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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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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가 청동기라는 금속재료를 주로 사용하며 문명을 꽃피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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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청동기라는 금속재료를 주로 사용하며 문명을 꽃피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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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라는 용어는 고고학(考古學)에서 인류 역사의 발달과정을 사용한 도구의 재료를 기준으로 나눈 3시대, 즉 석기시대(石器時代), 청동기시대, 철기시대(鐵器時代)의 하나이다. 처음 이 용어를 창안한 사람은 덴마크의 역사학자 베델 시몬센(Vedel Simonsen)으로, 그는 스칸디나비아 고대 주민문화의 역사는 석(石)시대, 동(銅)시대, 철(鐵)시대라는 3시대로 나눌 수 있다고 한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당시는 이 용어가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3년 후인 1816년에 덴마크의 고고학자인 크리스티안 유리겐센 톰센(Christian Jurgensen Thomsen, 1788∼1865)이 국립박물관의 유물을 석기시대실, 청동기시대실, 철기시대실로 나누어 전시하고, 안내서인『북구고대학입문(北歐古代學入門: Ledetraad til Nordisk Oldkyndighed, 1819)』에 기술함으로써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이때의 청동기시대라는 용어는 문자를 사용하기 전의 시대, 즉 선사시대(先史時代)에 적용되는 시대구분이다.
인류는 이미 순동(純銅)을 북이라크에서 서기전 5500∼4500년전 경에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나 순동은 견고하지 못하여 도구로 사용하기에 부적합하였다. 처음에는 순동을 두드려 펴서[打伸] 간단한 핀(pin)이나 저울추(錐) 등을 만들어 사용하다가 광석에서 금속을 추출하는 정련법(精鍊法)과 그 용액을 틀[거푸집: 鎔范]에 부어 만드는 야금술(冶金術)이 우연히 개발되면서부터 구리에 비소(砒素, 3%), 주석(朱錫, 10%), 아연(亞鉛, 4%) 등을 섞어서 합금(合金)하여 견고한 도구용 청동기를 생산하게 되었다. 야금술의 발상지는 동북 이란의 산지(山地)로 추정되고, 그곳으로부터 아시아·유럽·아프리카의 문명지대(文明地帶)로 퍼져나갔다. 주석 합금의 청동기는 이집트에서 서기전 3700년경의 제품이 피라미드 밑에서 나왔고, 인도의 인더스문화(Indus文化)에서는 서기전 2500년전 경에, 그리고 중국에서는 용산(龍山)문화 단계인 서기전 2000년경에 생산되었다. 동광(銅鑛)은 800℃, 동은 1080℃에서 녹는데[融點], 주석을 넣으면 이 융점을 낮추는 역할을 한다. 유명한 중국의『주례(周禮)』고공기(考工記)에는 예기(禮器)와 무기 각각을 만드는데 필요한 합금 비율을 기록해 놓았다.
한반도의 청동기의 제작과 사용 시기에 관한 정확한 자료(유적)가 발견되지 않아서 어디서 언제 시작되었는지, 중원(中原)과 오르도스(Ordos)의 청동기 중 어느 계통에 속하는지에 관하여 아직 명확하게 말할 수 없다.
청동기시대는 청동기가 생산되어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철기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때까지를 가리킨다. 한반도에서 청동기는 생산이 어렵고 양이 적었기 때문에 청동기시대 전 기간 동안 마제석기(磨製石器)를 병용해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철기가 일반화되기 이전인 철기시대 초기에도 청동기를 병용하였다.
그런데 한반도의 경우 청동기시대를 청동단검(靑銅短劍)의 출현시기와 그 이전 시기로 구분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의주 신암리(義州 新岩里) Ⅱ층에서 청동손칼[靑銅小刀]·청동단추[靑銅泡]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 시기를 서기전 1500년∼1000년으로 추정하여 청동기시대의 상한(上限)연대로 보기도 한다. 청동단검의 출현, 즉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주 01)이 출토되는 시기를 서기전 9∼8세기까지 올려보게 되었다. 그 근거는 요서(遼西)지방 남산근(南山根)의 석곽묘(石槨墓)에서 한반도의 비파형동검과 비슷한 형식이 춘추시대(春秋時代) 초기의 청동기[禮器]와 함께 출토된 것을 근거로 한다. 그리고 비파형동검 이후, 즉 변형비파형동검(變形琵琶形銅劍)인 세형동검(細形銅劍)을 한반도에서만 출토된다고 하여 한국식동검(한반도산) 제작시기를 청동기가 발달한 시대로 보려는 견해가 있고(김원용), 또 세형동검은 다수의 철기와 함께 출토되므로 이 시기를 철기시대로 보고 그 이전 비파형동검 시기만을 청동기시대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청동기시대 유물
  1. 1. 청동기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은 비파형동검을 비롯하여 동경(銅鏡)·동부(銅斧)·동탁(銅鐸)·동끌·동화살촉[銅鏃] 등이며, 요동(遼東) 지방과는 달리 각종 차마구(車馬具)와 예기(제기) 등은 한반도에서는 출토되지 않는다. 남아 있는 청동기의 수량은 대단히 적은 편이고, 그것도 일반 주민의 생활도구가 아니고, 상위계층에 속하는 일부 유력자만이 소유한 특수품이거나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적(象徵的) 물품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비파형동검은 요녕식동검(遼寧式銅劍)이라고도 칭한다. 그것은 전에 만주식동검(滿洲式銅劍)이라고 부르던 것을 해방 이후 요녕성(遼寧省) 일대에서 완제품이 다수 출토되어 일본학계에서 요녕식동검이라고 이름붙인 이래 한국학자들도 자주 사용하였다.
