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회사 ()

개신교
개념
한국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형성된 기독교 역사를 뜻하는 기독교용어. 한국교회사 · 한국개신교회사.
이칭
이칭
한국교회사, 한국개신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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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한국기독교회사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형성된 기독교 역사를 뜻하는 기독교용어이다. 한국교회사, 한국개신교회사라고도 한다. 기독교(개신교)는 현재 불교, 천주교와 더불어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종교이다. 또한 한국의 근대화, 독립운동, 대한민국의 건국, 그리고 민주화 운동에도 기여했다. 19세기말 의료·교육 사업으로 시작된 선교는 20세기 초 대부흥운동으로 한국인의 심성에 뿌리내렸다. 건국과정과 한국전쟁기 전후로 반공이념과 결합하기도 했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교육·의료·사회사업에 노력하면서 한국사회의 산업화·도시화와 함께 발전했다.

정의
한국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형성된 기독교 역사를 뜻하는 기독교용어. 한국교회사 · 한국개신교회사.
개설

기독교( 개신교)는 19세기 말 한국에 들어온 종교의 하나로 현재 불교, 천주교와 더불어서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종교이다. 또한 한국의 근대화, 독립운동, 대한민국의 건국, 그리고 민주화 운동에도 기여했다.

연원 및 변천
  1. 초기의 접촉과 만주 · 일본을 통한 선교

기독교 선교사로서 처음으로 한국에 발을 디딘 사람은 프로이센 프리츠 출신의 귀츨라프(K. F. A. Guetzlaff)로, 그는 1832년 당시 서해안을 탐사하며 한문 성경을 조선인에게 전하여 주었다. 그 후 1866년 영국인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가 선교와 통상을 목적으로 미국 국적의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서해안에 도착하여 평양으로 향했지만, 대동강에서 조선인 병사에 의해서 죽음을 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 기독교는 토마스를 한국 최초의 순교자로 간주하고 있다.

보다 본격적으로 한국에 선교가 시작된 것은 1870년대 만주를 통해서였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파송으로 만주에 와 있던 로스(John Ross)는 만주의 개항장인 영구(營口)에서 조선 사람들을 만나 한국 상황을 듣고,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879년에는 백홍준, 이응찬 등에게 세례를 해주었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기독교 세례였다.

1882년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은 미국인이 조선에 들어올 수 있는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해준 사건이었다. 또한 동년 9월에 박영호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동행한 이수정은 일본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미국에 한국의 변화된 상황을 설명하면서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선교사들과 함께 성경 번역을 시작하였다.

  1. 한국 선교의 시작과 발전

한국 땅에 실질적으로 선교가 시작된 것은 1884년 6월 일본 주재 미국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가 조선에 와서 고종으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다음이다.

같은 해 9월 미국 공사관의 동의로 미국장로교회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Allen)이 입국하였는데, 그는 12월의 갑신정변에서 치명상을 입은 민영익을 구해 줌으로서 왕실과 깊은 교분을 맺었다. 그 후 그는 고종의 도움을 얻어 제중원(원래의 이름은 광혜원)을 세웠다.

1885년 미국 장로교회의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미국 감리교회의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등이 입국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선교가 시작되었고, 이들은 제중원의 업무를 도우면서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배재, 이화, 경신, 정신과 같은 기독교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정부는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를 원했지만, 초기 선교사들의 사역은 의료와 교육에 한정되어 있었고, 전도는 금지되어 있었다.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였다. 청일전쟁이 보여 준 전통적인 유교의 한계와 동학혁명의 실패, 그리고 서양문명의 위력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정부는 갑오경장을 통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는 한국 사회를 새롭게 만들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입문하였고, 기독교도들은 독립협회만민공동회를 주도하면서 근대적인 민족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20세기 초 한국은 매우 어려운상황이었고, 이에 사회적인 불안을 느낀 많은 사람들은 교회에 몰려들기 시작했으며 선교사들도 이들에게 진정한 신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발생한 것이 1903년부터 시작하여 1907년에 절정을 이룬 대부흥운동이었다.

이 부흥운동은 철저한 회개와 새로운 삶으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각성을 통하여 기독교는 한국인의 심성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아울러서 신앙의 힘으로 나라를 구해 보려는 애국정신도 갖게 되었다.

  1. 일제강점기의 한국 기독교

그러나 1910년 한일합병은 한국 기독교의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다. 일제는 기본적으로 기독교를 일본이 통제하기 어려운 반일적인 단체로 보았다. 또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 암살을 기도했다는 소위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탄압하였다. 뿐만 아니라 무단통치 기간에는 각종 교육령을 만들어서 미션 스쿨을 총독부의 통제 아래 두었고, 포교 규칙을 제정해 교회의 집회와 설립도 허가를 받도록 강요했다.

