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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락(村落)

촌락개념용어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생활의 단위로서, 인간생활의 기본단위인 가족 또는 집들이 모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통합을 이루고 있는 지역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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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풍경 / 촌락
분야
촌락
유형
개념용어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생활의 단위로서, 인간생활의 기본단위인 가족 또는 집들이 모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통합을 이루고 있는 지역집단.
영역닫기영역열기개관
마을·골[谷]·동리·부락·취락 등의 용어로도 사용되는 촌락의 개념과 그것에 대한 연구의 관심은 여러 학문 분야에 따라 각기 다르다.
예를 들면, 지리학에서는 가옥의 집합상태인 취락의 입지조건과 발생·발달·형태·기능 등에 주로 관심을 가지는 반면에, 경제사학에서는 촌락의 공동체적 성격과 촌락을 형성하는 기본단위로서의 가구가 생업과 관련하여 어떤 사회경제적 지위를 가지는가에 일차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즉, 농림어업의 생산양식과 입지조건 및 그것에 의하여 영위되는 가구의 경제생활과 지역산업구조의 전개에 관심을 기울인다.
사회학 및 문화인류학에서는 도시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농산어촌의 지역사회를 총칭하여 촌락이라고 규정하고, 촌락의 사회관계와 사회조직 및 계층구조 등에 관심을 가지면서 인간관계의 사회문화적 통합을 주로 다룬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자연촌 또는 자연부락과 행정적으로 설정한 행정촌 또는 행정부락의 개념규정도 촌락의 연구에서 중요시되고 있다. 현대의 우리나라의 농촌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는 행정 동·이의 밑에 촌락 또는 부락이 있고, 다시 그 밑에 인보집단(隣保集團)으로서의 마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연촌의 일반적인 형태라고 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자연부락과 행정부락의 관계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태로 분류하는 견해도 있다.
첫째는 자연부락과 행정부락이 일치하는 것이고, 둘째는 두 개 이상의 자연부락이 하나의 행정부락을 구성하는 것이며, 셋째는 하나의 자연부락이 두 개 이상의 행정부락으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또, 하나의 취락이 자연부락을 형성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 몇 개의 작은 취락 또는 하위자연부락이 자연부락을 이루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여기에서 취락은 집들이 모여 있는 것이고, 하위자연부락은 취락들이 모여 있는 것이며, 자연부락은 몇 개의 취락들 또는 하위자연부락들이 모인 것이다.
자연부락이 확인되는 지표로서는, 첫째로 동제를 공동으로 하는 범역, 둘째로 동리매 내지 동리추방이 이루어지는 지역, 셋째로 흉사가 있을 때 애도를 나타내는 범역을 들고 있다. 그리고 명칭상 마을 또는 골은 취락 또는 하위자연부락을 지칭하고, 동리는 자연부락을 지칭하며, 부락은 행정부락 또는 자연부락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촌락의 형태는 분류의 기준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촌락의 성립과정에 따라 자연촌과 행정촌이 구분되며, 생업의 기반에 따라 답작촌(畓作村)·전작촌·원예작물촌 등을 포함하는 농촌과 어로촌·양식어촌·수산제조업촌 등을 포함하는 어촌 및 광산촌·임업촌·축산촌·관광촌 등이 구분된다.
가옥의 밀집도에 따라서는 집촌(集村)과 산촌(散村)이 구분되고, 촌락의 지리적 위치에 따라 평야촌·산촌(山村)·하곡촌(河谷村)·강촌·해촌·교외촌 등으로 나누어진다.
촌락의 기능면에서는 역촌·진촌(鎭村)·도진촌(渡津村)·신앙촌 등이 구분될 수 있으며, 주민들의 씨족구성에 따라 동성촌 또는 동족부락과 각성촌 또는 비동족부락이 구분된다.
이와 같이 다양한 촌락의 형태는 사회·문화·정치·경제 등의 여러 측면에 걸친 변화에 따라 촌락의 특성을 더욱 더 복잡하고 다양하게 만든다.
촌락을 구성하고 있는 물리적 속성과 주민들의 응집성 및 촌락구조의 포괄성이 뚜렷해야 촌락의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우선, 촌락의 물리적 속성으로서는 지리적으로 구역이 한정되어 있어서, 촌락 자체가 전체로서의 한 생활단위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촌락은 특정한 명칭을 가지고 있어서 그 촌락의 이름을 지칭함으로써 그 촌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물론, 다른 이웃 촌락에 살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어느 촌락이라는 인식이 뚜렷해야 한다.
촌락사람들의 기본적인 욕구를 만족시켜 주고 신체적 안전을 보장하려면 식료와 주거, 기타의 생활에 필요한 물질적인 공급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촌락의 자원과 인구 및 기술상태는 매우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농촌에 있어서 농작물과 농업기술 및 인구의 규모와 직업구성 및 분업의 정도는 높은 상관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 밖의 어촌과 산촌, 기타의 생태적 조건이 다른 지역에서도 인구와 자연 및 기술상태는 상당히 높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촌락의 제한된 구역 내에 있는 자원은 그 촌락의 인구에 적합해야 하고, 자원개발의 기술에 따라 인구의 부양능력이 달라지며, 생활양식이 변화함에 따라 인구의 규모와 자원의 관계가 달라지기도 한다.
한 촌락이 얼마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주민들이 몇 대(代)에 걸쳐 살아왔는가, 그리고 인구의 이동이 얼마나 일어나고, 어떻게 일어나며, 왜 일어나고 있는지도 그 촌락의 물리적 속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촌락사람들의 응집성은 그들이 얼마나 통합되어 있으며, 공통의 감정을 가지고 협동하는가에 달려 있다. 일반적으로 촌락사람들의 구성이 동족이건 비동족이건 간에 3대 이상의 오랜 거주역사를 가지고 서로 친밀한 면대면(面對面)의 상호작용을 계속할 때 그 촌락의 통합정도는 높다고 하겠다.
특히, 촌락사람들이 그들의 생계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생산과 분배를 공동으로 하거나, 협동관행이 철저하게 지켜질 때에는 응집성이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촌락사람들이 오랫동안 함께 살며 경험을 공유하고 서로의 가문을 잘 알며, 어떤 사건에 대하여 공동의 기억내용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공동체의식을 강화하고 같은 촌락사람들이라는 일체감 내지 연대감을 더욱 강하게 해준다.
그 밖에도 촌락사람들이 신앙과 의례활동이나 공동체사업을 계획하고 수행하는 데에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생활의 여러 측면에서 협동을 증가시키고 단결을 강화하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학력과 재력·기술, 기타의 모든 능력면에서 성공적이고 활동적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한 촌락 안에서 양극화되어, 그들 사이에 잠재적인 분열의 조짐이 보일 때에는 통합과 공통의 감정 및 협동이 깨어질 위협을 받게 된다.
단결과 분열, 조화와 갈등, 연대와 반목이 한 촌락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는 그 촌락 내부의 사정이나 상호관계뿐만 아니라, 더 넓은 외부세계의 사정이나 상호관계에 의해서도 크게 좌우된다. 그 중에서도 도시화와 상업화는 촌락사람들의 전통적인 응집성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도시사람들과 도시의 여러 가지 제도들이 촌락사람들을 이용하고 통제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 실제로 촌락사람들 중에서 더 유능한 사람은 도시로 끌려나갈 가능성이 더욱 많고, 그들의 조상이 오래 누리고 살던 출생지 고향은 협소하고 초라한 마을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상업화에 따라서 촌락의 기업가들은 서로 다른 재능과 배경을 가진 이웃사람들을 잘 이용하기도 한다.
촌락의 구조 또는 조직의 포괄성은 그 촌락이 여러 가지 규범과 제도 및 문화특질, 그리고 촌락이 그 일부를 이루고 있는 전체사회의 여러 세력을 얼마나 내포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그 촌락의 구조는 전체사회와의 관련하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촌락의 규범과 질서는 국가의 법률과 질서가 규정하는 범위 안에서 지켜지고, 촌락의 경제는 국가경제의 일환으로 운영되며, 촌락의 정치·종교·교육, 기타 여러 가지 제도와 생활양식의 요소들이 모두 전체사회와의 관련하에서 유지되고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촌락의 구조를 다룸에 있어서 과거에 서양의 인류학자들이 미개사회의 한 부족이나 소규모사회를 완전히 독립된 폐쇄사회로 다루었던 방식과는 달리 접근해야 될 것이다.