    동검의 형상은 상반부가 창의 몸통[槍身]처럼 생기고 하반부는 비파형과 같이 생긴 것이 합쳐진 모습으로, 아래는 짧은 슴베[莖部]가 있어 자루는 청동 등으로 별도로 만들어 끼워 끈으로 매어 고정시키는 것이다. 비파형동검은 몸통은 타원형으로 생긴 현악기 비파(琵琶)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하여 중국학계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최근에는 한반도에서도 다수가 발견되고 있으므로 구태여 일부 지역의 지명인 ‘요녕’을 붙여서 부르는 전자보다 형상화하여 부르는 것이 편리하고 합리적이라고 여겨 비파형동검이란 용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한다. 칼몸과 자루를 별도로 만들어 합쳐서 완성한다는 것은 칼몸과 자루를 동시에 하나로 만드는 중국검[桃氏劍]과 구별한다. 오르도스 동검 중에 사곡검(蛇曲劍)이라고 하는 날이 휘어진 검이 있는데 그것과 유사하다.
    청동단검의 형식에 관하여 윤무병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제Ⅰ류는 비파형동검으로 이 유형은 검신(劍身)의 상반부가 첨예하고 하반부는 광대해져서 마치 나뭇잎 형상(중국 현악기의 비파형)으로 되어 기부(基部)는 곡선을 이루면서 슴베로 이어진다. 등대[脊]에 세운 능각(稜角)주 02)이 상반부에서만 끝난다. 제Ⅱ류는 세형동검으로 등대에 세운 능각이 결입부(抉入部)까지 내려가지 않은 것을 말하고, 검신이 전체적으로 I류보다는 가늘고 Ⅲ류보다는 넓다. 제Ⅲ류도 역시 세형동검으로 등대에 세운 능각이 결입부 아래까지 내려가고, 검신이 가장 가는 것[細身]을 말 한다. 능각은 양쪽 날을 세우기 위하여 갈[硏磨할] 때 생긴 것이다. 제Ⅱ류와 제Ⅲ류는 다시 봉부(鋒部)가 짧은 것을 a식, 봉부가 긴 것을 b식으로 세분 한다. 제Ⅱ류는 제I류, 즉 비파형동검의 전통을 가장 농후하게 지니고 있다. 형식상의 선후관계는 제I류→제Ⅱ류→제Ⅲ류의 순서로 변천하였다. 제I류에 속하는 예는 평안남도 출토 동검(『고적조사보고(古蹟調査報告)』제2책), 평양부근 출토 동검(『조선고문화종람(朝鮮古文化綜鑑)』제1권), 고흥 운대리출토 동검편(銅劍片) 등이 있다. 제Ⅱ류 a식에 속하는 예는 경주 입실리출토 3호·6호 동검, 부여 연화리출토 A호·B호·C호·D호 동검, 제Ⅱ류 b식에는 평양 정백동과 용산리출토 동검 등이 있다. 제Ⅲ류 a식에는 경주 입실리출토 2호·4호 동검, 경주 평리출토 동검, 경주 구정리출토 동검 등이 있다. 제Ⅲ류 b식에는 전강원도출토 동검(『고적조사보고』제2책), 경주 입실리출토 1호 동검, 황주 흑교리출토 동검(『조선고문화종람』제1권) 등이 있다.