일제강점기 한국 교회는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해외의 기독교인들은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듣고, 이 소식을 국내에 알려서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또한 이승훈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들은 천도교인들과 손을 잡고 3 · 1독립 운동을 했고, 기독교 조직을 동원해서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전국의 기독교는 여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고, 이에 종교단체 가운데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3 · 1독립 선언서의 자주독립국과 비폭력 정신은 기독교 정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아울러서 선교사들을 통하여 3 · 1운동의 참상을 국제사회에 알려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의 식민지 정책을 바꾸게 만들었다.

3 · 1운동 이후 한국 교회는 두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다. 하나는 보다 영적인 측면에 치중하여 그리스도의 종말을 기대하는 신비적인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물산장려운동을 통한 민족자본 육성, 교육을 통한 실력 양성, 절제운동을 통한 도덕의 재무장, 농촌계몽운동과 같은 점진적인 사회개혁 운동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 기독교는 이승만, 안창호와 같은 해외의 독립 운동가들과 연계해서 그들을 돕고, 외국의 동향을 국내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 한국 교회의 가장 큰 과제는 공산주의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기독교는 공산주의가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는 무신론 집단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동시에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사회정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기독교 사회주의적인 입장도 있었다.

1930년대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전시체제에 들어가면서 조선에서는 내선일체의 강조와 신사참배 등이 강요되었다. 이에 대해 일부 기독교는 신사참배가 종교행위가 아니고 국민의례라는 일본의 입장을 받아들였으나, 당시 한국의 가장 큰 교단인 장로교회는 이를 반대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경찰력을 동원하여 1938년 장로교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도록 했다. 또한 일제는 성결교회를 비롯한 작은 교단들의 종말신앙이 일본의 천황제와 배치된다고 해서 교단을 폐쇄시켰다.

1940년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자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철수하였고,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은 미국 유학파 목사들을 친미인사들이라는 이유로 목회 일선에서 추방하였고, 일본은 한국 기독교를 서양 기독교와 분리하여 동양적 기독교를 만들려고 하였다.

  1. 해방 이후의 한국 기독교

해방은 한국 사회에 큰 기쁨이었지만 해방 직후 남 · 북의 기독교는 각각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소련과 마찰을 빚었고,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월남하였다. 한편 남한에서는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서구적인 경험과 영어 능력 때문에 미군정의 업무에 참여하였다.

해방 후 한국 기독교는 민주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세력이 되었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주요 민족지도자들은 기독교인이었고, 특히 한국 기독교는 이승만과 더불어서 대한민국을 건국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1948년 제헌국회이윤영 목사의 기도로 시작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기독교는 한편으로는 정부와 더불어 반공전선을 강화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과 유엔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특히 미국 기독교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 막대한 원조를 제공하였다. 아울러서 한국전쟁 이후 한국 기독교는 교육, 의료, 사회사업에 힘썼고, 그 결과 급속한 성장을 경험하게 되었다.

박정희 정부 시절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의 산업화, 도시화와 함께 발전하였다. 한국 교회의 부흥운동은 한국 사회를 비관주의에서 적극적인 사고를 강조하는 낙관주의로 만들었다. 또한 1960년대의 민족복음화 운동, 1970년대의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전도대회, ‘엑스폴로 74’ 등의 대형집회를 통해서 교회는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동시에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주요 세력으로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 교회의 도움을 받아 박정희 정부의 독재에 대항해서 투쟁하였고, 산업화의 부작용과 싸우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교회 내에 내재해있던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더욱 강화되었다. 진보 기독교를 대표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1988년 한국 교회의 반공 입장이 분단을 고착화하는데 기여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한국 교회가 반공을 강조한 것은 회개해야 한다는 선언을 발표하였다.

한경직 목사를 대표로 하는 한국의 보수적인 기독교 지도자들은 여기에 반대하여 이것은 한국 기독교의 전체적인 목소리가 아니며, 외국의 영향을 받아서 한국의 현실을 무시한 일부의 의견일 뿐이라고 반박하였다. 이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1989년에 진보적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대항하여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만들었고, 한국기독교의 주류의 목소리를 대변해 왔다.

의의와 평가

19세기 말에 들어온 기독교는 한국의 근대화, 독립운동, 건국운동, 그리고 민주화운동을 통해서 오늘의 한국 사회를 건설하는데 기여했고, 그 결과 한국의 중요 종교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기독교의 역사』3(한국기독교역사학회편, 기독교문사, 2011)
『한국기독교회사』(민경배,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7)
『한국개신교사, 1832-1910』(백락준,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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