촌락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촌락사람들의 지위와 그에 따른 역할의 구조를 보아야 하고, 가족과 혼인제도에 따르는 거주의 원칙 및 인구이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촌락의 행정적인 지역구조와 정치·경제·사회관계의 면에서 권리·의무와 자격조건 및 그 밖의 여러 가지 규범체계 및 생활양식이 촌락의 내적 구조를 유형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촌락의 내적 구조도 외부의 사회 또는 전체사회의 여러 가지 세력에 의하여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다.
촌락의 물리적인 속성들이 그대로 연속되고, 촌락의 구성원들이 여러 세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공동의 경험과 기억내용들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외부의 세력에 따라서는 그들의 역할이 변화하고 협동과 제재의 규범이 바뀜으로써 촌락의 구조가 변화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촌락이 행정적인 지역구조의 면에서나 공동체생활의 면에서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연속과 변화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역사적 배경
  1. 1. 선사시대
    기록이 전혀 없는 선사시대의 촌락에 관한 실태를 알 수 있는 자료는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주거지(住居址)와 거기에서 출토된 유물들이다.
    그런데 원시적인 농업이 시작되기 이전의 구석기시대에는 수렵과 채취 및 어로경제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정착생활을 하지 못하고 주로 이동생활을 하였으며 촌락의 형성이 불가능하였다. 설사, 구석기시대의 것으로 생각되는 동굴주거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촌락과 결부시킬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서 선사시대의 촌락양상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수혈주거지(竪穴住居址)이다. 특히,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빗살무늬토기문화시대의 수혈주거지는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유적, 평안남도 온천군 운하리의 궁산유적, 평안북도 중강군 토성리유적,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의 서포항유적, 함경북도 무산군 원봉유적 등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청동기 및 초기철기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무문토기문화시대의 수혈주거지는 남한의 한강유역을 비롯하여 소양강 유역 및 서해안과 북한의 압록강·두만강·대동강 등의 하천평야지대를 포함한 전국에 걸쳐 100여 개나 발굴, 조사되었다.
    이들 수혈주거지들의 기둥구멍 배치와 경사의 각도에 따라 복원을 시도한 결과, 초기에는 사람들이 원추형의 집을 짓고 살다가 시대가 경과함에 따라 원통형의 몽고포식(蒙古包式)의 집을 짓고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주거지의 각 주거면적은 20㎡의 것들이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었고, 작은 것은 10㎡에서 큰 것은 80㎡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빗살무늬토기문화와 무문토기문화시대의 주거지 면적에 의하여 당시의 성인 한 사람이 필요로 하였던 주거면적을 4.5㎡로 계산한 고고학적 연구의 결과를 적용하여 당시의 가족구성을 유추해 보면, 주거면적 20㎡의 집에서는 한 쌍의 부부와 그들의 미혼자녀들로 구성된 핵가족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10㎡의 집에서는 부부가족이 살고, 50㎡ 이상의 큰 집에서는 확대가족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당시에 이미 계급과 정치조직이 발달하였다면 80㎡의 큰 집에서는 정치적 지도자나 상층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도 추측된다.
    그리고 무문토기문화시대의 주거지에서는 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와 돌낫 등이 다수 발견되어 초기농경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하나의 유적지에서 다수의 주거지가 발견되는 것은 촌락을 이루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예를 들면, 함경북도 무산군 무산읍 호곡동유적에서는 1,200㎡ 범위내에서 50여 개의 주거지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유적 전체면적의 4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면적이라고 한다. 또, 이 유적에서 발견된 주거지는 그 바닥에서 출토된 유물의 양상이나 주거지 자체의 양상으로 보아 네 시기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이들 50여 개의 주거지를 산술적으로 나누어 볼 때 각 시기에 속하는 주거지는 10여 개가 된다. 이것은 1,200㎡의 지역 내에서 동시에 10여 개의 주거가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촌락을 구성하고 있는 집의 밀도가 매우 높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 밀도로 이 유적 전체에 주거가 분포되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이 촌락은 400개 이상의 집으로 구성된 큰 촌락이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물론, 촌락의 복원을 이렇게 간단히 생각할 수도 없고, 이 숫자를 그대로 믿어 유추할 수도 없지만, 이 시기의 촌락규모가 컸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네 시기로 분류된 주거지 가운데 같은 시기에 속하는 주거지끼리도 서로 중복된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시기적으로 구분되는 주거지끼리 서로 중복되어 있는 것은 당시의 촌락이 농경에 적합한 지역 또는 생활환경이 좋은 지역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촌락이 계속 존재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중복이 심한 곳일수록 그 지역이 당시 주민들의 생활에 적합하였던 곳이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들 주거지가 발견되는 자리의 지형적 조건의 공통점은 거의 모두가 하천이나 평야가 앞쪽에 전개되는 구릉지대 또는 대지의 위라는 것이다. 그것이 구릉의 경사면에 있는 경우나, 대지 위에 있는 것이나, 모두가 하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위치에 존재하고 있는 까닭은 농경과 깊은 관계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주거지의 상태와 출토된 유물의 특성을 살펴보면 주거가 폐기된 증거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화재로 인한 폐기와 이주에 의한 폐기로 구분된다. 특히, 후자는 생활환경이 더 좋은 지역으로 이주하거나 또는 부족들간의 원시적인 전쟁 때문에 주거를 폐기하고 다른 곳으로 이주한 경우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리고 화재에 의하여 주거가 폐허로 되었으면서도 출토된 유물이 매우 적은 주거지의 경우에는 좀더 복잡한 사정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화재에 의하여 집들이 소실되기 전에 가재도구를 미리 반출할 수 있는 시간의 여유가 충분히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화재를 사전에 예견할 수 있는 경우는 가족들 또는 그들의 지배자가 부족들간의 전쟁을 예측하고 미리 가재도구를 안전한 다른 장소에 옮겨놓은 뒤에 집을 불지르거나 또는 전쟁 상대방에 의하여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시기에는 벌써 농경이 일반적으로 행하여져서 재산이 축적될 수 있었고, 부의 관념이 발생하여 거대화된 촌락에서는 사회계급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족들간에는 영토의 분쟁도 일어났을 가능성이 많다.
    이러한 분쟁을 예견한 부족의 지배자는 전략적으로 자기가 통솔하는 부족들의 거주지역을 미리 적당한 장소로 옮긴 다음에 이전의 주거시설을 모두 불태워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때 촌락 또는 부족을 대표하는 촌장 또는 족장의 권력은 매우 컸을 것으로 추측된다. 경기도 파주시의 교하리와 옥석리 주거지들에서는 집들이 폐허되어 완전히 매몰된 다음 그 위에 지석묘(支石墓)가 만들어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여기에서 지석묘의 주인공이 촌장 또는 족장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지석묘의 규모와 그것을 만드는 데 동원된 인원 등을 고려해 볼 때, 촌장 또는 족장의 위세가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1. 2. 고대
    기록상에 나타난 고대의 촌락은 『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後漢書)』 및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 등에 기록된 신화와 전설의 기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삼한시대의 진한 서벌(徐伐) 사로(斯盧) 6촌은 알천양산촌·돌산고허촌·취산진지촌·무산대수촌·금산가리촌·명활산고야촌으로, 이것은 아무리 늦어도 『위지(魏志)』의 기사에 나타나기 이전에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유사』에는 6촌의 기원과 촌장의 이름, 발상지, 6촌과 6부(部) 및 사성(賜姓)의 관계 등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 해석에 관하여는 논란이 많고 아직까지 뚜렷한 정설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들 초기의 6촌은 씨족으로 구성된 촌락으로서 각 촌은 각각의 족장 밑에 혈연적 또는 지연적으로 결합된 사회조직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이들 6촌의 촌락들은 계곡 밑 경작지를 낀 산록과 하천의 주변에 집촌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6부에는 이미 재산과 부(富) 및 권력에서 편차가 발생하여 계층의 분화가 뚜렷하게 나타났던 것 같다.
    그 당시 각 급의 족장세력을 편제하는 데에 각 지방 촌락의 등급을 진촌(眞村)·차촌(次村)·상촌(上村)·제1촌·제2촌·제3촌 등으로 구분한 것은 그러한 계급분화의 특성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골품제도에 있어서도 촌주(村主)의 위치는 진촌주가 5두품이고 차촌주가 4두품에 해당되었으며, 그 밑에 상촌주·제1촌주·제2촌주·제3촌주의 순으로 위계가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었다.
