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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漫畵)

언론·방송개념용어

 사물의 형태나 사건의 성격을 과장된 표현 또는 생략된 표현으로 웃음의 소재나 풍자의 대상으로 삼은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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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용어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사물의 형태나 사건의 성격을 과장된 표현 또는 생략된 표현으로 웃음의 소재나 풍자의 대상으로 삼은 회화.
영역닫기영역열기개관
만화는 시국풍자가 될 수도 있고 인간생활의 표리(表裏)를 표현할 수도 있으며, 은유와 비유로써 우의성(寓意性)을 담기도 한다. 일반회화가 새로운 시각이나 조형으로 사물을 미화하고 표현하는 데 역점을 둔다면, 만화는 그 사물의 숨겨진 내면의 성격이나 단면을 파헤쳐 표현하거나 다른 사물과 비유, 암시하거나 과장, 풍자함으로써 보다 많은 독자나 관중의 호응을 받고자 하는 데 역점을 둔다.
만화의 유형을 크게 분류하면 그 대상에 따라 성인만화와 아동만화로 나뉜다. 성인만화는 다시 내용에 따라 시사만화·유머만화·극화(劇畫)로 나눌 수 있다. 또한 표현양식에 따라 한칸(1컷) 만화와 네칸(4컷) 만화, 그리고 네 장면 이상이 연결되어 일의 진행을 차례로 표현하는 연속만화로 분류된다. 또한 특수한 형태로 만화영화(漫畫映畫, animation)가 있는데 이에는 다시 텔레비전용·영화용 및 광고용이 있다.
유럽에서는 만화를 캐리커처(caricature)라고 부르며, 영국·미국 등지에서는 전반적으로 카툰(cartoon)이라고 부른다. 또 여러 장면을 연결시킨 유머만화는 코믹 스트립스(comic strips)라고 부른다. 근래에 와서는 대체로 만화로 그린 인물화를 캐리커처라고 부르는데, 그 어원은 이탈리아어의 caricare(‘과장한다’는 뜻)에서 유래한다.
18세기 유럽에서 한때 가두인형극 「펀치와 쥬리(Punch and Jury)」가 인기를 끌었는데, 이 펀치라는 주인공 이름을 따서 영국에서는 1841년에 만화잡지 『펀치(PUNCH)』를 발행하였다.
그 뒤 영국인 와그만(Wagman,C.)이 일본에 건너가 1862년에 요코하마 거류지에서 만화잡지 『저팬펀치』를 발행하였으며, 여기에서 유래되어 당시의 일본에선 만화를 ‘펀치화(punch畫)’라 부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09년 『대한민보(大韓民報)』에 실린 시사만화를 ‘삽화(揷畫)’라고 불렀으며, 1920년에 창간된 『조선일보』에서는 ‘철필사진(鐵筆寫眞)’, 『동아일보』에서는 ‘그림이야기’라 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3년 이후부터는 만화로 통일시켜 부르게 되었다. 대체로 우리나라와 중국·일본 등 한자를 쓰는 나라에서는 희평(戱評)·희화(戱畫) 또는 풍자화라고 부르다가, 만연(漫然)히 그린다는 뜻에서 만화로 굳어져 표기되기 시작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기원
남프랑스의 라스코(Lascaux) 동굴벽화와 스페인의 알타미라(Altamira) 동굴벽화에 남겨진 고대원시인의 벽화와 초기피라미드 내부에 그려진 벽화 속에는 동물들을 의인화한 그림들이 남아 있는데 이것을 만화의 원조로 볼 수 있다.
기원전 1세기 때의 것으로 고대로마시대의 항아리 등에 그려진 「솔로몬왕의 심판」 같은 것은 그 내용성과 표현기법에 있어 근대만화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르네상스시대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가 괴승(怪僧) 사보나롤라(Savonarola)의 사형집행을 캐리커처로 그리는 등 많은 데생형식의 만화를 그렸다.
보슈(Bosch,H.)의 괴기동판화와 브뢰겔(Brueghel,P.)의 은유풍자화 및 18세기 스페인의 귀재 고야(Goya,F.)가 그린 동판화 시리즈 「로스 카포리코스」 등은 우의가 담긴 그림으로 만화의 영역에 포함된다. 또한 영국의 호가스(Hogarth,W.)의 세태묘사는 보다 과장된 수법으로 근대만화를 본 궤도에 올려놓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당시의 우리나라에서는 조영석(趙榮祏)의 서민풍속도인 「새참도」 등이 간략한 선묘로 인물의 특성을 잘 표현한 희화풍의 작품으로 나타났다. 또한 김홍도(金弘道)의 서민풍속도 시리즈는 자유분방한 모필화로 풍부한 표정묘사를 능숙히 함으로써 인간의 내면성격까지 느끼게 하는 등 만화의 커다란 요소를 지니고 있어, 우리나라 만화의 원조라 부를 수 있다.
