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자기 제조 주식회사 ( )

근대사
단체
1908년 평양에 설립되었던 자기 회사.
이칭
이칭
평양자기회사
단체
설립 시기
1908년
설립자
한삼현|윤재명|정인숙|윤성운|전재풍|이덕환|최유문 외
설립지
평안남도 평양
소재지
평안남도 평양
내용 요약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는 1908년 평양에 설립되었던 자기(磁器) 회사이다. 1908년 50원의 주식 200주를 자산으로 평양 마산동에 설립되었다. 대한제국기(1908~1910)에는 평양의 유지 자본가들을 최고경영진으로 두면서 사무직원과 기술인력은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하여 선발하고, 사무직은 조선인만을 고용하는 식으로 운영하였다. 일제식민지 시기(1910~1919)에 들어서면서 임원이 모두 교체되는 등의 위기를 겪지만, 이후 다양한 건의와 요구가 반영되어 1913년부터 연간 1,200원가량의 정부 지원금이 보조되었다.

정의
1908년 평양에 설립되었던 자기 회사.
설립 목적

대한제국기인 1905년 1월 일본 화폐의 유통을 공식 인정하는 「화폐조례」가 공포되자, 상공업자들은 심각한 주1에 휩싸였고, 이로써 근대를 향한 산업 개발은 난관에 부딪쳤다. 각지의 상인들은 절박한 경제 상황을 타개하고자 주요 도시에 주2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1905년에는 상동청년학우회(尙洞靑年學友會),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등 국가와 민족을 위해 뜻을 같이 한 지사들의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新民會)가 나서 주3 일환으로서 근대적 기업 설립의 중요성을 적극 표명하였다.

신민회는 상업계와 민족진영에서 경제 자립을 도모하고 제조업 진흥을 위한 공장들을 설립함으로써 국가 산업이 진흥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이밖에도 1908년 서북(西北), 관서(關西), 해서(海西) 지역 주4들이 조직한 서북학회(西北學會)와 1907년에 창설된 대한협회(大韓協會) 역시 교육과 식산의 부흥을 주창했던 애국계몽단체들로서 근대화 대열에 가세하였다.

변천 및 현황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는 이들의 시대적 요구와 의지에 힘입어 설립될 수 있었다. 1908년 50원의 주식 200주를 자산으로 평양 마산동에 설립되었으며, 1908년 10월 농상공부(農商工部)로부터 인허를 받았다.

당시 주식을 1,000주 증자하여 총 1,200주에 6만 원의 자본금을 모금하면서 회사를 확장해 갔다. 당시 회사의 발기인으로는 한삼현(韓三賢), 윤재명(尹在明), 정인숙(鄭仁叔), 윤성운(尹聖運), 전재풍(田在豊), 이덕환(李德煥), 최유문(崔有文) 등이었다. 그리고 주식대금의 수금처로는 평양[윤성운], 정주(定州)[이승훈(李昇薰)], 진남포(鎭南浦)[김정민(金正民)], 안악(安岳)[김용정(金庸鼎)] 등지였으며, 한성은행(漢城銀行) · 한일은행(韓一銀行) 등이 지정되었다.

주요 활동

회사 설립 목적은 평양 마산동 일대에 매장된 백토, 석영, 황색점토 등을 이용하여 조선인 전용 식기와 기타 제품을 생산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일차적으로 공급하는 것이었다. 또한, 설립 취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회사는 단순히 도자기 수급 및 유통이라는 목적을 넘어 이 시기에 대두된 근대 공업화 실현과 요업기술 저변화를 목표로 삼았다

대한제국기(1908~1910)의 상황과 활동을 살펴보자. 초대 사장인 이승훈은 회사 설립 당시 평양의 유지 자본가들을 최고경영진으로 두면서 사무직원과 기술인력은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하여 선발하였다.

우선 사무직은 조선인만을 고용하였다. 그리고 실제 제작을 담담할 기술자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동시에 각각 10명씩 채용하였다. 일본인 기술자의 고용은 회사 주주들의 협의로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 무렵 요업계의 일반적인 추세였다.

일본인 기술자들의 평균 계약은 1년으로 하였으며, 매년 재계약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일본 기술자들의 주요 업무는 일본에서 이미 수용한 서구의 도자기 제조 기술을 활용하여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었으며, 부가적으로 조선인들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조선인을 대상으로 기술력을 전수하는 교육 활동은 이 회사 설립 취지에 부합하였다.

일제식민지 시기(1910~1919)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우선 회사는 설립 초기부터 누적되어 온 운영과 재정, 그리고 제품 생산 등의 문제들을 강점 이후에도 해결하지 못하여 상당한 고충을 겪고 있었다. 무엇보다 회사 운영을 주도하였던 최고경영자들의 전면 교체로 인한 문제가 가장 심각하였다.

초대 사장이었던 이승훈이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를 가게 되는 것을 시작으로 부사장 및 기타 임원들이 모두 일선에서 물러난 것이다. 이후 1913년 중역회의를 통해 제2대 사장에 김남호(金南滈)를 선출하였다. 그러나 김남호가 이끄는 평양자기회사(平壤磁器會社)는 주5에서 수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운영 전반이 이전에 비해 그리 호전되지 못하였다. 이후 다양한 건의와 요구가 반영되어 1913년부터 연간 1,200원가량의 정부 지원금이 보조되었다.

의의 및 평가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에 대한 지원은 일제가 식민지 초기 상공업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회사령(朝鮮會社令)」을 공포하고 민족자본의 결집을 강경하게 저지하던 시점에서 이루어져 매우 이례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續篇 島山 安昌浩』(삼협문화사, 1954)

논문

엄승희, 「대한제국기 平壤磁器株式會社 설립의 성격과 의미」(『역사와 담론』 76, 호서사학회, 2015)
오미일, 「1908~1919년 平壤磁器製造株式會社의 설립과 경영」(『동방학지』 123,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4)
신용하, 「신민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복운동 (下)」 (『한국학보』 3-4, 일지사, 1977)
주석
주1

돈이 잘 융통되지 아니하여 귀함.    우리말샘

주2

개항기에 발생하였으며, 기업 · 공무원 · 전문가와 공공 의식을 지닌 시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구성된 조직체

주3

생산을 늘리고 산업을 일으킴.    우리말샘

주4

학식, 견문, 학식, 상식이 있는 사람    우리말샘

주5

1904년 영국인 베델(E. T. Bethell)[배설(裵說)]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가 한일합방 후 강제 매수당하여 조선총독부 한글판 기관지로 발행되던 일간 신문의 하나. 1945년 『서울신문』으로 개칭 발행됨.

집필자
김헌주(연세대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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