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봉석(崔鳳奭)은 1869년 1월 7일에 평양에서 최준서(崔俊瑞)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6세부터 주1을 공부하여 1885년, 평양 감영의 통인(通引)으로 발탁되었다. 평양 감영에 근무하던 1900년경, 주2 3만 냥 횡령 사건으로 평안북도 주3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였던 삭주에서 1901년, 김좌수의 딸 김정남과 결혼했다. 1902년, 삭주읍 교회 설립자이자 주4였던 백유계(白留溪)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에 입신하였다. 1903년, 잠시 평양의 본가에 돌아와 있는 동안 감리교(監理敎)의 노블(William A Noble)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904년, 삭주읍 교회의 주5가 되었다. 이 무렵 처가와 부인의 기독교 반대로 첫 번째 부인과 이혼했다. 1905년에 주6가 되었고, 양전백(梁甸伯)의 추천으로 주7이 되어 벽동(碧潼)‧ 강계(江界)‧ 위원(渭原)‧ 초산(楚山)‧ 자성(慈城)과 압록강 건너 통화현(通化縣)까지 가서 전도하였다. 1907년,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고 그해에 벽동읍 교회 주8를 맡았다. 이 무렵 삭주 교회 여집사로 남편과 사별한 조봉주와 재혼하였다. 1913년 6월,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8월, 평북노회에서 목사 주9를 받아 벽동읍 교회를 담임했다.
1914년 2월, 제5회 평북노회 전도부에서 최성주(崔聖柱) 목사와 함께 만주 지방 전도 목사로 주10을 받아 주11 남구역을 담당하였다. 1918년 8월, 평북노회에서 선천지방회의 지원으로 6개월 동안 서간도 전도 목사로 파송을 받았다. 이후에도 봉천성 통화현, 주12, 이도구(二道溝) 등을 중심으로 주13 지역에 전도를 시작해 1926년까지 28처의 교회를 설립하였다.
1923년에 남만노회장을 역임했고, 남만노회에서 평양노회로 전임하여 1927년 7월, 제12회 평양노회에서 무진 교회, 채송리 교회, 설매동 교회, 추빈리 교회 등의 임시 목사로 임명되었다. 1929년 1월, 평양노회에서 무진 교회를 사임하고, 이후 황해도 수안군(遂安郡)과 곡산군(谷山郡)을 다니며 전도 목사로 활동하였다. 1930년 1월부터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 등 평양부 12개 교회의 주14을 받아 수안군 공포면 하회리를 전도하여 하회리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 외치며 전도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1938년 9월, 장로회 총회가 주15를 결의(決議)하자 공개적으로 이를 반대하였다. 이후 평안북도 선천군 신미도(身彌島)로 피신하여 신사참배 거부운동(神社參拜 拒否運動)을 하다가 1939년 5월, 체포되어 1개월간 구속되었다. 6월에도 평양 경찰서에 다시 구속되었다. 1940년 봄부터 채정민(蔡廷敏), 이인재(李寅梓), 한상동(韓尙東), 방계성 등과 함께 평양에서 신사 주19 거부 운동을 계속하다가 그해 9월 20일, 다시 구속되었다. 그 후 전국 각지에서 잡혀 온 신사 참배 거부 운동자들과 함께 평양 형무소에 수감되어 옥중 투쟁을 전개하였다.
1944년 3월 1일, 40일 금식 주17를 시작하였다. 이어 4월 11일, 주18으로 풀려나 평양 기홀 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회복되지 못하고 4월 15일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