같은 시대의 신윤복(申潤福)은 「단오풍정도(端午風情圖)」에서 목욕하는 여인들을 훔쳐보는 악동의 모습을 담는 등 희화를 남겨놓고 있다. 이렇게 만화의 전신은 풍자화로서 이것이 인쇄술, 매스미디어의 발달과 함께 대중사회가 대두되면서 지금처럼 풍자와 유머를 지닌 그림 있는 희화로 변모, 발전하게 된 것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시사만화
모든 시사적인 문제를 다룬 만화를 시사만화라 한다. 이것은 정치·경제·문화 전반에 걸친 현상을 풍자하는 만화이다. 정치 분야를 집약, 표현할 경우는 정치만화라고도 부른다. 이 만화는 어떤 사회현실이나 정치상황의 모순을 풍자하거나 비평함으로써 독자의 공감을 받거나 계도·선전을 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유럽에서는 18세기경부터, 우리나라에서는 19세기경부터 인쇄술과 신문의 발달과정에 병행하여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신문이라 할 수 있는 『한성순보(漢城旬報)』나 신문의 대중화를 일으킨 『독립신문(獨立新聞)』 등 초기의 신문에서는 광고란에 만화풍의 그림이 실렸을 뿐 시사성을 다룬 만화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 뒤 1909년 6월 창간된 『대한민보』는 항일운동단체인 대한협회(大韓協會)의 기관지 성격으로 발간되었는데, 이 신문에서는 창간호부터 1면에 시사만화를 실었다. 즉 ‘大韓民報’의 네 글씨를 창간취지에 맞추어 풀이를 한 만화인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시사만화라 볼 수 있다.
이보다 앞서서 1908년에 유길준(兪吉濬)에 의하여 발간된 『노동야학독본(勞動夜學讀本)』이라는 B6판 크기의 책에는 전면에 걸쳐 신사가 한 노동자를 계몽하는 삽화풍의 그림이 실려 있는데, 화면 속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그 인물들 주변에 들어가 있어 만화풍의 삽화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비하여 『대한민보』의 만화는 그 내용이나 화풍에 있어서 완전한 시사만화의 조건을 갖춘 것이었다.
『대한민보』는 동판시설을 갖추지 못한 인쇄소에서 목판에 조각을 하여 찍은 까닭에 선이 부드럽지 않고 투박하였다. 그림은 주로 이도영(李道榮)이 그렸고, 이우승(李愚升)이 조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도영은 지면에서 관재(貫齋) 또는 벽허자(碧虛子)라는 필명을 썼는데, 당시의 일진회(一進會) 기관지 『국민신보(國民新報)』의 논조에 대하여 친일기자의 볼기를 때리는 만화를 그리는 등 구국정신을 고취, 계몽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또한 1907년에 체결된 정미조약에 의하여 구한국군대가 해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는 버젓이 군복을 착용하고 다녔다. 이를 풍자하여 『대한민보』 만화는 “이검일병무사의(利劍一柄武士儀) 벌거벗고 환도 찻군”이라는 설명과 함께 배가 불룩한 초로의 신사가 벌거벗은 허리에 긴 칼을 차고 군대식 경례를 붙이는 장면을 표현함으로써 당시의 친일고관을 신랄하게 풍자하였다.
1909년 7월 18일자에는 전기회사의 독점과 전차의 폭리를 풍자한 만화 「고복불안(高腹弗安)」을 실었고, 1910년 6월부터는 「금수재판(禽獸裁判)」이라는 반일 풍자소설을 연재하였는데 여기에도 만화가 삽화로 실렸다. 그 중의 하나는 일본인과 친일파를 풍자한 것으로 남의 나라 모방을 잘하는 일본인과 친일파를 신사복 입은 원숭이로 표현하였다.
1910년에 들어서자 일본통감부는 언론을 더욱 압박하기 시작하여 『대한민보』의 만화와 기사는 수시로 먹칠을 당하여 판매되었는데, 당시에 자주 삭제되던 『황성신문(皇城新聞)』·『제국신문(帝國新聞)』과 더불어 사람들은 ‘흑판신문’ 또는 ‘벽돌신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한편, 1906년 9월 1일자로 통감부에서 기관지로 『경성일보(京城日報)』를 발행하였는데, 여기에 실린 만화들은 시사만화는 적었고 일반 유머만화·풍속만화·아동만화가 주로 실렸으며, 초기에는 일본인의 것을 주로 실었다.
민족항일기에 들어서서는 한때 시사만화가 국내에서 그 자취를 감추었으나 미국 등의 교포신문에는 시사만화가 활발히 게재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미주와 하와이의 교민통합체인 국민회(國民會)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를 들 수 있다.