    고구려의 주통촌(酒桶村)과 백제의 해촌(海村)·정촌(井村)·고사부촌(古沙夫村)·벌음촌(伐音村) 및 신라의 자연촌과 행정촌 구분에서 우리는 삼국시대의 촌제를 밝혀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그 당시의 촌락실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755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신라촌락문서(新羅村落文書)」이다.
    여기에는 지금의 청주인 서원(西原)지방에 있었던 4개 촌락의 지역적 범위와 3년간에 걸친 호수, 인구수, 우마의 가축수, 논·밭·마전(麻田)의 토지면적, 뽕나무·잣나무·호두나무의 수에 이르기까지 상세한 변동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의 한 촌락인 사해점촌(沙害漸村)의 사례를 보면 조사 당시에 촌락의 지역적 범위가 5,725보(步)이고, 호수는 19호(일반호구 10호와 노비호구 9호)이며, 인구수는 275인(일반인구 142인과 노비인구 133인)이었다.
    이것은 3년간의 호구와 인구이동 및 출생·사망·혼인 등의 인구동태 숫자를 모두 합한 것이다. 말은 25마리(3년 동안 22마리에서 3마리 증가), 소는 22마리(3년 동안 17마리에서 5마리 증가)였다.
    논면적은 102결(結)2부(負)4속(束)인데, 그 중 호구에 주어진 것이 94결2부4속(촌주위답 19결70부 포함)이고 호구에 주어진 것 이외의 논이 8결(官謨畓 4결과 內視令畓 4결)이었다.
    밭면적은 62결10부7속인데 모두가 호구에 주어진 것이었다. 마전은 1결9부인데 모두가 호구에 주어진 것 이외의 밭이었다. 뽕나무는 1,004그루, 잣나무는 120그루(원래의 86그루에서 3년 동안 34그루 증식), 호도나무는 112그루(원래의 74그루에서 3년 동안 38그루 증식)였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촌주위답 19결70부가 일반호구에 주어져서 분할경작되고, 관모답 4결과 내시령답 4결은 일반호구에 주어진 것 외의 국가권력에 의한 특수관료답의 형식으로 촌락에서 공동경작하였다는 것이다.
    그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신라촌락문서」에 나타난 나머지 3개 촌락에는 촌주위답이 전혀 없고 각 촌락에 관모답과 관모전만 3, 4결씩 일반호구에 주어진 것 이외의 것으로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이들 3개 촌락의 호구와 인구수를 보면, 각각 22호(일반호구 15호와 노비호구 7호) 243인(일반인구 125인과 노비인구 118인), 16호(일반호구 8호와 노비호구 8호) 138인(일반인구 69인과 노비인구 69인), 19호(일반호구 10호와 노비호구 9호) 203인(일반인구 106인과 노비인구 97인)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신라촌락문서」에 나타난 촌락들은 행정촌이 아니라 자연촌이었으며, 촌주는 각 자연촌에 모두 있는 것이 아니고 몇 개의 자연촌에 한 사람의 촌주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자연촌들은 규모가 매우 작았기 때문에 사실상 각 자연촌마다 촌주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한 사람의 촌주가 관할하는 범위는 자연촌이 아니라 몇몇의 자연촌을 포함하는 일정한 행정적 지역단위의 촌락, 즉 행정촌이었다고 추측된다.
  1. 3. 중세
    고려시대 전기까지도 향촌사회의 구조는 대체로 자연촌이 독자성을 가질 수 있는 정도의 규모에 이르지 못하고 몇 개의 자연촌을 묶은 지역촌 또는 행정촌이 중심적인 기능을 하였다.
    이러한 행정촌을 대표하는 대소의 촌장 또는 촌정(村正)은 촌락 내에서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의 신분은 일반백성에 속할 뿐 주(州)·부(府)·군(郡)·현(縣)의 지배적인 기인(其人)·향리(鄕吏)·인리(人吏) 등과는 구별되었다.
    고려시대의 향리들은 인리성(人吏姓)을 가졌지만, 백성들은 백성성(百姓姓)이라는 특정한 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양민(良民)들은 자연적·혈연적 유대로 결합된 사회집단으로서, 각각 특정한 촌락을 생활근거지로 하였다.
    이들 일반백성들의 촌락은 토성(土姓)·촌락성(村落姓)·촌성(村姓)이라는 이름 아래 결집된 혈족단체의 거주지였으며, 인리성을 가진 향리들도 혈연적 자연촌락을 이루고 대대로 군현의 지방민을 통치하였다. 그리고 국가는 이들 혈족집단의 수장(首長)과 향리들을 통하여 촌락을 지배하고 통치하였다.
    촌락의 농민을 파악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국가는 그들의 혈족적 결합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는 혈연의 순수성이 상실되어 이성잡거(異姓雜居)의 현상이 나타나, 혈족단체의 수장을 매개로 하여 국가가 촌락을 지배하고 파악하는 과거의 낡은 방법이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혈연단체의 족단(族團)은 국가권력의 지배 대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지역단체만이 남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이들 일반백성 또는 양민이 거주하는 촌락과 천민들만이 거주하는 촌락이 구별되어 있었다. 군현제의 특수한 형태인 향(鄕)·소(所)·부곡(部曲) 등을 구성하는 촌락은 일반양민과 신분적으로 구별되는 천민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특수한 촌락이었으며, 그 수효도 매우 방대한 것이었다.
    이들 천민은 과거의 전쟁포로나 반역죄인 또는 귀화인의 후예로서, 그들은 특이한 향·소·부곡의 성(姓)을 가졌으며, 지역적으로 차별되었을 뿐만 아니라 직업적으로도 차별되는 특수 부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향·소·부곡은 신라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있었던 특수한 지방하급의 행정구획이었지만, 고려시대에 가장 두드러지게 특성이 나타났다. 향과 부곡은 신분상 천민에 속하기는 하였지만 농업생산에 치중하였다는 점에서 대체로 비슷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소(所)는 수공업생산을 담당하고 있었다.
    특히, 소는 중앙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물품을 생산하여 공납하는 집단이었으며, 주민들의 신분은 공장(工匠)이었다. 예컨대, 도자기를 만드는 자기소(磁器所), 철제품을 만드는 철소(鐵所), 금·은·동의 제품들을 만드는 금소(金所)·은소(銀所)·동소(銅所)와 실을 만드는 사소(絲所), 종이를 만드는 지소(紙所), 비단 옷감을 짜는 주소(紬所), 기와를 굽는 와소(瓦所), 숯을 굽는 탄소(炭所), 소금을 만드는 염소(鹽所), 먹을 만드는 묵소(墨所) 등의 명칭을 가지면서 수공업생산의 주요부문을 담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향과 부곡이 호장(戶長) 등의 토착관리에 의하여 통제되던 것과는 달리, 소는 국왕의 권한 밑에서 소속 주·군·현의 기관을 통하여 직접 그들의 천적(賤籍)이 장악되었다. 그리고 공물(貢物)의 부과와 징수도 보다 직접적으로 국가의 중앙정부와 결합되고 있었으며, 착취와 수탈도 매우 가혹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토지의 강력한 국가관리를 원칙으로 하는 전시과제도(田柴科制度)에 의하여 중앙의 왕실·사원·양반관료·서원·관청 등의 봉건지배층과 지방토호들에게 집중된 광대한 토지는 농장(農莊)이라는 명목으로 장원촌락(莊園村落)을 형성하였다. 농장은 가신(家臣)과 가노(家奴)를 통하여 관리되었으며, 노비와 전호(佃戶)에 의하여 경작되었다. 그리고 농장에 대하여는 면세와 면역의 특전이 주어졌다.
    농장의 관리인을 장두(莊頭)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농장주의 하수인으로서 농장주를 대신하여 농장 내의 전호를 지배, 감독하고, 그들로부터 생산물을 징수하여 농장주에게 바치는 동시에, 잉여생산물을 고리대로 장리하는 등 농장 내의 사무를 처리하였다.
    한편, 장원촌락에 거주하는 전호들은 농장주에게 노역과 생산물을 바치는 대신에, 국가에 대한 부역과 조세의무를 면제받고 있었지만, 농장주와의 주종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또, 장원촌락의 면역과 면세 부분에 해당되는 부역과 조세가 국가지배하의 일반양민에게 과중하게 전가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부담할 능력이 없는 일반촌락의 농민들은 유민(流民)의 길을 택하거나 투탁(投托)에 의하여 농장에 들어가 장객(莊客)이 되기도 하였다.
