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전통적인 촌락생활에서 자족성(自足性)이 뚜렷하게 나타났던 것은 그 당시의 환경과 기술상태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생태적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즉, 조선 말기까지 촌락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농업 이외의 다른 생업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토지에만 고착되어 있었다.
당시의 유일한 경제적 기초를 이루고 있었던 농업 자체도 가족노동에 의하여 경영되는 영세한 규모인 데다가, 농업기술의 후진성으로 노동생산성이 낮아 자급자족의 범위를 넘지 못하였고, 분업 또한 겨우 남녀간의 성별분업 정도를 넘지 못하였다.
생산물의 분배와 교환행위에 있어서도 촌락사람들의 활동은 활발하지 못하였다. 5일장(五日場) 또는 10일시(十日市)와 같은 농촌의 주변시장은 있었지만, 잉여생산이 극히 낮은 상태에서 촌락사람들의 시장경제에 대한 의존도는 매우 낮았다.
그들이 직접 생산할 수 없는 생활용품은 자신들의 생산물을 시장에 가지고 나가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물물교환을 하거나, 화폐 또는 물품화폐를 매개로 하여 시장상인과 거래함으로써 조달하였다.
각 지방의 산물과 일용잡화를 교환하는 데에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던 상인들은 주로 일정한 지역권 내의 각 정기시장을 주기적으로 돌아다니며 각자의 거래범위를 가지고 있던 보부상들이었다. 이 촌락에서 저 촌락으로 직접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행상인도 있었다.
촌락사람들의 소비유형은 원칙적으로 사회적 신분과 경제적 계층에 따라 다르다고 하겠으나, 극소수의 지주계급을 제외하고는 일반농민들의 소비수준과 그 유형은 대체로 동질적이었다.
이상과 같은 촌락 내의 생산·분배·소비활동 중에서 협동이 가장 잘 이루어지는 부문은 생산활동이었다. 우리나라의 농업은 쌀농사 위주로 경영되어 왔기 때문에 관개수리의 문제가 항상 뒤따르고, 계절에 따라 농업노동력이 집중적으로 요구되는 경우가 많다.
관개와 수리를 위하여 보(洑)나 제방을 축조하고 개수하는 데에 일시에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야 하고, 벼농사 중 모를 옮겨 심고 김을 맬 때에는 작업량이 많다.
하지만 그 작업시기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짧은 시일 내에 많은 일을 하기 위하여, 촌락의 장정들이 모두 동원되어 촌락 전체의 경작지를 차례로 돌아가면서 공동작업을 하였다. 이러한 관행이 바로 두레였다.
촌락사람들이 두레에 공동으로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공동체의식의 발로인 동시에, 또 그것은 촌락사람들의 응집력을 더욱 강화시켜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촌락의 장정들이 두레에 참가하는 것은 그 촌락의 사회적 결속력이 그들에게 강제적으로 명령하는 것이어서 개인적 자의는 거의 허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두레의 공동노동형태가 조선시대에는 어느 촌락에서나 널리 행하여졌다.
조선시대에는 두레말고도 품앗이라는 협동적 노동형태가 있었다. 이는 개인들이 하루하루를 단위로 하여 1:1로 노동을 교환하는 관행이다. 그리고 노동의 대가로는 현물이나 화폐로써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받은 품(勞動)에 대하여 품으로써 갚는 일종의 호혜적인 노동의 교환이 바로 품앗이인 것이다.
노동의 교환은 인력과 인력 사이뿐만 아니라, 인력과 축력(畜力)의 교환도 가능하며 당사자와 제3의 대행자 사이에도 교환이 가능하다. 품앗이로 하는 일은 모내기를 비롯하여 김매기나 추수 등의 논·밭 일과 퇴비·풀베기와 지붕이기 등 모든 일에 걸쳐 해당되지 않는 것이 거의 없다.
두레와 품앗이의 특성을 비교해 볼 때 그 차이점은, 첫째로 두레의 경우 촌락의 공동체적인 구속력이 가입을 강제하는 데 반하여, 품앗이의 경우에는 개인적인 자의에 따라 자유롭게 조직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두레가 1년을 통하여 볼 때 농번기 중에서도 가장 바쁜 모심기와 김매기를 중심으로 하여 비교적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지는 데 반하여, 품앗이는 그 시기와 계절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일에 일시적으로 행하여진다는 것이다.
셋째로, 작업의 종류를 비교해 볼 때 일반적으로 두레는 논벼를 재배하기 위하여 관개수리·모심기·김매기 등의 벼농사지역에서 주로 관행되는 데 반하여, 품앗이는 논농사나 밭농사를 가리지 않고 자가노동력이 부족한 모든 일에 걸쳐 행하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넷째로, 두레에는 대개 조직의 임무를 맡아보는 역원(役員)이 있고 농기(農旗)와 농악(農樂)이 있으며, 식사를 공동으로 할 뿐만 아니라 공동의 향연을 가짐으로써 촌락공동체의 연대의식과 결속력을 더욱 강하게 하는 데 반하여, 품앗이에는 그러한 조직과 기능 및 농악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레와 품앗이는 모두 촌락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의 협동과 거기에 참여하는 각 개인의 작업능력이 평등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관행되었다.
이러한 협동의 관행은 전통적인 공동체생활에서 촌락사람들의 상호의존과 부조를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또 그러한 관행 때문에 촌락사람들의 공동체의식과 상호부조관념이 더욱 더 강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두레의 공동노동관행이 약화되고 변질되었다. 예를 들면, 강원도의 어느 촌락에서는 1927년까지 두레가 계속되었으나 그 뒤로는 없어졌다고 하는데, 그 이전에 두레가 관행될 때에도 그 성격은 이미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것에서 상당히 변질된 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즉, 두레를 조직하기 전에 미리 각 호의 경영경지면적과 노동력을 사정(査定)한 다음에, 촌락 내의 농가전체경지면적을 산출하여 그 소요 노동일수를 결정하였다. 작업은 두레에 참가한 촌락주민 모두가 공동으로 하였다.