『신한민보』는 1913년 국치일인 8월 29일에 「한일협약도(韓日脅約圖)」라는 제목으로 강제조약을 체결하고 있는 대신들을 묘사한 만화를 실었다. 이 밖에도 매 국치일에 만화를 실어 일제의 포악함을 비난하고 우리 국민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192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며 시사만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1920년 4월 1일에 창간된 『동아일보』는 창간호 때부터 만화가 실렸다. 창간회원의 한 사람인 김동성(金東成)은 창간이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만화를 비롯하여, 네칸 연속만화 형식으로 일제의 정책을 비판하거나 한국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계몽적인 내용을 천리구(千里駒)라는 필명으로 발표하였다. 또 1923년부터는 독자만화를 공모하여 ‘동아만화’라는 고정란에 시사만평과 일반 세속만화를 연재하였다.
1920년 3월 5일에 창간된 『조선일보』는 1924년 신년특집호 때부터 해외만화를 실었고, 1924년 10월부터 본격적인 연재만화 「멍텅구리」를 처음으로 장기간에 걸쳐 연재하였다. 이 만화의 내용은 이상협(李相協)과 안재홍(安在鴻)이 꾸몄고 그림은 노수현(盧壽鉉)이 그렸다. 최멍텅·신옥매·윤바람이 주인공으로 「헛물켜기」·「련애생활」·「자작자급」·「가뎡생활」 등의 시리즈로 부제목이 붙었다.
멍텅구리는 비록 미국만화 「매기와 지그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는 하나 국내 최초의 장편 신문연재만화로서 한국만화의 뿌리를 내리게 한 효시였다. 1926년에 이 만화는 당시로는 드물게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또한 노수현은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에 이관구(李寬求)의 내용으로 「정만서」라는 만화를 연재하기도 하였다.
1924년 11월부터 『조선일보』는 ‘철필사진’이라는 고정란으로 독자들이 투고한 만화를 꾸준히 실었는데, 첫 당선작으로 지성채(池盛彩)의 「쥐띠와 개띠의 대화」가 실렸다.
또, 안석주(安碩柱)는 1924년부터 1930년대 사이에 당시 3대 신문인 『조선일보』·『동아일보』·『시대일보』와 여러 잡지에 시사만평을 비롯, 유머만화만화삽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그렸는데, 『조선일보』에는 「가상소견(街上所見)」이라는 제목으로 시리즈를, 『동아일보』에는 1925년 1월부터 「허풍선이 모험기담(冒險奇譚)」을 네칸 만화로 연재하였다.
『동아일보』는 1933년 7월부터 간헐적으로 이상범(李象範)의 시사만화를 싣기도 하였다. 또한 최영수(崔永秀)의 만화 「뚱딴지」를 1938년 3월부터 연재하였다. 1924년 3월 31일에 창간된 『시대일보(時代日報)』에는 독자만화인 「시대만화(時代漫畫)」를 비롯, 최초의 해외연재만화로서 미국의 맥마누스의 「엉석바지」를 연재하였다.
당시의 일제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報)』는 1938년 4월 29일부터 『매일신보(每日新報)』로 제호를 바꾸었는데, 1941년 1월 4일부터는 김규택(金奎澤)의 만평을 실었다. 김규택은 강소(江素)라는 필명으로 「애시선생행실록(愛時先生行實錄)」을 네칸 만화로 연재하였다.
한편, 1930년 말경에는 현실적인 현상에 대한 만문만화(漫文漫畫)의 형식을 가진 풍자화가 등장하였다. 예를 들면 모던걸·모던보이의 허영, 사치풍조 등을 풍자하면서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고 민족의 자각을 호소하는, 글과 그림이 분리되어 표현되는 특수한 형태의 만화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것이 완전히 말살되기 시작한 1940년대에 들어와서 이러한 시사성이 있는 만화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8·15광복 후에는 일본에서 펜화로 삽화를 그리던 김용환(金龍煥)·김의환(金義煥) 형제가 귀국하여 당시 『새한민보』 표지에 시사만화를 연재하던 김규택과 여러 지상에 기고하던 정현웅(鄭玄雄)·임동은(林同恩)과 더불어 활약하였으며, 『조선일보』에는 모필로 그린 김규택의 시사만화가 꾸준히 나왔다.
김용환은 영자지 『서울타임스 Seoul Times』에 「코주부」를 연재하다가, 1953년부터는 『코리언 리퍼블릭(Korean Republic)』에 시사만화와 「코주부」를 장기간 연재하였으며, 영문판 시사만화집을 냈다. 6·25전쟁을 전후하여 만화전문 주간지 『만화뉴스』·『만화신보』·『만화신문』·『만화주보』 등이 발간되었다.