    농장주와 경작자 사이는 병작반수(幷作半收)라 하여 수확량을 반씩 나누는 분익소작(分益小作)이 매개가 되고 있었다. 농장주와 관리자와 경작자는 상호간에 경제적 관계 외에도 경제 외적 강제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 밖에도 고려시대에는 전국의 운수와 교통노선의 제도정비에 따라 교통로의 역기능을 담당하였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역촌(驛村) 및 하천과 해안의 도선기능을 담당하였던 사람들의 도진촌(渡津村), 외적으로부터의 방위와 행정적 기능을 담당하였던 진촌(鎭村) 등의 특수한 기능적 촌락들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1. 4. 근세
    조선 초기에 군현제도 정비에 따라 향·소·부곡 등의 지방하부행정구획이 혁파되고 면리제도(面里制度)가 실시되었다. 『경국대전』의 호적조와 오가통사목(五家統事目)에서는 5호(戶)를 1통(統)으로 하고 거기에 통주(統主) 또는 통수(統首)를 두며, 5통을 1리(里)로 하고 거기에 이정(里正)과 2명의 유사(有司)를 둔다고 규정하였다. 또, 몇 개의 이를 합쳐 1면(面)을 만들고 거기에 권농관(勸農官)을 두었다.
    이러한 오가통제도는 촌락행정상의 자치조직으로 고려시대의 선행제도였던 오보제(五保制)를 따른 것이다. 즉, 보는 5호로 편성된 자치적 행정단위로 촌락사람들의 연대책임하에 범죄를 적발하고 보 안에서 상호규찰하여 도둑을 고발하고 피해자를 구조하며, 부정한 인신매매와 도망자를 수색하는 등의 의무가 부과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호는 자연가호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자연촌을 그대로 행정촌으로 편성한 것이다.
    신라와 고려시대처럼 몇 개의 자연촌을 묶어서 행정촌으로 편성하지 않고, 자연촌을 그대로 행정촌에 편성하고 있는 것은 전결(田結)과 호구수에 의한 완전한 군현제도가 아직도 확립되지 못한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자연촌이 독자성을 가질 수 있는 정도의 규모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조선시대의 촌락은 대략 20호 내지 30호 또는 크게 100여 호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각 촌락에는 이도(里導)·이정·동수(洞首)·존위(尊位)·좌수(座首) 등의 여러 가지 명칭을 가진 자치행정의 책임자가 있었다.
    그 밑에 영좌(領座)·유사·두민(頭民)·좌상(座上) 등의 명칭을 가진 임원들이 촌락의 일을 맡아 보았으며, 소임(所任)·이례(里隷)·동하(洞下)·동장(洞掌) 등의 명칭을 가진 사람들이 촌락의 잡역과 심부름을 하였다.
    촌락의 임원들은 매년 정월에 개최되는 대동회(大洞會)에서 선출되며, 임기는 1년으로 되어 있으나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연임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동회에는 촌락주민들이 각 호에서 한 사람씩 참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촌락은 단순한 행정적 단위였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공동체적 사회생활의 단위였기 때문에 그들의 주요 사회관계와 집단들이 촌락 내에 누적되어 있었고, 하나의 자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촌락의 공공시설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으로 도로·교량·우물·동사(洞舍) 등의 축조와 개수작업을 주민들은 공동으로 실시하였다. 그러한 일들은 대동회의 결의를 거쳐서 각 호당 얼마씩 비용을 할당하여 갹출하고 노역을 부과함으로써 촌락주민들이 모두 참여하였다.
    사전(私田)을 혁파하고 토지의 국유 또는 공유를 원칙으로 하는 토지제도 개혁은 조선건국 이래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시도되었지만, 근본적인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소수인에 의한 사전의 독점현상이 가속되었다.
    특히, 문무의 양반관리와 공신들에게 분급된 과전(科田)·공신전(功臣田) 또는 별사전(別賜田) 등의 사전을 가지고 있던 외방의 권문세가들은 관료적 부재지주(不在地主)로서 그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사전을 기초로 하여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다른 토지, 특히 공전(公田)을 침탈하고 점거하여 대토지소유자가 되었다.
    다른 한편, 촌락에 거주하는 재촌지주(在村地主)들도 가혹한 소작료의 수취에 의하여 그들의 토지소유 규모를 점차적으로 확대하여 나갔다.
    그리하여 촌락에 거주하는 일반농민들은 소작 또는 예농(隷農)으로 인해 더욱 가혹한 생산조건에 놓이게 되었다. 실제로, 1436년(세종 18)에 강원도의 호구별 토지소유 규모를 보면 50결 이상의 대호(大戶)가 10호, 20결 이상 50결 미만의 중호(中戶)가 71호, 10결 이상 20결 미만의 소호(小戶)가 1,641호, 5결 이상 10결 미만의 잔호(殘戶)가 2,043호, 5결 이하의 잔잔호(殘殘戶)가 7,773호였다. 그 나머지는 토지를 전혀 소유하지 못한 순소작농이거나 예농들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소작료는 병작반수가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이렇게 볼 때 당시의 촌락은 경제적 계층이 뚜렷하고 그들 계층간에 지배와 예속의 관계가 뚜렷하게 나타났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광대한 토지의 사유에 기초한 경제적 계층과 신분상의 특권 및 혈연관계를 기초로 하여 귀족·양반·유림과 같은 특권계급의 사람들은 특정한 지역에 동족촌락을 형성하고 위세를 과시하였다. 동족촌락은 신라와 고려시대에도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촌락사에서 동족촌락이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였다.
    1930년에 실시한 동족촌락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그 당시에 양반과 유림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살고 있었던 저명한 동족촌락 1,685개 중에서 1430년 이전에 형성된 것이 207개였고, 1430년에서 1830년(순조 30) 사이에 형성된 것이 997개였다. 따라서, 발생연대가 분명하지 않은 458개를 제외하면 조사된 저명동족촌락의 81% 이상이 조선시대에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동족촌락들은 원래 그 지방에서 관직 또는 세력을 가지고 있던 지배적인 성씨의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형성하기도 하였고, 세도가의 자손들이 분가하여 새로 형성하기도 하였으며, 중앙정부에서 높은 관직에 있던 사람이 고향 또는 광대한 사유지가 있는 연고지를 찾아 은퇴하면서 형성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동족촌락 중에는 하나의 성씨만으로 구성된 것도 있지만, 하나 또는 두 개 이상의 지배적인 성씨와 소수의 다른 성씨들로 구성된 것들도 많았다.
    특히, 저명한 양반 동족촌락에서는 유명한 선조의 사당을 마련하고 서원을 건립하여 후손들 중에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지방에 남아 있는 양반들도 향교와 문묘의 행사를 중심으로 촌락의 범위를 벗어난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관계망을 가지고 위세를 떨치는 한편, 권위의식과 혈족의식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족보의 편찬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1. 5. 일제강점기
    일본은 우리나라에 식민지지배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일차적으로 행정간소화라는 명목으로 조선시대의 동리를 폐합하는 지방행정제도의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들은 종래의 자연발생적인 촌락들을 2개 내지 3개씩 통폐합하여 법정동리로 묶고, 이정·이도·존위·좌수·동수 등의 명칭을 철폐하고 구장(區長)이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지방행정제도의 개혁은 이른바 자연촌과 행정촌이라는 일본의 이중구조를 우리나라에 그대로 이식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종래의 동리장은 모두 해직시키고 새로이 구장을 임명함에 있어 낡은 사상을 일소하고 식민지행정에 솔선수범하는 지방의 유력자를 선정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실제로 일제의 식민지행정기관이 지방의 유력자로 임명하려던 양반유생들은 식민지의 정치와 행정에 반대하고 그 시행을 방해하는 예가 많았다.
    새로 선정된 구장들은 무급의 명예직으로 하고 그들의 임무를 대폭 간소화하여 촌락의 지방자치업무를 대부분 면의 행정으로 이관시켰다. 농업과 축산·과수·권농 기타의 산업조직과 촌락의 자치단체들을 면단위로 설립하고 면의 행정지도하에 두었다.
    이처럼 촌락의 주요 자치기능들을 축소 또는 약화시키고 면의 행정기능을 확대, 강화시킴에 따라 지역사회구조의 비중도 촌락에서 면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지방행정의 경찰정치도 강화되었다. 경찰은 그 본연의 임무인 치안 이외에도 교육·권농·토목·위생 등에 관한 감시와 행정지도 임무까지 맡아 촌락주민들의 생활전반에 걸쳐 권력을 행사하고 지배하였다.
