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영 ()

장지영
장지영
언어·문자
인물
해방 이후 『국어입문』, 『옛글』, 『향가』 등을 저술한 국어학자.
이칭
열운(洌雲)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7년(고종 24)
사망 연도
1976년
본관
인동(仁同)
출생지
서울
관련 사건
조선어학회사건
내용 요약

장지영은 해방 이후 『국어입문』, 『옛글』, 『향가』 등을 저술한 국어학자이다. 1887년에 태어나 1976년에 사망하였으며 호는 열운이다. 1908년부터 1911년까지 주시경의 문하에서 국어학을 연구하였다. 1921년 국어·국문의 체계적인 연구를 위하여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26년부터 1931년 사이에는 조선일보에 기자 겸 지방부장·문화부장·편집인으로 근무하면서 문맹 퇴치와 한글 보급 운동을 맹렬히 펴 큰 성과를 올렸다. 해방 이후에도 활발히 활동하면서 학문의 업적과 공로를 인정받아 국어·국문연구발전공로 표창이나 교육공로표창, 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정의
해방 이후 『국어입문』, 『옛글』, 『향가』 등을 저술한 국어학자.
개설

본관은 인동(仁同). 호는 열운(洌雲). 서울 출신.

생애 및 활동사항

1891년부터 가숙(家塾)에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1903년 4월 관립한성외국어학교 한어과(漢語科)에 입학, 1906년 6월에 졸업하고 모교에서 부교관으로 근무하였다.

1908년 7월부터 1911년 6월 사이에 주시경(周時經)의 문하(사저)에서 국어학을 연구, 여기서 나라사랑의 정신과 학문의 기초를 다졌다.

1908년 9월 사립 정리사(精理舍, 數理專門)에 입학, 1911년 3월에 졸업하였다. 그뒤 곧 교육계에 종사하기 시작하여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1911. 7.∼1912. 5.) 교사(국어 · 수학), 서울의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1912. 9.∼1914. 8.) 교사(국어 · 수학) 겸 학감, 경신중학교(儆新中學校) 교사 (국어 · 수학)겸 교무주임을 역임하였다.

1912년경에 유지들과 ‘물산장려회’를 조직하여 무명을 손수 짜서 옷을 지어 입는 운동을 벌였으며, 1913년경에는 독립운동단체의 하나인 청년비밀결사대 ‘흰얼모[白英社]’를 조직하여 국내는 물론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을 통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19년 2월 28일, 그는 그의 동지 조규수 · 김정섭 · 신경우 · 노대규 등과 교남동 자택에 모여 고종황제의 승하 내막을 폭로하여 국민들의 의분을 불러일으키기로 하고, 조선일보 정치부장 조규수가 국민대회 포고문을 지어 시내 곳곳에 붙여 3 · 1운동을 측면에서 도왔다.

또한, 1920년 대동단(大同團) 당수 전협(全協)의 부탁으로 의친왕(義親王)을 상해로 모셔가서 왕정을 세우려는 계획을 온 국민에게 알리기 위한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기도 하였다.

1921년 12월, 휘문의숙(徽文義塾)에서 임경재(任暻宰) · 최두선(崔斗善) · 이규방(李奎昉) · 권덕규(權悳奎) · 이승규(李昇圭) · 신명균(申明均) 등과 더불어 국어 · 국문을 체계 있게 연구하기 위하여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26년 10월부터 1931년 7월 사이에는 조선일보 기자 겸 지방부장 · 문화부장 · 편집인으로 근무하면서 문맹퇴치한글보급운동을 맹렬히 펴 큰 성과를 올렸다.

1927년 1월 신석우(申錫雨) · 조병옥(趙炳玉) · 안재홍(安在鴻) 등과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하고 조사부 간사 일을 보며, 동시에 조선일보에 신간회란을 만들어 각 지방의 활동상황을 소상히 알렸다.

그 뒤 총독부 언문철자법 심의위원(1928. 5.∼1930), 조선어학회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1930. 12.∼1933. 10.), 서울 양정중학교(養正中學校) 교사(국어 · 중국어, 1931. 7.∼1942. 7.), 조선어학회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 위원(1936. 1.∼1937. 8.) 등으로 활약하였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홍원함흥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때 그는 한글동지 30여 명과 함께 홍원경찰서에 갇혀서 모진 고문과 심문을 받고 잡힌 지 1년 만에 함흥형무소로 갔으며, 1944년 10월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함흥에다 거주제한을 당하여 바로 떠나지 못하다가 3년 만에 귀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 경성헌병대에 또 잡혀서 얼마 동안 갇혀 있다가 풀려나왔다. 그뒤 양주땅에서 농사를 짓다가 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 부국장(1945. 10.∼1948. 8.), 조선어학회 제6대이사장(1946. 2.∼1949. 9.), 국립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강사(1946. 10.∼1947. 6.), 세종중등국어교사양성소 소장(1948. 9.∼1951)을 지냈다.

1948년 9월 연희대학교 교수로 부임하고,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대우도 겸하여 근무하였다. 1950년 12월, 6 · 25제주도로 피난하여 제주여자고등학교 · 제주농업고등학교 강사, 제주대학 설립위원, 제주대학 교수, 제주대학 문학과장을 지내다가, 1952년 11월 연희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에 복직하였다.

1956년 10월 이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를 지냈다. 1957년 3월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였고, 1958년 3월 연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다. 1957년 9월 문교부장관으로부터 국어 · 국문연구발전공로 표창을 1958년 서울시교육회장으로부터 교육공로표창을 받았다.

1958년 대통령으로부터 교육공로표창을, 대한교육연합회장으로부터 교육공로표창을 받았고, 1962년 광복절에 대통령으로부터 문화훈장을, 1962년 한글날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부터 한글공로표창을 받았다. 1964년 2월 학문의 업적과 한글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7년 12월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주요저서로는 『조선어전』(중등말본책, 유인본, 1924), 『조선어철자법강좌』(활문사, 1930), 『국어입문』(한글사, 1946), 『옛글』(고등학교 교재, 정음사, 1946), 『향가』(연희대학교 강의안, 유인본, 1955), 『중국어』(고등학교 교재, 김용현과 공저, 정음사, 1957), 『홍길동 · 심청전』(주해서, 정음사, 1964)과 유고를 정리, 간행한 『이두사전』(정음사, 1976) 등이 있다.

참고문헌

『나라 사랑 29-열운 장지영 특집호-』(외솔회,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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