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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平壤磁器製造株式會社)

    근대사단체

     1908년평양에 설립되었던 자기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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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목명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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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1908년평양에 설립되었던 자기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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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역닫기영역열기연원 및 변천
    1908년 50원의 주식 200주를 자산으로 평양 마산동에 설립되었으며, 1908년 10월 농상공부(農商工部)로부터 인허를 받았다. 당시 주식을 1,000주 증자하여 총 1,200주에 6만원의 자본금을 모금하면서 회사를 확장해 갔다.
    당시 회사의 발기인으로는 한삼현(韓三賢)·윤재명(尹在明)·정인숙(鄭仁叔)·윤성운(尹聖運)·전재풍(田在豊)·이덕환(李德煥)·최유문(崔有文) 등이었다. 그리고 주식대금의 수금처로는 평양(윤성운)·정주(이승훈 李昇薰)·진남포(김정민 金正民)·안악(김용정 金庸鼎) 등지였으며 한성은행(漢城銀行)·한일은행(韓一銀行) 등이 지정되었다.
    주식대금 50원은 25·10·15원으로 3회에 걸쳐 납입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발기인과 수금처로 미루어 본다면, 대체로 관서지방 인사들의 참여를 통해 회사의 확대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평양에 자기회사가 설립될 수 있었던 것은 평양이 고려자기(高麗磁器) 발상지의 하나였고, 평양 부근에 도토(陶土)가 풍부하며, 실업에 대한 관심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발기인인 정인숙이 자기 제조의 기술 개발에 성공하였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으리라 짐작된다.
    회사의 주식 1, 200주는 모두 예약되어, 1909년 2월 22일까지 제1회 대금납부가 진행되었고, 1909년 4월 10일에는 평양상업회의소(平壤商業會議所)에서 총회가 개최되어 임원진이 선임되기도 하였다.
    설립은 단순한 산업 발전의 측면보다는 오히려 민족산업운동의 본보기로 이해된다. 그것은 1907년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결성된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가 추진한 사업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당시 실력양성론(實力養成論)이 대두되자 신민회에서는 고려자기가 민족산업부흥의 상징으로 이해되어, 평양에 자기회사를 세워 민족산업자본을 육성하고, 일제의 경제침략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당시 대표적인 언론 기관인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적극 호응하고 지원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회사가 창립된 지 1년 후 신민회의 간부들이 국외로 망명하게 되고, 2년 후에는 이른바 105인사건으로 신민회원들이 일제에 검거되면서,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영세자본으로 일제의 대자본에 의한 경제침략에의 대항이 현실적으로 어려웠던 이유로, 큰 성공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매일신보(每日申報)』 1913년 6월 15일자의 「자기사호운(磁器社好運)」이라는 기사에 의하면, 연간 1,200원의 보조를 얻어 일본인 기사를 초빙하였고, 중국산 석탄을 이용하여 자기를 생산하여 사업을 확대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적어도 1913년까지는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속편도산안창호(續篇島山安昌浩)』 (도산기념사업회,1954)

    • 「신민회(新民會)의 창건(創建)과 그 국권회복운동(國權恢復運動)」 하( 신용하 ,『한국학보(韓國學報)』 9,1977)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최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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