    일제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실시된 토지조사사업도 촌락주민들의 경제생활과 계층구조를 크게 변화시켰다. 일제는 토지소유권 조사를 실시함에 있어서 소유권의 정밀한 조사를 하지 않고 신고주의(申告主義) 방법을 택하였는데, 하나의 토지에 다원적인 토지소유권이 존재하는 당시의 우리나라 농촌상황에서 신고주의방법을 택함으로써 하나의 권리만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농민들에게 여러 가지 불리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우선, 토지조사사업의 목적과 토지소유권 신고의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농민들은 조세의 부담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토지면적을 축소시켜 신고하거나 또는 토지조사령을 위반하고 신고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신고에 누락된 면적은 사유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공유지가 되어 조선총독부의 소유로 되었다.
    그 밖에도 사실상 농민들이 이용하던 여러 형태의 공유지가 모두 조선총독부의 소유로 되었다. 더구나, 권문호족과 지주들은 농민의 토지소유를 약탈 신고하여 사유권을 법인(法認)받는 경우도 많았다. 농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던 경작지·산림·초원 등을 포함한 촌락공유지와 씨족의 위토도 특권층 또는 특정 개인에 의하여 신고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사유지가 되어 농민들은 공유지와 위토를 상실하였다.
    그 밖에도 종래의 미개간지는 대부분 무주공유(無主共有)로서 개간하는 사람의 소유로 되어 있었는데, 토지조사령은 신개간지의 사유권을 인정한다고 규정하였으므로 투기적인 일본인 자본가와 권문호족들이 자신들의 개간지로 신고하여 사유지로 인정받았다.
    그리하여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1918년의 농민층 분화를 보면, 지주 3.1%, 자작농 19.7%, 자작 겸 소작농 39.4%, 순소작농 37. 8%로서 지주소작제도가 확대, 개편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1939년에는 전 농가의 53.9%가 순소작농이었고, 쌀의 주산지인 남한에서는 순소작농이 70%에 이르러 대부분의 농민이 소작으로 전락되었다.
    이처럼 토지의 박탈을 자행한 토지조사사업은 많은 소유권분쟁을 일으켰고, 60∼70%에 이르는 현물고액 소작료와 세금 및 각종의 부과금 등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소작농들은 전국 각지에서 일제식민지에 대한 반항운동으로 소작쟁의를 일으켰다.
    더구나, 제2차세계대전 말기에는 전시체제라는 명목으로 일제가 공출제도(供出制度)를 만들어 농민들의 자가소비용 식량과 종자 이외의 모든 농산물을 조선총독부에 바치도록 강요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당해연도의 공출량을 사전에 농민 각 개인에게 할당하여 공출의무를 지게 하는 사전할당제와 공출량의 완수를 각 촌락단위로 연대책임하에 두는 부락책임제까지 실시함으로써 농민들 상호간에 감시의무를 지게 하고, 최소한의 자가소비용 식량까지 강제적으로 수탈하고 잡곡과 콩깻묵 등의 식량배급제를 실시하였다.
  1. 6. 광복 이후
    광복 이후 한국의 촌락에서는 일제의 식민통치가 청산되고 자율적인 생활이 이루어졌다. 토지소유에 의한 농가계층에도 변화가 있었다. 식민지시대에 일본인들의 소유였던 귀속농지와 지주 소작관계의 재조정으로 1949년 남한에서는 광복 당시에 비하여 지주 겸 자작농과 자작 겸 소작농의 비율이 크게 증가하고 순소작농의 비율이 절반 이상 감소되었다.
    농지개혁이 실시되는 과정에서 6·25전쟁이 일어나 여러 가지 제약을 받기는 하였지만 지주세력이 농촌에서 일단 감소한 것만은 사실이다.
    1950년의 6·25전쟁으로 전국의 촌락은 일대 변동을 겪었다. 전쟁으로 촌락을 떠나 외지로 나간 사람들이 많았고, 외지에서 피난온 사람들이 그 촌락에 정착한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인구의 대이동은 우리나라 역사상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1960년대 이후의 전국적인 도시화와 공업화 및 경제성장에 따라 촌락의 청소년들과 경제적 상위계층 및 하위계층 사람들이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찾아 가까운 중소도시나 멀리 대도시로 빠져나감으로써 촌락주민들의 연령별 인구구성이 바뀌고 가구수와 인구수도 감소현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에 전국적으로 실시된 새마을운동도 촌락의 하부구조를 크게 변화시켰다. 경지정리, 농로확장, 상수도시설·주택 및 변소 개량, 전기 및 전화 가설, 기타 농촌·산촌·어촌의 소득증대사업과 환경·위생·보건 등 전반적인 생활개선사업이 이루어져 촌락생활이 크게 변화하였다.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전됨에 따라 농촌·산촌·어촌의 생산구조도 크게 변화하였다. 도시의 수요에 맞추어 비닐하우스 채소재배와 과수 및 어업생산이 자가소비를 위한 생계경제에서 시장판매를 위한 상업경제로 전환되었다.
    농·산·어촌의 인구가 도시로 계속 유출됨에 따라 촌락에서는 인구의 공동화현상(空洞化現象)이 생겨서 1980년대 이후에는 전국의 어느 촌락에서나 빈 집들이 늘어나고 노인과다현상이 나타났다. 그 대신 농업의 기계화가 계속 추진되고 작물의 종자개량 및 화학비료와 영농방법이 개선되어 농업생산의 구조와 생산력의 면에서는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도로망과 교통수단도 발달하여 전국의 촌락과 도시가 1일생활권으로 통합되었다. 더구나, 텔레비전·라디오·신문 등 대중매체와 컴퓨터를 매개로 한 정보매체의 보급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각종 정보의 전달이 신속해짐에 따라서 촌락은 더 이상 고립된 단위가 아니고, 전국의 다른 촌락들 및 인근 중소도시나 대도시와도 교통·통신·정보면에서 긴밀한 연계를 이루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경제와 협동
한국인의 전통적인 촌락생활에서 자족성(自足性)이 뚜렷하게 나타났던 것은 그 당시의 환경과 기술상태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생태적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즉, 조선 말기까지 촌락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농업 이외의 다른 생업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토지에만 고착되어 있었다.
당시의 유일한 경제적 기초를 이루고 있었던 농업 자체도 가족노동에 의하여 경영되는 영세한 규모인 데다가, 농업기술의 후진성으로 노동생산성이 낮아 자급자족의 범위를 넘지 못하였고, 분업 또한 겨우 남녀간의 성별분업 정도를 넘지 못하였다.
생산물의 분배와 교환행위에 있어서도 촌락사람들의 활동은 활발하지 못하였다. 5일장(五日場) 또는 10일시(十日市)와 같은 농촌의 주변시장은 있었지만, 잉여생산이 극히 낮은 상태에서 촌락사람들의 시장경제에 대한 의존도는 매우 낮았다.
그들이 직접 생산할 수 없는 생활용품은 자신들의 생산물을 시장에 가지고 나가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물물교환을 하거나, 화폐 또는 물품화폐를 매개로 하여 시장상인과 거래함으로써 조달하였다.
각 지방의 산물과 일용잡화를 교환하는 데에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던 상인들은 주로 일정한 지역권 내의 각 정기시장을 주기적으로 돌아다니며 각자의 거래범위를 가지고 있던 보부상들이었다. 이 촌락에서 저 촌락으로 직접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행상인도 있었다.
촌락사람들의 소비유형은 원칙적으로 사회적 신분과 경제적 계층에 따라 다르다고 하겠으나, 극소수의 지주계급을 제외하고는 일반농민들의 소비수준과 그 유형은 대체로 동질적이었다.
이상과 같은 촌락 내의 생산·분배·소비활동 중에서 협동이 가장 잘 이루어지는 부문은 생산활동이었다. 우리나라의 농업은 쌀농사 위주로 경영되어 왔기 때문에 관개수리의 문제가 항상 뒤따르고, 계절에 따라 농업노동력이 집중적으로 요구되는 경우가 많다.
관개와 수리를 위하여 보(洑)나 제방을 축조하고 개수하는 데에 일시에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야 하고, 벼농사 중 모를 옮겨 심고 김을 맬 때에는 작업량이 많다.
하지만 그 작업시기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짧은 시일 내에 많은 일을 하기 위하여, 촌락의 장정들이 모두 동원되어 촌락 전체의 경작지를 차례로 돌아가면서 공동작업을 하였다. 이러한 관행이 바로 두레였다.
