나 1628년(인조 6)에 사망했다. 세 차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인조반정 후 고위직을 지내며 시무책 12조를 올렸다. 임진왜란·정묘호란·광해군 재위기의 정치적 갈등 같은 어려운 정국에도 당쟁에 휩쓸리지 않았다. 1614년(광해군 6)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을 편찬하면서 서양문물과 『천주실의』 등 천주교 교리를 처음으로 소개했다. 조선후기 실학파의 선구적 인물로, 사상사·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정의
조선시대 공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 아버지는 병조판서 이희검(李希儉)이며, 어머니는 문화 유씨(文化柳氏)이다.

조선사회가 전기에서 후기로 변화하는 사회적 변동기에 새로운 사상적 전개 방향을 탐색하고 개척한 학자이자, 사회변화와 더불어 발생하게 된 실학파의 선구적 인물로, 사상사 · 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78년(선조 11) 초시에 합격하고, 1582년 진사가 되었다. 1585년(선조 18) 승문원부정자가 되었으며, 1589년 성균관전적을 거쳐 이듬해 호조좌랑 · 병조좌랑을 지냈고,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이 되어 종군하였으나, 아군의 패배 소식을 듣고 의주로 돌아가 북도선유어사(北道宣諭御史)가 되어 함경도 지방의 선무 활동에 공을 세웠다.

1597년 성균관대사성이 되었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명나라 서울에서 중극전(中極殿)과 건극전(建極殿) 등 궁전이 불타게 되자 진위사(陳慰使)로서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때 명나라 서울에서 안남(安南: 베트남)의 사신을 만나 화답하면서 교유했다. 1601년 부제학이 되어 『고경주역(古經周易)』을 교정했고, 이듬 해 『주역언해(周易諺解)』를 교정했으며, 1603년 『사기(史記)』를 교정하였다.

1605년 조정 관료들과 뜻이 맞지 않아 안변부사로 나갔다가 이듬 해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으며, 1607년 겨울 홍주목사로 부임하였다가 1609년(광해군 1) 돌아왔다. 1611년 왕세자의 관복(冠服)을 주청하는 사절의 부사로 다시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때 유구(琉球) 사신과 섬라(暹羅: 타이) 사신을 만나 그들의 풍속을 듣고 기록하였다.

정국이 혼란해지자 1616년 순천부사가 되어 지방관으로 나가 지방행정에 전념하였다. 1619년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수원에 살면서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도승지 겸 홍문관제학으로 임명되고, 대사간 · 이조참판 · 공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625년(인조 3) 대사헌으로서 왕의 구언(求言)에 응해 열 두 조목에 걸친 「조진무실차자(條陳懋實箚子)」를 올려 시무를 논하여 당시 가장 뛰어난 소장(疏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628년 7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그 해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이수광은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중요한 관직을 모두 지냈으며, 세 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올 정도로 관료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였다. 특히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치르고, 광해군 때의 정치적 갈등과 인조 때의 이괄(李适)의 반란을 겪었던 어려운 정국에서도 당쟁에 휩쓸리지 않았다. 언제나 강직하면서도 온화한 입장을 유지하여 그 시대의 성실하고 양식 있는 관료이자 선비로서의 자세를 지켰다.

학문세계와 저서

이수광이 활동했던 17세기 초기는 이미 16세기 후반 이황(李滉)이이(李珥)를 정점으로 하여 성리학의 이론이 성숙되었던 다음 시대로서 김장생(金長生) · 정구(鄭逑) 등에 의해 예학(禮學)이 융성하게 일어났던 시기였다. 한편 비록 도학(道學)의 정통성은 확립되었지만 임진왜란의 충격 속에 사회질서의 변화가 진행되고, 사상적으로도 정통적 도학의 성리학적 관심에서 벗어난 새로운 요구가 대두되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는 한백겸(韓百謙)이 『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에서 실증적 고증을 통해 고대의 전제(田制)에 관한 주자의 견해도 추측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음을 밝혔던 사실이나, 남언경(南彦經) · 이요(李瑤)양명학에 호의를 가지는 태도가 출현했던 사실에서 드러난다.

이때 이수광은 주자학을 존중하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당시 주자학의 기본 문제인 태극 · 이기 · 사단 · 칠정 등의 성리학 이론에 뛰어들지 않고, 심성(心性)의 존양(存養)에 치중하는 수양론을 학문적 중추 문제로 삼은 사상적 특징을 보여주었다. 비록 성리학의 이론적 분석과 논변이 조선 후기를 통해 지속적으로 발전하였지만, 이수광은 이러한 전통적 성리학파의 입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새로운 방향을 탐색하고 있었다.

이수광의 철학적 기본 문제가 심성의 이기론적 개념 분석이 아니라 수양론적 실천 방법의 탐색이라는 것은, 그만큼 이수광의 철학이 관념철학을 벗어나 실천철학적 성격을 지니는 것임을 말해 준다. 이수광이 『지봉유설』 ‘유도부(儒道部)’에서, 학문 · 심학(心學) · 과욕(寡慾) · 초학(初學) · 격언의 5항목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도 주자학에서 존중되는 도체(道體)의 문제나 성리학적 과제를 제쳐두고, 심성의 수양론적 관심 속에서 유학을 분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수광은 「조진무실차자」에서 정치의 효과를 이루지 못하고 사회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모두 부실한 병 때문이라 지적하였다. 또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관건은 성(誠)에 있으며 성이 곧 실(實)임을 밝히고, 실심(實心)으로 실정(實政)을 행하고 실공(實功)으로 실효(實效)를 거둘 것을 주장하면서, 생각마다 모두 실하고 일마다 실할 것을 요구하는 무실(懋實)을 강조하였다. 이수광의 무실론은 구체적 현실의 성이면서 동시에 도덕적 성실성의 요구이며, 성을 모든 것에 일관하는 원리로 삼고, 이 성의 현실적 실현을 추구하는 것은 실학정신의 근원적 사유 방법을 보여준다.

이수광이 학(學)은 활쏘기와 같아서 과녁을 지향하는 것이라 밝히면서, 학문은 입지(立志)와 지향하는 바[所向]가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은 진리의 기준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이수광의 학문적 개방 정신과 더불어 학문의 수양론적 기능에 대한 요구에서, 학문은 습(習)을 귀하게 여기며 습을 통하여 숙(熟)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학습론(學習論)을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함양성찰(涵養省察)하는 수양의 과정이 곧 학습이고, 살아 움직이는 마음의 배양이 곧 성숙인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성격을 통해 이수광의 철학적 특성이 도학의 정통성을 발판으로 하면서도 성리학의 이론적 천착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격의 구체적 실현을 추구하는 실학정신의 발휘를 지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저서로는 『지봉집(芝峯集)』이 있다. 또한 『찬록군서(纂錄群書)』 25권이 있다고는 하나 확실하지 않다.

상훈과 추모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수원의 청수서원(淸水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인조실록(仁祖實錄)』
『지봉집(芝峯集)』
『지봉유설(芝峯類說)』
『지봉의 문학세계』(이가원, 한국학 20집, 한국학연구소, 1979)
「실학의 개척자 지봉 이수광」(유홍렬, 『한국학』 20집, 한국학연구소, 1979)
「지봉과 정치사상」(강주진, 『한국학』 20집, 한국학연구소, 1979)
「지봉의 인간과 학문」(김근수, 『한국학』 20집, 한국학연구소, 1979)
집필자
금장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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