그러나 각 농가의 경영경지면적과 노동력에는 대소의 차이가 있으므로, 경영경지면적이 노동력에 비하여 작은 농가는 두레로 일한 노동량에서 자기의 경작지에 소요된 노동량을 뺀 나머지에 대하여 노임을 받고, 반대로 경영경지면적이 노동력에 비하여 큰 농가에서는 그만큼 노임을 지불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레의 공동체적 구속력이 약화되고 두레에 참가하는 촌락사람들 개개인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타산적으로 변질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품앗이는 전통적으로 개인의 사적인 자의에 따라 행하여진 1:1의 노동력의 교환이기 때문에 촌락사람들 개개인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모순되지 않는다. 따라서 두레의 협동관행은 약화되고 변질되었지만 품앗이의 협동관행은 그대로 계속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일제강점기까지 조금씩 명맥을 이어오던 두레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품앗이의 노동력교환도 더욱 약화되고 변질되었다. 농촌인구의 이촌현상(離村現象)으로 촌락 내의 인력부족이 심각해짐에 따라 농업의 기계화와 기술혁신이 진전되는 한편, 협동관행과 노동의 가치에 대한 농민들의 관념이 변화하였다.
예를 들면, 경운기·이앙기·제초기·자동탈곡기 등 농기계의 사용이 증가함에 따라 논갈기·모심기·김매기·추수·타작·운반 등의 작업량이 감소하고 용이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기계들을 이용하는 부업이 생겨서 품앗이의 빈도가 훨씬 감소되었다.
그 대신 현금으로 품을 팔고 산다는 관념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심지어 농번기에 집중적으로 일손이 필요할 때에는 촌락 안에서 충당할 수 없는 인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도시에서 남녀의 구별없이 날품으로 사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결과는 농촌사람들의 노동에 대한 가치의 변화로 나타났다. 즉, 그들의 노임에 대한 관념이 달라지고 여성과 노인인구의 노동참여가 증가하는 한편, 점차로 기업가 정신이 농촌에서도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하여 촌락의 공동체적 협동의 관행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으로 수행된 여러 가지 촌락의 공동체적 협동사업이나 개별적인 소집단의 협동이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로 나타났다.
특히, 촌락의 경제적 여유가 생기고 생활수준이 향상됨에 따라서 생산활동 이외의 공공부조와 금융 및 오락 등을 목적으로 하는 각종의 계(契) 조직을 통하여 촌락사람들의 공동체적 협동관행은 지금도 여전히 끈기있게 계속되고 있다.
혼례나 장례 때의 상호부조는 조선시대로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계속되는 협동의 관행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촌락의 공동체적 협동관행을 이해하는 데에 계의 형태와 기능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계의 성격에는 촌락공동체의 성격이 그대로 반영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기 때문에, 계의 형태와 기능의 변모는 촌락공동체의 변질을 이해하는 데에 좋은 지표가 된다.
옛날에는 촌락 전체가 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계에는 다분히 지역적 연대의식과 전통주의 및 도의적인 성격이 농후하였다. 특히, 동계(洞契)는 촌락의 전체가구를 계원으로 하며, 대부분의 경우 이장이 계장(契長)을 역임하고 유사와 소임을 1명씩 두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동계의 회합장소는 촌락의 공회당이나 동사(洞舍) 또는 넓은 사랑방이며, 그 모임에서는 주로 촌락의 여러 가지 공동사업을 결정하고 예산과 결산을 심의, 검토하며, 공식적인 회의가 끝난 다음에는 잔치가 베풀어진다.
비용은 해마다 각 호에서 징수하는 경우도 있고, 촌락의 공유재산이 있을 때는 거기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계의 비용을 충당하는 수도 있다.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계로서는 혼사계(婚事契)와 상포계(喪布契)가 있다. 혼사계는 계원의 가족 중에 혼인하는 사람이 있을 때 돈이나 필요한 물품을 급여하기 위한 것이고, 상포계는 가족 중에 노인이 있는 경우 갑자기 상을 당하였을 때에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가입하는 것으로 그 기능은 보험과 같은 것이다.
그 밖에도 문중에는 종계(宗契)나 문중계(門中契)가 있고, 자녀들의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한 학계(學契)도 있으며, 순전히 경제적인 목적으로 조직하는 식리계(殖利契), 기타 물품구입을 위한 계들이 있다. 그리고 같은 연배들의 연령집단이 친목과 오락을 목적으로 조직하는 동갑계(同甲契)나 칠성계(七星契) 같은 것들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촌락사람들의 계활동을 비롯한 대부분의 협동은 과거처럼 단순한 공동체적인 구속력이 기계적으로 촌락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때로는 어떤 공동의 목표나 사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정책적인 면에서 행정력이 강제하는 수도 있지만, 그러한 경우에는 대부분 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촌락사람들의 협동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것은 그들의 공동이익과 개인적인 이익을 충분히 고려하여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계산이 확실할 때 생기는 신념이다.
이처럼 촌락의 협동관행이 타산적으로 변화되어 감에 따라 공동체의식이 약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공동체적 협동의 여러 가지 형태는 촌락생활의 절실한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데에 큰 구실을 하고 있다. 1970년대에 성행하였던 새마을사업의 협동관행도 실은 촌락의 전통적인 공동체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