    동경은 번개무늬·별무늬 등이 양각된 조문경(粗文鏡)과 세형동검과 함께 출토되는 세문경(細文鏡)의 두 종류가 있다. 조문경은 한 쪽에 치우쳐서 줄을 끼우는 꼭지[鏡鈕]가 돌출되어 있고, 경의 둘레 끝[鏡緣]에는 단면이 반원형으로 된 굵은 돌출 선을 돌리고, 내부는 삼각형의 구역을 2∼3개 짓고 그 안에 굵은 음각선문(陰刻線文)을 가득 채웠다. 이런 형상은 중국 거울과는 큰 차이를 보여준다. 십이대영자(十二臺營子) 출토의 거울은 Z자 문양으로 되어 있고, 전충남(傳忠南) 전평양(傳平壤) 전성천(傳成川) 출토 국립박물관 소장 거울의 삼각구역문양은 Z자문양의 변형으로 생각된다.
    동단추는 동포(銅泡)라고도 하며 큰 것은 지름이 5㎝ 되는 것도 있고, 옷·마구·신 등에 장식으로 달았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심양정가와자(瀋陽鄭家窪子), 회령 삼봉, 강계 풍룡리, 봉산 신흥동 등지의 집자리와 돌널무덤[石棺墓]에서 출토되었다.
  1. 2. 토기
    한반도의 토기는 즐문토기(櫛文土器)주 03)에서 비롯하여 무문토기(無文土器)로 이어졌다. 전자는 주로 신석기시대에, 후자는 청동기시대에 주로 사용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무문토기는 약 1,000여년 동안 사용하다가 한대(漢代) 토기의 영향으로 형성된 낙랑토기(樂浪土器), 고구려토기, 신라토기 등의 경질토기(硬質土器)로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무문토기도 여러 단계로 변화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윤무병). 먼저 기형에 의한 형식을 분류하고 변천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기형에는 발형토기(鉢形土器), 독형토기[甕形土器], 호형토기(壺形土器), 완형토기(盌形土器), 두형토기(豆形土器), 시루형토기[甑形土器] 등이 있다.
    발형토기에는 구연부가 넓고 대부분 입술[口脣]이 수직이고, 동체(胴体)는 원통형이 많고 깊으며 바닥은 평저로 되어 있다. 발형토기가 출토된 유적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유명한 곳은 강계 공귀리, 회령 오동, 무산 호곡동, 웅기 서포항, 서울 역삼동, 양주 수석리 등지의 주거지와 돌널무덤 등이다. 남한 지역에서는 적갈색의 심발형토기(深鉢形土器)가 대표적인 토기라고 할 수 있다.
    발형토기의 변형으로 공열토기(孔列土器)라는 것이 있는데, 입술[口緣部] 바로 아래에 직경 5mm 이내의 작은 구멍을 횡렬로 배열하였고, 평안남도와 황해도 지방을 제외한 전 지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심발형토기 중에는 구연부 아래나 복부(腹部)에 작은 돌기형의 꼭지손잡이가 달린 것들이 있고, 서울 가락동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팽이형토기[角形土器]는 구연부를 밖으로 감싸 넘겨 덧댄 것처럼 하고 거기에 짧은 사선(斜線)을 2∼3개씩 새겼다. 동체는 복부에서 가장 팽창하였고 하부로 내려가면서 갑자기 축약되고 뾰죽한 바닥을 만들었는데, 전체적으로 팽이와 같은 형상이다. 태토는 활석가루를 섞은 것이 많고, 색은 갈색이 주류를 이루는데 흑색 또는 마연흑색도 더러 있다. 평양 금탄리·미림리, 황주 심촌리, 송림 석탄리, 용연 석교리 등 평안남도와 황해도에서 발견되었다. 남한에서는 서울 가락동에서 나온 일이 있고 매우 드물다. 이중(二重)의 구연부를 가진 변형각형토기(變形角形土器)들도 전국적으로 출토되는데, 구연부의 사선이 없어진 것들이 많고 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와 비슷한 것들도 많아 구분에 혼동을 일으킨다.
    점토대토기는 역시 발형토기의 일종인데, 구연부에 점토로 된 띠를 덧붙인 것이다. 경기도의 한강의 북안과 남안지대와 대구·경주 등지에서 제한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화분형토기(花盆形土器)는 요즘의 화분과 같이 생겼으며, 구연부가 넓고 사선으로 벌어졌고, 기형은 V자형의 하부를 절단한 것과 같은 형상으로 평저가 대부분이다. 태토는 활석이나 석면이 섞인 것이 많으며, 색은 회색이 주류를 이루나 갈색도 더러 있다. 강서 태성리의 토광묘(土壙墓)에서 많이 나왔고, 평양부근에 많고 남한 지역에서는 드문 편이다.