촌락사람들이 두레에 공동으로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공동체의식의 발로인 동시에, 또 그것은 촌락사람들의 응집력을 더욱 강화시켜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촌락의 장정들이 두레에 참가하는 것은 그 촌락의 사회적 결속력이 그들에게 강제적으로 명령하는 것이어서 개인적 자의는 거의 허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두레의 공동노동형태가 조선시대에는 어느 촌락에서나 널리 행하여졌다.
조선시대에는 두레말고도 품앗이라는 협동적 노동형태가 있었다. 이는 개인들이 하루하루를 단위로 하여 1:1로 노동을 교환하는 관행이다. 그리고 노동의 대가로는 현물이나 화폐로써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받은 품(勞動)에 대하여 품으로써 갚는 일종의 호혜적인 노동의 교환이 바로 품앗이인 것이다.
노동의 교환은 인력과 인력 사이뿐만 아니라, 인력과 축력(畜力)의 교환도 가능하며 당사자와 제3의 대행자 사이에도 교환이 가능하다. 품앗이로 하는 일은 모내기를 비롯하여 김매기나 추수 등의 논·밭 일과 퇴비·풀베기와 지붕이기 등 모든 일에 걸쳐 해당되지 않는 것이 거의 없다.
두레와 품앗이의 특성을 비교해 볼 때 그 차이점은, 첫째로 두레의 경우 촌락의 공동체적인 구속력이 가입을 강제하는 데 반하여, 품앗이의 경우에는 개인적인 자의에 따라 자유롭게 조직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두레가 1년을 통하여 볼 때 농번기 중에서도 가장 바쁜 모심기와 김매기를 중심으로 하여 비교적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지는 데 반하여, 품앗이는 그 시기와 계절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일에 일시적으로 행하여진다는 것이다.
셋째로, 작업의 종류를 비교해 볼 때 일반적으로 두레는 논벼를 재배하기 위하여 관개수리·모심기·김매기 등의 벼농사지역에서 주로 관행되는 데 반하여, 품앗이는 논농사나 밭농사를 가리지 않고 자가노동력이 부족한 모든 일에 걸쳐 행하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넷째로, 두레에는 대개 조직의 임무를 맡아보는 역원(役員)이 있고 농기(農旗)와 농악(農樂)이 있으며, 식사를 공동으로 할 뿐만 아니라 공동의 향연을 가짐으로써 촌락공동체의 연대의식과 결속력을 더욱 강하게 하는 데 반하여, 품앗이에는 그러한 조직과 기능 및 농악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레와 품앗이는 모두 촌락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의 협동과 거기에 참여하는 각 개인의 작업능력이 평등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관행되었다.
이러한 협동의 관행은 전통적인 공동체생활에서 촌락사람들의 상호의존과 부조를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또 그러한 관행 때문에 촌락사람들의 공동체의식과 상호부조관념이 더욱 더 강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두레의 공동노동관행이 약화되고 변질되었다. 예를 들면, 강원도의 어느 촌락에서는 1927년까지 두레가 계속되었으나 그 뒤로는 없어졌다고 하는데, 그 이전에 두레가 관행될 때에도 그 성격은 이미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것에서 상당히 변질된 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즉, 두레를 조직하기 전에 미리 각 호의 경영경지면적과 노동력을 사정(査定)한 다음에, 촌락 내의 농가전체경지면적을 산출하여 그 소요 노동일수를 결정하였다. 작업은 두레에 참가한 촌락주민 모두가 공동으로 하였다.
그러나 각 농가의 경영경지면적과 노동력에는 대소의 차이가 있으므로, 경영경지면적이 노동력에 비하여 작은 농가는 두레로 일한 노동량에서 자기의 경작지에 소요된 노동량을 뺀 나머지에 대하여 노임을 받고, 반대로 경영경지면적이 노동력에 비하여 큰 농가에서는 그만큼 노임을 지불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레의 공동체적 구속력이 약화되고 두레에 참가하는 촌락사람들 개개인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타산적으로 변질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품앗이는 전통적으로 개인의 사적인 자의에 따라 행하여진 1:1의 노동력의 교환이기 때문에 촌락사람들 개개인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모순되지 않는다. 따라서 두레의 협동관행은 약화되고 변질되었지만 품앗이의 협동관행은 그대로 계속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일제강점기까지 조금씩 명맥을 이어오던 두레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품앗이의 노동력교환도 더욱 약화되고 변질되었다. 농촌인구의 이촌현상(離村現象)으로 촌락 내의 인력부족이 심각해짐에 따라 농업의 기계화와 기술혁신이 진전되는 한편, 협동관행과 노동의 가치에 대한 농민들의 관념이 변화하였다.
예를 들면, 경운기·이앙기·제초기·자동탈곡기 등 농기계의 사용이 증가함에 따라 논갈기·모심기·김매기·추수·타작·운반 등의 작업량이 감소하고 용이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기계들을 이용하는 부업이 생겨서 품앗이의 빈도가 훨씬 감소되었다.
그 대신 현금으로 품을 팔고 산다는 관념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심지어 농번기에 집중적으로 일손이 필요할 때에는 촌락 안에서 충당할 수 없는 인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도시에서 남녀의 구별없이 날품으로 사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결과는 농촌사람들의 노동에 대한 가치의 변화로 나타났다. 즉, 그들의 노임에 대한 관념이 달라지고 여성과 노인인구의 노동참여가 증가하는 한편, 점차로 기업가 정신이 농촌에서도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하여 촌락의 공동체적 협동의 관행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으로 수행된 여러 가지 촌락의 공동체적 협동사업이나 개별적인 소집단의 협동이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로 나타났다.
특히, 촌락의 경제적 여유가 생기고 생활수준이 향상됨에 따라서 생산활동 이외의 공공부조와 금융 및 오락 등을 목적으로 하는 각종의 계(契) 조직을 통하여 촌락사람들의 공동체적 협동관행은 지금도 여전히 끈기있게 계속되고 있다.
혼례나 장례 때의 상호부조는 조선시대로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계속되는 협동의 관행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촌락의 공동체적 협동관행을 이해하는 데에 계의 형태와 기능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계의 성격에는 촌락공동체의 성격이 그대로 반영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기 때문에, 계의 형태와 기능의 변모는 촌락공동체의 변질을 이해하는 데에 좋은 지표가 된다.
옛날에는 촌락 전체가 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계에는 다분히 지역적 연대의식과 전통주의 및 도의적인 성격이 농후하였다. 특히, 동계(洞契)는 촌락의 전체가구를 계원으로 하며, 대부분의 경우 이장이 계장(契長)을 역임하고 유사와 소임을 1명씩 두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동계의 회합장소는 촌락의 공회당이나 동사(洞舍) 또는 넓은 사랑방이며, 그 모임에서는 주로 촌락의 여러 가지 공동사업을 결정하고 예산과 결산을 심의, 검토하며, 공식적인 회의가 끝난 다음에는 잔치가 베풀어진다.
비용은 해마다 각 호에서 징수하는 경우도 있고, 촌락의 공유재산이 있을 때는 거기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계의 비용을 충당하는 수도 있다.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계로서는 혼사계(婚事契)와 상포계(喪布契)가 있다. 혼사계는 계원의 가족 중에 혼인하는 사람이 있을 때 돈이나 필요한 물품을 급여하기 위한 것이고, 상포계는 가족 중에 노인이 있는 경우 갑자기 상을 당하였을 때에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가입하는 것으로 그 기능은 보험과 같은 것이다.
그 밖에도 문중에는 종계(宗契)나 문중계(門中契)가 있고, 자녀들의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한 학계(學契)도 있으며, 순전히 경제적인 목적으로 조직하는 식리계(殖利契), 기타 물품구입을 위한 계들이 있다. 그리고 같은 연배들의 연령집단이 친목과 오락을 목적으로 조직하는 동갑계(同甲契)나 칠성계(七星契) 같은 것들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촌락사람들의 계활동을 비롯한 대부분의 협동은 과거처럼 단순한 공동체적인 구속력이 기계적으로 촌락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때로는 어떤 공동의 목표나 사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정책적인 면에서 행정력이 강제하는 수도 있지만, 그러한 경우에는 대부분 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촌락사람들의 협동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것은 그들의 공동이익과 개인적인 이익을 충분히 고려하여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계산이 확실할 때 생기는 신념이다.
