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운지(澐之). 호는 삼지(三池). 대대로 전의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김정(金淨)과 같이 공부하였다.
1518년(중종 13)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벼슬길에 진출하였는데, 당시 현량과천목(賢良科薦目)에서 지조와 행실이 바르고 학식과 재행(才行)이 있다고 하였다. 횡간현감이 되어서는 정사를 바르게 펴고 송사(訟事)를 사리에 맞게 처리하니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잘 따랐다.
이에 임금이 옷감 한 벌을 내려 격려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고향에 내려갔는데, 이듬해 이신(李信)이 고사(告辭)에서 대사성 김식(金湜)이 도망중에 있을 때 “나를 받아줄 사람은 최운과 영해부사 이윤검(李允儉)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고 하여 이에 연루, 체포되어 추국을 받고 전가족이 강계로 추방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죄가 풀리자 그의 아내가 유해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장사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