    호형토기에는 짧은 목[短頸]과 긴 목[長頸]이 있고, 소형과 대형이 섞여 있다. 여기에 속하는 토기로서 미송리에서 많이 나오는 미송리형토기(美松里形土器)라는 것도 있는데, 장경호(長頸壺)로서 평저이며 목·어깨·복부 등지에 2∼3조의 띠선[帶線]을 돌렸다. 그리고 복부에 조그마한 띠형[帶狀] 손잡이가 돌출되어 있다. 미송리를 비롯한 평북·평남 지역에서 주로 출토된다.
    우각형(牛角形)손잡이토기는 서울·양주·파주·광주 등지에서 많이 발견되었는데, 장경호의 복부에 소뿔형의 손잡이가 한 개식 두 개가 붙어 있다.
    완형토기라고 하는 소형 토기에는 기고(器高)에 비해 구연부가 더 넓은 대접·보시기·접시 등의 기형이 대부분이고, 전국적인 분포구역을 가지고 있다.
    두형토기[高杯形土器]는 완형토기에 높은 굽이 달린 것으로 오늘날 제기(祭器)와 같은 형상이다. 실제로 제기로 많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삼국시대 토기에도 같은 기형이 많다.
    무문토기에는 표면을 갈고 붉은 칠[丹漆]을 한 단도마연토기(丹塗磨硏土器)라는 것도 있고, 표면과 속까지 검게 구어진 토기를 표면만을 간 흑색마연토기(黑色磨硏土器)도 있다.
    토기는 지역성이 강하여 기형의 변화도 심하고 그 편년에도 차이가 있다. 압록강 유역의 미송리형토기는 공귀리형토기(公貴里形土器)의 후대에 출현하였다. 공귀리형토기는 송화강 유역과 길림성(吉林城) 지방의 토기와 연결되는 것이고, 미송리형토기들은 청동공부(靑銅銎斧)와 함께 나오고 있어 연대가 내려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청천강 유역의 세죽리유적(細竹里遺蹟)에서는 중간 층에 상하 두 층이 있는데, 그 하층에서 미송리형토기가 출토되고, 상층에서는 묵방리형토기(墨房里形土器)가 출토되어 미송리형토기와 묵방리형토기와의 선후가 분명해졌다.
    평안도와 황해도의 팽이형토기는 층위로서가 아니라 기형의 변화로, 특히 전형적인 팽이형토기인 금탄리 출토 토기가 가장 오래되었다. 그 다음은 경부(頸部)가 발생하는 등 변화가 약간씩 나타나는 침촌리와 신흥동토기(新興洞土器)가 뒤를 잇고 있다. 구연부의 형식 변화는 침촌리와 신흥동에서 좀 더 진행되었다. 침촌리와 신흥동토기에 비해 석탄리와 입석리토기(立石里土器)에서는 변형토기의 수량이 증가하고 기형이 보다 다양화되었으며, 이중구연이 퇴화되면서 두터워진 구연부가 다수 나타나며 그 뒤를 따르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오랜 순서부터 금탄리가 가장 선행이고, 다음이 침촌리와 신흥동이며, 최신이 석탄리와 임석리 출토 토기임을 알 수 있다.
    남한지역 출토 토기들 중에서는 공열토기, 팽이형토기, 단도마연토기 등이 보편화되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서 이들 토기들이 비교적 앞선 시기로 볼 수 있다. 다음은 점토대토기와 우각형토기, 두형토기, 흑색토기 등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공열토기는 옥석리주거지에서 출토되어 방사성탄소연대측정(放射性炭素年代測定)에 의해 기원전 7세기 전으로, 팽이형토기는 첨저(尖底)로 즐문토기의 전통을 아직 갖고 있고, 단도마연토기는 지석묘(支石墓)와 석관묘(石棺墓)에서 출토되고, 세형동검과는 절대로 공반(共伴)하지 않는 오랜 토기이다. 점토대토기와 우각형손잡이토기는 세형동검과 공반하는 토기이고, 흑색토기는 초기철기(初期鐵器)와 공반하는 가장 늦은 시기의 토기인 것이다.