이처럼 촌락의 협동관행이 타산적으로 변화되어 감에 따라 공동체의식이 약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공동체적 협동의 여러 가지 형태는 촌락생활의 절실한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데에 큰 구실을 하고 있다. 1970년대에 성행하였던 새마을사업의 협동관행도 실은 촌락의 전통적인 공동체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신앙과 의례
촌락의 신앙과 의례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동제(洞祭)이다. 우리 나라의 농촌·산촌·어촌은 어느 촌락이나 대개 동제를 거행하는 제당(祭堂)을 가지고 있고, 이곳은 평소에도 외부의 사람들은 물론 촌락사람들까지도 접근을 꺼리는 성역(聖域)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동제의 명칭과 신역(神域)·신당(神堂)·신단(神壇) 등의 형태는 각 촌락마다 약간씩 다르고 제기(祭期)와 제의(祭儀)에도 차이가 있다.
강원도 어느 산촌의 경우를 보면 동제의 명칭을 서낭제〔城隍祭〕·동제·치성제(致誠祭)·당제·산제 등으로 부르고, 제당은 높이 20m 가량의 전나무 밑에 작은 목조건물을 짓고 그 안에 성황지신위(城隍之神位)와 토지지신위(土地之神位)라고 하는 두 개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제당이 촌락의 수호신인 성황신과 토양의 풍요 및 곡물·가축 등의 다산(多産)을 맡은 농업신인 토지신을 모시고 있는 성역임을 알 수 있다.
다른 제당에는 대부분 건물이 따로 없고 신목(神木)만 있는데, 그것은 신체(神體)와 신당이 아직 분화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동제는 촌락사람들 전부가 공동으로 지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실제로 제의행사를 주관하는 사람은 제관(祭官)으로 뽑힌 화주(化主)·헌관(獻官)·축관(祝官) 등이다.
이들 제관들은 보통 동제를 마친 자리에서 다음해의 제관으로 1년 전에 미리 선정되어 1년 동안 부정(不淨)을 피하도록 하지만 제일(祭日) 직전에 선정되는 경우도 있다. 제관을 선정하는 데에는 반드시 생기복덕(生氣福德)을 보아서 가장 적합한 사람으로 뽑는다.
일단 제관으로 뽑히면 화주는 동제를 지내기 전에 며칠 동안 목욕재계하고 기도하며, 헌관과 축관은 동제 당일 하루 동안만 기도한다. 그 동안에는 촌락 내에서 사람은 물론 짐승도 출산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으며 사망도 부정으로 간주된다. 만일, 산고(産故)나 사망이 발생하면 제일을 물리고 제관도 새로 선출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다.
제일 하루 전에는 제당에 금줄〔禁繩〕을 치며 화주의 집인 도가(都家) 또는 제당 근처에서 제물을 조리하여 자정이 가까울 무렵 제단에 진설하고 제의를 거행하는데, 위패가 있는 제당에서는 그대로 행하지만 위패가 없는 곳에서는 신목에 신위를 써 붙이고 제의를 거행한다.
제주(祭主)가 향을 피우고 술을 따라 강신(降神)한 다음에 헌관의 헌작(獻爵)과 천찬(薦饌) 및 축관의 고축(告祝) 순으로 제의가 진행되는데, 고축에는 대부분 축문을 읽는 것이 보통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구두로 고축하기도 한다. 그 축원의 내용은 대개 1년 동안 촌락 전체의 안녕과 천재지변·수해·질병 등으로부터 사람·가축·곡물을 보호하고 다산의 효과 또는 풍요를 비는 것이다.
고축이 끝나면 촌락 내의 각 집을 위하여 고사(告辭)를 외우며 가벼운 백지에 불을 붙여서 태우는 소지(燒紙)를 행한다. 이 소지는 각 집의 축원을 신에게 알리는 것으로서 소지에 따라 한 해 동안의 운수를 점치기도 한다. 소지를 마지막으로 동제의 의식은 끝나고 거기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은 동제에 사용하였던 제물과 술을 음복(飮福)한다.
음복에는 차례가 있으며 제물처리의 방법에도 회식(會食)과 분배가 있다. 즉, 제관들이 제전을 거행할 때에 소량의 음복을 하고, 동제가 끝난 뒤에 그 나머지 전부를 촌락사람들 모두가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이다. 제물의 양이 많을 때에는 회식과 분배를 하지만, 적을 때에는 분배는 하지 않고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만 회식하는 것으로 그친다.
제물을 분배할 경우에 촌락사람들은 그 분배된 제물을 가족과 함께 음복한다. 이것은 신에 의하여 성화(聖化)된 신찬(神饌)과 신주(神酒)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들도 똑같이 신의 은총을 받아 건강·장수·행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종 제의에서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 관행은 공동체의 단결을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며,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이 예로부터 내려오는 관습으로 되어 있다.
동제가 끝난 다음에 음복에 이어서 촌락사람들로 구성된 무악대(舞樂隊)의 행렬이 촌락의 각 집을 찾아다니며 그 집의 안녕과 번영을 빌고 술과 음식을 대접받는 별신굿[別神祭]을 행하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별신굿에 참가하는 지역적 범위가 동제의 범위보다 훨씬 더 넓은 경우도 있다. 여하튼, 촌락사람들의 공동회식이 끝나면 별신굿이 있든지 없든지간에 대동회(大洞會)가 열린다.
대동회에서는 동계와 동제의 비용에 관한 보고 및 지난해의 총결산과 공유재산의 점검이 있고, 다음해의 제관을 뽑으며, 그 촌락의 여러 가지 중요한 문제들을 의논하고 결정한다.
대동회에서 결정된 사항들은 그 촌락사람들의 행위를 규제하는 규범이 되고, 그 규범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응분의 제재가 가해진다. 요컨대, 촌락사람들은 동제라는 신앙과 의례를 통하여 그들의 공동체의식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공동체의 응집력과 협동의식을 더욱 강화한다고 볼 수 있다.
동제라는 공동관심사의 장이 마련됨으로써 촌락사람들의 사회적 통합을 이룰 수 있는 계기가 되고, 동제 직후에 행하여지는 음복에서 의례음식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촌락사람들의 단결을 도모하고 의사소통체계를 형성할 수 있다.
동제는 또 1년 동안 촌락의 정치·경제 등 중요한 문제들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대동회를 개최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에도 기여한다.
영역닫기영역열기규범과 제재
전통적으로 촌락 내부의 사회질서와 정의는 거의 모두 대내적인 도덕과 관습에 따라 실현되고 촌락 외부의 사회통제기관이나 국가의 법률에 의존하지 않았다. 집안싸움은 담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하고 이웃간의 싸움은 촌락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것이 전통적인 촌락의 관행이었다.
특히, 조선시대의 전통사회에서는 유교적 규범체계가 모든 대인관계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규범과 촌락의 공동체규범이 뚜렷하게 분화되지 않았다.
이러한 행위규범을 어겼을 때에는 그것이 개인이나 가족 또는 친족에 직접 관련된 일탈행위일지라도 촌락 전체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직접 반응하여 중의(衆意)에 따라 응분의 제재와 벌을 주었다. 개인이나 가족 또는 친족은 이러한 촌락의 공동체규범과 제재에 대하여 항거할 수 없었다.
촌락공동체의 형사자치권(刑事自治權)은 조선시대에 지방의 유력한 양반유생들이 유교의 도덕률을 바탕으로 하여 그 일족과 향리를 교화하기 위하여 마련한 향약(鄕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향약에서 도덕요목으로 규정한 덕업상권(德業相勸)·과실상규(過失相規)·예속상교(禮俗相交)·환란상휼(患難相恤)은 원래 중국에서 정해진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에는 사회적 규범으로 여겨졌다.
이것을 어겼을 때에는 약장(約長)의 주도하에 향회(鄕會)의 재판을 거쳐 여러 가지 범죄의 종목에 따라 상벌(上罰)·차상벌(次上罰)·중벌(中罰)·하벌(下罰) 등의 형벌을 가하였다. 형벌의 내용 중에는 사류(士類)와 장자(長者) 및 하인(下人)에 따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면책(面責)하거나 향중에 절교(絶交)하며, 태장(笞杖)의 체형을 주고 극심한 경우에는 촌락에서 내쫓는 출동(黜洞)의 형벌까지 있었다.
이런 점에서 향약은 촌락 내의 형사사건에 대하여 수령의 재판을 거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교화하기 위한 형사자치의 제도라고 볼 수 있다. 약장의 재판권과 처벌권은 비록 국가의 법으로 공인된 것은 아니지만 관습상으로 유효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관행되었던 그러한 촌락의 자치적 제재는 일제강점기에도 유제(遺制)로서 계속되어 전국 각지의 촌락에는 향약의 세포조직으로 동약(洞約)이 있었고, 그것에 따른 촌락 자체의 제재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일제식민통치에도 간접통치의 한 방법으로 전래하는 향약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즉, 1920년에 조선총독부 사무관으로 황해도 해주지방에서 근무할 때부터 율곡향약(栗谷鄕約)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향약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방면에 관한 연구논문까지 썼던 일본의 한 식민지관리는, 나중에 함경북도 지사가 되어 1932년에 관북향약(關北鄕約)을 만들어 도내의 각 촌락에 향약을 설치하고 일제하의 생산력 확충과 농촌진흥운동에 향약을 활용하였다.
