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릉 ()

조선시대사
유적
문화재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조선 제26대 고종과 명성황후의 합장릉.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건립 시기
조선 후기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고종|명성황후
소재지
경기도 남양주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70년 05월 26일 지정)
소재지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금곡동)
내용 요약

홍릉(洪陵)은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조선 제26대 고종과 명성황후의 합장릉이다. 왼쪽에 순종의 유릉이 조성되어 홍유릉이라고도 불리며, 1970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명성황후의 첫 능역은 동구릉 안으로 정하고 숙릉이라 하였으나, 1897년에 청량리에 재조성하고 능호를 홍릉이라 변경하였다. 1919년에 금곡에 고종을 국장하면서 명성황후를 다시 옮겨와 합장릉으로 조성하고 홍릉이라 하였다. 대한제국기에 황제릉의 격식을 갖추었다.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조선 제26대 고종과 명성황후의 합장릉.
건립 경위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경복궁 곤녕합에서 승하하였다. 10월 22일에 능호를 숙릉(肅陵)이라 정하고, 산릉의 터를 동구릉 내 숭릉의 오른쪽 언덕에 결정하였다. 11월 14일부터 공역을 시작하여 한창 이루었으나, 1896년 1월 18일에 고종에 의해 중단되었다.

1896년 9월 29일에 새로운 터를 모색하였다. 수많은 후보지를 간심한 끝에 12월 7일이 되어서 청량리에 봉표하고 능호를 홍릉(洪陵)으로 변경하였다. 1897년 1월에 다시 산릉의 공역을 시작하였다.

제향 공간은 정자각이 아닌 정면 5칸의 침전으로 건립하였다. 능상에는 주1을 갖추고 난간석(欄干石)으로 치장하였으며, 망주석 · 장명등 · 주2 · 주3 · 주4 · 주5 · 주6 등을 갖추었다. 10월 28일에 명성황후의 국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900년 6월부터 다시 천릉을 계획하여 23곳에 이르는 후보지를 살피기 시작하였다. 1900년 8월 24일에 금곡으로 결정하고 30일에 봉표하였으나 공역은 일정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10월 9일에 박정양의 상소로 천릉할 곳을 다시 찾았다. 10월 30일에 군장리에 주7하였으나, 한 달 가량 논란이 지속되어 11월 24일이 되서야 확정하였다. 1901년에 홍릉의 석물을 옮기기 시작하였으나 다시 중단되어 1904년에 천릉을 실행하지 못하고 천릉도감이 폐지되었다.

1919년 1월 21일에 고종의 국상이 일어나자, 금곡에 서북향으로 봉표하고 고종의 황제릉 조성을 시작하였다. 이때 천릉을 진행하다 중단되어 청량리에 있던 명성황후의 능을 옮겨 와 금곡에 합장릉으로 조성하였다.

2월 16일에 명성황후의 재궁을 옮겨 주8 안에 안치하였다. 3월 4일에 고종의 국장을 거행하여 현궁에 안치하고 밀폐하였다. 이로써 1895년 8월에 명성황후의 국상이 일어난 이후 1919년 고종의 국상까지 오랜 시간 홍릉의 조성 과정이 마무리되었다.

형태와 특징

1919년에 황제릉으로 조성된 홍릉은 조선왕릉의 제도와 다르다. 능상에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합장하고 병풍석과 난간석으로 치장하였다. 합장릉이지만, 혼유석은 하나이며 주9이 놓여 특이하다. 조선왕릉에는 향로석을 놓지 않고, 사대부 묘의 상석 앞에 주로 사용되었으나, 홍릉에는 향로석을 두었다.

능상에는 망주석과 장명등을 배치하되, 이외의 석상은 침전 앞에 두었다. 제향 공간으로 정자각 대신, 정면 5칸에 측면 4칸 규모의 침전을 팔작지붕으로 장대하게 세웠다. 전각 내부에는 주10를 두어 정자각과는 다르다.

침전 앞마당에는 향어로를 중심에 두고 양쪽으로 문석인 · 무석인 · 기린 · 코끼리 · 해태 · 해치 · 낙타 · 말 순서로 석상을 한 쌍씩 마주 보게 배치하고 석마는 2쌍을 두었다.

의의 및 평가

대한제국기에 고종 황제의 능침으로 침전을 갖추고 황제릉으로 격식을 갖추어 다양한 동물의 석상이 배치되었다. 문 · 무석인의 조각 비례가 인체 비례와 유사하고 섬세하다.

참고문헌

원전

『(명성황후)홍릉산릉도감의궤』(1895)
『고종태황제산릉주감의궤』(1919)

단행본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Ⅸ』(국립문화재연구소, 2015)
주석
주1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주2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3

능(陵) 앞에 세우는 무관(武官) 형상으로 만든 돌. 능 앞 셋째 줄의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하나씩 세운다.    우리말샘

주4

왕릉 따위의 앞에 돌로 만들어 세워 놓은 말.    우리말샘

주5

왕릉이나 큰 무덤 주위에 돌로 만들어 세운 호랑이.    우리말샘

주6

왕릉이나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돌로 만든 양 모양의 조각물.    우리말샘

주7

능(陵) 터를 미리 정하여 흙을 모아 봉분(封墳)을 하고 세우는 표.    우리말샘

주8

임금의 관(棺)을 묻던 광중(壙中).    우리말샘

주9

무덤 앞에 향로를 올려놓는 네모반듯한 돌. 탁상 모양을 새긴다.    우리말샘

주10

궁전 안의 옥좌 위나 법당의 불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    우리말샘

집필자
신지혜(건축문헌고고스튜디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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