  1. 3. 석기
    청동기시대에서 귀한 청동기보다 더 보편적으로 사용된 도구는 마제석기이다. 석기에는 돌칼[石刀]·반달칼[半月形石刀]·돌도끼[石斧]·돌화살촉[石鏃]·갈돌[硏石] 등의 종류가 다양하다. 돌칼은 점판암이나 혈암으로 만든 것으로 경도(硬度)가 낮으며, 형상은 자루에 아무런 문양도 없는 맨자루형식[一段柄式]과 자루의 중간에 홈이 파여 돌려진 모양의 형식[二段柄式] 등이 있다. 돌칼의 크기도 대개 30㎝ 정도 이하의 작은 것들이 많다. 그러나 칼몸[刀身]은 길이에 비해 넓은 편이다. 후기의 돌칼로 김해 무계리 지석묘에서 출토된 것과 같이 칼코가 너무 크고 자루가 작아서 손아귀에 잡기도 불편하여 실용하기에 어렵게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그러한 돌칼은 의기(儀器)로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돌칼은 초기의 조잡하게 생긴 것 외에 대부분의 것은 기계로 뽑은 것과 같이 정제되어 있는 것이 많은데, 이러한 것들은 오르도스동검, 도씨검(桃氏劍, 중국식검), 비파형동검, 세형동검 등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제작연대도 내려오는 것들이다.
    반달칼은 전체 형상이 반달형으로 날 부분은 직선이고 등 부분이 곡선으로 하현달 모양이며, 일반적인 칼처럼 생기지 않았다. 그것과 반대로 곡선이 날이고 직선이 등인 것도 더러 있고, 또 어떤 것은 삼각형으로 생긴 것들도 있는데, 이것들은 삼각형의 두 단변이 날로 되어 있다. 반달칼의 대개는 등 가까운 곳에 두 개의 구멍이 있어 끈을 끼워서 사용하게 되어 있다. 반달칼은 칼몸을 손아귀에 넣고 벼이삭 등 곡식 이삭을 자르는데 사용한 것이다. 양자강 유역의 반달칼의 형상이 한반도의 것과 비슷한 점을 들어 벼농사와 함께 바다를 건너 들어온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반달칼과 홈자귀(홈도끼)의 유입경로를 추적하여 벼농사의 유입경로로 생각하게 되었다.
    돌화살촉은 장삼각형으로 된 형식과 버들잎 모양으로 된 형식의 두 가지가 있다. 장삼각형은 슴베가 없고 아래 양쪽 끝이 날카롭고 길게 나와 있어 마치 날개 모양이고, 화살대에 끼워서 사용하게 되어 있다. 버들잎형은 촉신이 보다 길고 슴베가 있어 대에 꽂게 되어 있다.
    돌도끼는 날을 양쪽에서 간 것과 한 쪽에서 간 것, 도끼 몸이 장방형인 것과 방형인 것, 볼록렌즈 모양으로 중간이 볼록 나온 것, 둥글게 생긴 것, 둥근 몸에 여러 개의 튀어 나온 날이 돌려 있는 것[多頭石斧] 등 여러 종류가 있다. 그리고 특별나게 도끼 몸 중간에 가로 홈이 파여진 홈자귀[有溝石斧]도 있다.
    동부는 선형동부(扇形銅斧)라고 하는 것처럼 날이 부채모양으로 벌어지고 양끝은 날카롭게 올라간 모양의 형식이다. 이런 동부는 의주 미송리·영흥읍, 부여 송국리 등지에서 그 거푸집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내려감에 따라서 부채모양으로 벌어진 날카로운 부분이 없어지는 대신 사각형이 되고, 위에서 꽂게 되어 있는 구멍이 주머니식으로 변해갔다. 이런 형식은 영암과 대구에서 출토되었다.
    동촉은 양 날개가 있고 슴베가 달린 형식으로 양익형(兩翼形)이라고 하는데, 조양현 십이대영자, 사리원 상매리, 고성 간성읍 등지에서 출토되었다.
    동기를 주조하였던 근거는 광석을 녹이는 용광로인 가마의 터와 끓는 동용액(銅溶液)을 부어 만드는 틀인 거푸집의 존재로 인정하는데, 한반도에서 가마터는 발견되지 않고, 서기전 5∼4세기 경의 거푸집만이 발견되었다. 거푸집은 활석(滑石) 또는 사암(砂岩)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세형동검 시기의 다뉴세문경(多鈕細文鏡)과 같이 정교한 것은 흙을 이용한 밀납(蜜蠟)으로 틀을 만들어 주조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청동기시대의 유적
  1. 1. 주거지
    청동기시대의 주민들은 하천이나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약간 높은 구릉이나 산기슭에 소단위로 모여 거주하였기 때문에 청동기시대의 주거지는 대개 이러한 지형에서 발견된다. 방형·장방형과 원형의 두 종류가 있다. 주거지는 전부가 수혈주거(竪穴住居)로 지면을 1m 가까이 파서 만들었다. 그리고 출입을 위해 남쪽에 흙을 다져서 2∼3단의 계단을 만들고, 주거의 한 복판 또는 출입구의 반대편에 치우쳐서 화덕[爐]을 설치하였다. 화덕은 지면을 배 모양으로 10∼20㎝ 정도의 깊이로 얕게 파고 주위에 돌을 돌려놓은 것도 있고, 주거면을 파지 않고 돌만 몇 개 원형으로 돌려서 만든 것도 있다. 화덕은 음식을 익혀서 먹는데 사용하기도 하고, 난방용으로도 이용하였다.