그 밖에 다른 지방에서도 성문동약(成文洞約)은 따로 없었지만, 불효나 간통과 같은 부도덕한 짓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촌락의 연장자들이 의논하여 제재를 가하였다. 강원도의 어느 산촌에서는 일제강점기까지만 하여도 예로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비공식적인 사회통제의 제재방법이 있어서 그것으로 촌락의 사회질서가 유지되어 왔다.
촌락 자치의 총책임자인 영좌(領座)에게는 촌락 내부에서 발생하는 분쟁사건과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일부 재판권이 위임되어 있었고, 권농의 역할에 있어서도 대단한 권위가 부여되어 있었다. 촌락사람들 가운데 불효·불경·도박·절도·음란 등의 부도덕한 행위를 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촌락의 어른들과 상의하여 영좌가 죄에 대한 벌을 명령하였다.
가벼운 형벌로는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거나 볼기를 치지만, 무거운 벌로는 촌락사람들의 절교 또는 추방까지 행하였다. 영좌의 명령에 따라 대방(大方)과 청수(靑首)가 형벌을 집행하는데, 대방은 성인들을 담당하고 청수는 미성년을 담당하였다.
영좌의 권농소임은 영농준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추수가 끝난 뒤에 좋은 날을 택하여 동회를 열고 영좌가 각 농가의 식구수에 따라 농기구제작을 배당하였다.
어른 한 사람당 짚신 두 켤레와 바수거리 한 개, 각 농가당 삼태기 두 개, 다래끼 세 개, 종태기 한 개, 그 밖에도 곰배·가래 등을 배당하고, 다음해의 음력 2월 6일 좀생이날에 다시 동회를 열고 제작된 농기구를 모두 받아 촌락의 창고에 넣어두었다가 농사철에 다시 되돌려주었다.
좀생이날에는 음식을 장만하여 주연을 베풀고 좀생이를 보면서 그 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점치며 흥겹게 노는데, 특별한 사유 없이 배당받은 농기구를 만들지 못한 사람에게는 응분의 벌을 가하였다. 영좌는 또 봄에 퇴비용 떡갈나무를 베기 시작하는 명령으로 갈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서남해의 낙도에서는 각 촌락에 덕설몰이와 화지개라는 촌락공동체의 제재관행이 있어서, 도덕과 사회윤리를 어긴 사람들을 강력하게 제재하고 있었다.
덕설몰이는 부모에게 불효한 자식에게 적용되는 제재방법이다. 어떤 젊은이가 부모에게 지나칠 정도로 불효하였을 경우에는 촌락의 어른들 사이에서 미리 그 죄과가 은밀히 논의되고 동회에 부쳐져서 벌을 주기로 확정되면, 촌락사람들이 모두 모인 앞에 그 사람을 끌어내다가 짚으로 엮어 만든 멍석에 말아서 노인들의 지시에 따라 물을 끼얹으면서 태(笞)질을 하였다. 잘못을 뉘우치고 자기의 죄과를 촌락사람들에게 사과한 다음에야 그 젊은이는 풀려날 수 있었다.
또, 화지개는 부녀자의 간통이나 남자의 유부녀 겁탈 또는 강간에 적용되는 제재방법으로, 그러한 죄를 범한 사람은 덕설몰이 경우처럼 촌락사람들의 의사결정과정을 거쳐서 동회에 끌려나왔다.
양팔을 벌린 후 등 뒤에서 작대기를 팔과 함께 묶어 양팔을 내리지 못하게 고정시킨 다음, 등에는 북을 달아매고, 범행을 낱낱이 종이에 써서 앞가슴에 붙이고는 허리끈에 고삐를 매었다.
촌락의 동사(洞使) 한 사람은 앞에서 고삐를 끌고 또 한 사람은 뒤에서 범인의 등 뒤에 매달린 북을 치면서 촌락을 몇 바퀴씩 돌며, 어떠어떠한 나쁜 짓을 하였노라고 광고하며 다녔다.
이와 같이 해서 창피와 수치감을 줌으로써 범인 자신도 죄를 뉘우치게 할 뿐 아니라, 촌락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앞으로는 감히 그런 범행을 하지 못하도록 경고로써 예방하는 것이었다.
경기도 안성시의 한 촌락에서도 일제강점기에는 패륜행위를 저질렀을 경우 훼가출향(毁家黜鄕) 또는 훼가출송(毁家黜送)이라 하여 그 사람의 집을 헐어 없애고 촌락 밖으로 내쫓았다고 한다.
그리고 촌락의 공동이익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거나 죄없는 촌락사람들을 때렸을 경우에는 수화불통(水火不通)이라 하여 일체의 친교와 교환관계를 단절시킴으로써 제재를 가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동리매와 추방을 포함하는 촌락공동체의 집단제재는 바로 동일한 사회의식에 따라 촌락사람들이 상호 규제하는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의 가장 전형적인 예라 하겠다.
촌락의 공동체규범이 구속력을 갖는 근거는, 첫째 개인을 초월하는 공동체규범과 개인간의 약속이 미분화된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촌락의 공동체규범이 가족의 유교적 규범과 미분화된 채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며, 셋째는 행동과 의식의 개인적 영역과 공동의 영역이 미분화된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촌락사람들의 우리와 남에 대한 의식 때문이며, 다섯째는 개인의 다양성이나 일탈이 허용되는 범위가 매우 적다는 것이고, 여섯째는 전통적인 수치(羞恥)의 문화가 촌락사람들에게 가하는 심리적 압박이 국가의 형벌보다 더 무섭게 느껴지기 때문이며, 일곱째는 촌락공동체의 불가분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호혜성(互惠性)의 원리에 따라 공동체규범의 지지에도 상호의존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강한 구속력을 갖는 촌락의 공동체규범은 실제로 촌락 내부의 여러 가지 갈등과 분쟁을 미리 예방하고 그 통합을 이루는 데에 크게 기여한다. 예를 들면, 개인들 상호간이나 서로 다른 친족집단간 또는 전통적인 양반과 상민간, 그리고 정치적 파벌간의 대립과 갈등이 분쟁으로 노출되려고 할 때, 그러한 경계를 초월한 공동체규범이 촌락 내부의 분열을 중화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촌락공동체의 구속력 또는 제재력은 개인이 그 촌락을 떠나는 경우 효력을 상실하고 만다. 촌락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촌락의 친척이나 이웃사람들의 감시를 촌락을 떠나 다른 지방이나 도시로 나가게 되면, 개인적인 감정이나 목적에 따라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고 느끼며, 자기가 살던 촌락의 공동체규범이 행사하던 구속으로부터 해방감을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조선시대로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이후에 계속되는 촌락공동체의 규범과 구속력 및 제재력은 현재 고립된 산간촌락이나 낙도의 벽지에만 아직 남아 있을 뿐이고, 일반 농촌에서는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특히, 현대교육이 보급되고 법률지식이 널리 확산되어 있는 데다가 도시와 농촌의 빈번한 교류 및 인구의 이동 때문에 전통적인 촌락의 공동체규범과 제재력은 그 효력을 날로 상실해 가고 있다.
동리매를 맞은 사람은 때린 사람을 상대로 경찰이나 검찰에 폭행죄로 고소하는 사례가 생기고, 촌락사람들간의 분쟁을 자체적으로 해결하고자 어른들이 관여하면 남의 일에 간섭한다고 도리어 대드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 요즈음에는 어른들에게 불경(不敬)하고 부모에게 손찌검을 하는 등 불효한다고 지탄을 받는 젊은이가 있어도, 촌락의 노인들은 물론 경찰조차 그것은 친고죄(親告罪)에 해당되기 때문에 피해자인 부모가 직접 고소하지 않는 한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화된 의견이다.
요컨대, 전통적으로 연면히 계속되어 오던 촌락의 공동체규범에 의한 자체 분쟁해결이나 동리재판과 같은 형사자치의 관행이 오늘날의 촌락생활에서는 그 효력을 상실하고 단절되어 가는 것 같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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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한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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