    지붕은 나뭇가지와 입줄기가 긴 억새·갈대 같은 풀입을 엮어서 덮었다. 벼농사가 널리 퍼진 후에는 요즘 같이 볏집으로 지붕을 이었다. 방형·장방형의 집은 지붕을 맞배형으로 만들었는데 후대에는 우진각형으로 발전하였으며, 원형의 지붕은 원추형(圓錐形)으로 마치 몽고의 파오형과 같이 만들었다.
    서산 해미주거지와 부여 송국리주거지(松菊里住居址)의 방형은 한 변이 4∼5m이거나 장방형은 4m×7m 정도 되고, 원형의 경우에는 지름이 5m 내외 정도 되는 면적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특별히 면적이 넓은 것은 장방형의 경우 파주 덕은리에서 3.7m×15.7m, 파주 교하리의 경우에서는 3m×9.5m 정도의 큰 주거지도 발견되었는데, 이들의 경우는 마을의 중심지에서 공회당 같은 공동집회(共同集會) 장소의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고, 덕은리처럼 도구용 돌과 재료가 많은 주거지는 석기 공장으로도 추측하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유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1∼2곳만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덕은리주거지(德隱里住居址). 이 주거지는 장방형 중에서도 세장형(細長形)으로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는데, 벽고는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이 90㎝였고, 중심부는 지표 아래 40㎝ 정도였다. 바닥면은 평탄하고 진흙을 3∼4㎝ 정도의 두께로 깔았다. 기둥구멍은 벽면을 따라가면서 파져 있었고, 작은 구멍에 세운 소주(小柱)로 벽면을 지탱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기둥구멍은 큰 것은 깊이 25㎝, 지름 15㎝이고, 보통의 구멍은 깊이 15∼20㎝, 지름 11∼12㎝였고, 간격은 일정하지 않으나 대개 30㎝ 이내가 많았다. 여기서는 출입용 계단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사다리 같은 도구를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주거의 폐기는 벽면이 불에 탄 흔적이 많은 것으로 보아 화재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발견 유물은 마제석검(磨製石劍)과 약 20개의 석촉, 방추차(紡錘車), 마연석 10여개 등이었다.
    ②송국리주거지. 이 주거지는 청동기시대 주거지로서는 규모 면에서나 내용의 다양성에서나 대표적인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주거지는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야산 중턱쯤에 약 100여 기(基)가 밀집되어 있는 주거군(住居群)으로서 큰 마을 또는 당시의 도시로까지 평가된다. 주위에서는 환호(環濠)와 목책(木柵) 등 방어시설이 확인되었다. 개별 주거지의 형태는 원형과 장방형의 두 가지이며, 원형의 경우 주거의 중심부에 길이 1m되는 타원형의 구덩이를 파고 그 양 끝에 각 1개씩 2개의 기둥구멍을 배치하였고, 구멍 사이는 저장혈(貯藏穴)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화덕자리는 주거 내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옥외에 따로 마련하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고, 이 경우 공동 취사의 개연성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지름 5m 크기의 원형주거에는 대략 5인 정도의 가족이 상거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토 유물은 무문토기·홍도(紅陶)·흑도(黑陶)·반달검[半月形劍]·석촉·돌칼·가락바퀴[紡錘車]·석부·석부거푸집[石斧鎔范] 등이 있다. 무문토기는 특별히 송국리형토기라고 명명된 형식이 있는데, 기형은 폭이 좁은 평저에 작은 굽, 계란 모양의 복부, 약간 외반(外反)한 짧은 목, 갈색조의 토기이다. 크기는 소형은 기고 10㎝, 보통은 20∼40㎝, 큰 것은 80㎝나 되는 것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시기는 서기전 6∼5세기로 추정된다. 송국리형주거지와 송국리형토기는 남한 각지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송국리주거지군 속 낮은 구릉상에서 규모가 큰 석관묘가 발견되었다.
  1. 2. 무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형식은 고인돌과 돌널무덤, 돌덧널무덤[石槨墓]이고, 그 외에 돌무지무덤[積石塚]과 움무덤[土壙墓] 독널무덤[甕棺墓] 등이 알려져 있다.
    고인돌은 함경북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에 밀집 분포되어 있고, 동양에서는 중국의 절강성(浙江省)과 산동반도(山東半島)요동(遼東) 지방, 그리고 일본의 구주(九州) 지방에 분포되어 있다. 고인돌은 하천변이나 약간 높은 대지상에 물의 흐름방향(流向) 구릉의 줄기방향과 일치하게 위치하고 있고, 이런 지형은 당시 주민이 거주하는 지형에서 가까운 곳으로서 주거지와는 구분되는 곳이기도 하다. 고인돌은 형상으로 보아 탁자식(卓子式)과 기반식(碁盤式), 그리고 변형식(變形式) 또는 개석식(蓋石式) 이라고 부르는 3종류로 분류된다. 탁자식은 지면 위에 판상형 돌로 받침돌[支石]을 세우고 그 위에 거대한 윗돌[上石]을 올려놓아 마치 장방형의 석실 같은 매장공간을 만들고, 한 쪽의 단벽(短壁)에 개폐할 수 있는 판석문을 세웠다. 기반식은 지면 위에 괴석 4∼5개로 받침돌로 하고 그 위에 덮개돌(판상석)과 윗돌(거대한 괴석형)을 올려놓고, 지면 아래에 돌널[판상석벽], 석곽[괴석쌓기]이나 움구덩이[土壙], 옹관(甕棺) 등의 매장공간을 마련하였다. 변형식 또는 개석식이라고 하는 형식은 지면에 판상이나 괴석으로 된 받침돌이 없이 윗돌을 지면에 바로 놓고 아래는 기반식과 같은 구조·형식의 매장공간을 만든 무덤이다. 큰 윗돌을 받쳤다는 의미로 본다면, 변형식(개석식)은 고인돌이 아니라 별도의 무덤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출토유물은 매장공간 밖에서 제사 후 파손한 무문토기편(無文土器片)이 출토되고, 부장품으로 마제석기 약간과 간혹 홍도 등이 발견되는 것이 상례이다. 금속제 유물은 매우 드문 편이나 근래에 와서 전라남도 해안 지역에서 기반식이나 변형식 고인돌에서 청동단검 등 청동기들이 자주 발견되고 있다.
    돌널무덤은 지면을 파고 판상석을 세워 사벽을 만들고, 돌덧널무덤에서는 괴석을 쌓아 벽을 만들고, 돌널이나 돌덧널 다 같이 지면에 얕은 분구(墳丘)를 만들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윗돌이 없어진 고인돌의 하부구조와 혼동이 될 정도로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러나 돌널무덤이나 돌덧널무덤은 위치상으로 보면, 고인돌보다 높은 지형에 많이 축조되었다.
    출토유물은 고인돌보다는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부여 송국리 돌널무덤(石棺墓)은 구덩이에 판석으로 4벽을 만들었는데, 길이 2.05m, 너비 1m, 깊이 0.8∼0.9m의 크기로 머리 부분은 넓고 발부분은 좁은[頭廣足狹] 형상의 매장공간을 만들었고, 바닥에도 조금 작은 판상석을 여러 장 이어서 깔았다. 돌널무덤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이 무덤에서는 비파형동검·마제석기·무문토기·관옥(管玉)·장식옥 등 다양하고 풍부한 유물이 출토되어 지역의 수장묘(首長墓)로 판단하고 있다.
    돌무지무덤은 분구를 흙 대신 괴석을 쌓아 만들고, 그 속 지하에 매장시설을 마련하는 무덤 형식으로 분포가 많지는 않다. 대표적인 예는 춘천샘밭(泉田里)의 소양강 북안 모래밭에서 탁자식 고인돌과 함께 수기가 조사되었다. 매장시설은 판석으로 소형(45㎝×22㎝×22㎝)의 석곽을 짜고 그 위에 판석을 덮고 바닥에도 소형의 판석을 깔았으며, 그 위에 돌을 쌓았다. 어떤 것은 소형 석곽 수개를 배치한 것도 있다. 유물은 매장시설 밖에서 마제석기·관옥·적색무문토기편(赤色無文土器片)들이 출토되었다.
    움무덤은 움구덩이 안에 나무널이나 나무덧널을 넣고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하는 무덤 형식인데, 무문토기를 사용한 사람들이 고인돌이나 돌널무덤을 버리고 사용한 그 다음 단계의 무덤형식이다. 이 형식의 무덤은 세형동검을 비롯한 동모(銅鉾)·동과(銅戈)·동탁(銅鐸)·다뉴세문경·차마구 등 여러 종류의 청동기를 부장하고, 시신을 앙와신전장(仰臥伸展葬) 하였다. 이런 형식의 무덤의 예에는 경주의 입실리·구정동·평리 등지의 유적이 알려져 있다. 예외적으로 움내부에 나무덧널 대신 막돌로 돌덧널을 만들고 그 안에 세형동검 등 다수의 청동기를 부장한 무덤형식도 대전 괴정동, 부여 연화리 등지에서 발견·조사되었다. 돌널무덤과 함께 유행한 돌덧널무덤과의 차이는 지하 깊숙이 축조된다는 점과 돌은 판석 대신 전부 막돌만을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독널무덤도 발견된 예가 많은 형식은 아닌데, 광주 신창리, 동래 낙민동, 김해패총, 강서 태성리, 신천 명사리 등지에서 발견된 사례가 보고되어 있다. 구성 형식은 두 개의 독을 아가리를 맞대어 놓은 것인데[合口式], 신창리의 경우 큰 것은 130㎝, 보통은 60∼70㎝, 가장 작은 것은 49㎝ 되는 것들이었다. 김해의 경우는 독의 외부 아래에서 세형동검이 발견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청동기시대의 농경
청동기시대의 인류는 신석기시대에서 정착생활로 들어간 후 이미 수 백년의 장구한 세월을 거치면서 정착지 주변에 경작지를 만들어 식량을 조달하였다. 농경지는 주거지의 가장 아래 쪽, 지금의 평야의 바로 위 높은 자리에서 확인되었다. 곡식은 벼를 비롯하여 보리·조·피·수수·콩 등이었으며, 벼는 여주 흔암리와 부여 송국리의 주거지에서 탄화미(炭化米)가 발견되었다. 송국리에서는 395g의 탄화미가 54-1호 주거지 바닥에서 출토되었다. 김해패총에서 발견된 탄화미는 서기전 7세기로 올라가고, 흔암리의 탄화미는 서기전 13세기의 연대가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의 결과로 나왔다. 북쪽에서는 평양 호남리의 남경유적에서도 벼가 발견되었다. 두만강 유역의 회령오동유적(會寧五洞遺蹟)에서 콩·팥·기장 등의 곡물이 주거지 바닥과 퇴적층에서 발견되었고, 봉산 지탑리에서는 피[稗]의 덩어리가 토기의 바닥에 붙어 나왔다.
벼농사[稻作農耕]는 양자강 이남 지역에서 바다로 남한지방에 도착하였다는 설이 있고, 또 다른 설로는 양자강 지방으로부터 중국의 동해안을 타고 올라와 산동반도 등지를 거쳐서 대동강 유역으로 유입되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전자가 다수설로서 통설이다. 벼의 종류는 인디카(Indica)와 자포니카(Japonica)의 두 종류 중 후자에 속한다. 남한의 벼농사는 서기전 3세기경 일본의 규슈 지방으로 전래되었다. 농경을 했다는 근거로는 송국리의 논유적 등을 들 수 있고, 유물로는 마제석기의 반달칼·홈도끼(有溝石斧) 등과 농부가 따비로 밭을 갈고 있는 조각상이 있는 농경문청동기(農耕文靑銅器) 등이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1997)

  • 한국 청동기문화의 연구  (임병태, 학연문화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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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청동기문화  (국립중앙박물관, 1993)

  • 한국 청동기시대 문화의 이해  (심봉근, 동아대학교 출판부, 1990)

  • 조선고고학전서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8)

  • 한국청동기문화연구  (윤무병, 예경산업사, 1987)

  • 『한국고고학개설』(김원룡,일지사(一志社),1986)

  • 조선의 청동기시대  (황기덕, 사회과학출판사, 1984)

  • 『송국리』I·Ⅱ·Ⅲ·Ⅳ·Ⅴ(국립중앙박물관,1979·1986·1987·1991·1993)

  • 「무문토기문화기의 주거지」(김정기,『한국사논문선집』I,역사학회,1976)

  • 「선사시대 농경문청동기에 대하여」(한병삼,『고고미술』112,1971)

  • 『日韓交涉の考古學-彌生時代篇-』(小田富士雄·韓炳三 編,六興出版,1991)

  • 「中國東北地方の初期金屬器文化の樣相」上·中·下(秋山進午,『考古學雜誌』53-4·54-1·54-4,1968·1969)

  • 「朝鮮における金屬器の起源問題」(西谷正,『史林』50-5,1967)

  • 朝鮮磨製石劍の硏究  (有光敎一, 京都, 1959)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종래의 遼寧式銅劍
주02
주03
빗살무늬토기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6년)
윤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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