환도 뒤에는 김성환(金星煥)이 『세태만상』이라는 시사만화집을 펴낸 뒤 1955년부터 『동아일보』에 「고바우영감」과 「사회만평」을 연재하기 시작하였고, 곧이어 『경향신문』에 김경언(金庚彦)의 「두꺼비」가 게재되었는데, 이것을 안의섭(安義燮)이 승계하여 「경향만평」과 함께 실었다.
만화는 『조선일보』·『동아일보』·『대한일보』를 거쳐 『한국일보』에 연재되다가 『세계일보』를 거쳐 『문화일보』에 연재하던 중 1994년 작가의 별세로 끝을 맺었다.
한편 부산에서 발간하던 『국제신문』에는 김일소(金一笑)의 시사만화가 꾸준히 실렸고, 『연합신문』에는 정한기(鄭漢基)의 「허사비」(1956)가, 『세계일보』에는 박기정(朴基禎)의 「사회만보(社會漫步)」와 「뚱딴지」(1957)가, 1960년부터 신동헌(申東憲)의 「시사만평」이 게재되었다. 『경향신문』에서 「경향만평」(1961)을 그리던 백인수(白寅洙)는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겨 「동아희평(東亞戱評)」(1964)을 담당하다가 1997년에 끝마쳤다.
『조선일보』에는 김경언의 「고구마(高句馬)」(1964)가 연재되었다. 정운경(鄭雲耕)의 「왈순아지매」는 여성잡지 『여원』 1958년 8월호에 최초 게재되었다가 1963년에는 동명의 영화(이성구 감독, 도금봉 주연)로 개봉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1964년부터는 『대한일보』에 연재되었다. 1967년 『경향신문』(2,236회)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75년부터 2002년까지 『중앙일보』(8,829회)에 연재되었다. 정윤경이 박기정과 함께 한 「중앙만평」은 김회룡(金會龍)의 「회룡만평」으로 연재되다 현재 「박용석 만평」으로 『중앙일보』에 연재되고 있다. 또한, 신동헌의 「너털주사」(1969)와 길창덕(吉昌悳)의 「나원참여사」(1973)가 연재되기도 하였다.
1965년부터 『중앙일보』의 「시사희평(時事戱評)」을 담당해 오던 부석언(夫石言)은 『조선일보』로 옮겨와 오룡(吳龍)이라는 이름으로 「조선만평」(1973)과 「야로씨」를 연재했고, 김성환(金星煥)의 「고바우영감」은 1955년 2월 『동아일보』에 연재를 시작하여 1980년에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겼고 1992년부터 『문화일보』에 연재되어 2000년 9월 29일 1만 4139회로 종료되었다. 이는 한국언론사상 최장기 연재 네컷만화 기록이다. 또 『전남일보』에 「전일만상(全日漫想)」(1968)을 연재하던 이홍우(李泓雨)가 『동아일보』로 옮겨와 1980년 11월 「나대로선생」(1980)을 연재하여 2007년 12월 중단되었다.
『서울신문』에는 윤영옥(尹暎玉)의 「까투리여사」(1967)가 가정만화의 내용으로 장기간 연재되었고, 1973년에는 김대영(金大英)의 「애비씨」가 연재되었다. 『부산일보』에는 김세환(金世煥)이 「허사비」(1961)를 연재하다가 『경향신문』에 「청개구리」(1975)를 그렸는데, 같은 해 8월부터는 김판국(金判國)이 이를 승계하여 그렸었다.
『코리아타임스(Korea Times)』에는 백문영(白文英)의 「시사만평」(1960)과 이서지(李瑞之)의 「만평」(1967)이 연재되었으며, 『일간스포츠』에는 허어(許漁)의 「미스터 펀치」(1981)가 「스포츠만평」과 함께 연재됐었다. 안백룡(安伯龍)은 정계인물캐리커처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다가 『한국경제신문』으로 옮겨 1991년부터 시사만화 「소오갈 선생」을 게재, 2005년 4,590회로 연재를 마감했다.
지방지로는 『부산일보』 김영순(金永淳)의 「시사만평」(1954), 『전남일보』 임병성(林炳星)의 「전일만상(全日漫想)」(1952), 『전북일보』 전연상(全演相)의 「맘보군」(1956)과 권경승(權景升)의 「하여간」(1965), 『제주신문』 양병윤(梁秉允)의 「황우럭」(1968) 등이 오래된 연재물이다.
이상과 같이 한 작가와 그 주인공이 신문지면을 옮겨다니는 예가 많았으나,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어느 정도 일관된 작가와 주인공을 정착시키게 되었다. 이후로 기성작가와 신인만화가들이 각 신문에 새로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매일경제』에 김송번(金松繁)의 「꽁생원」, 『서울경제』에 박상기의 「토박이」, 『한겨레』에는 박재동(朴在東)의 「한겨레그림판」에 이어 장봉군의 만평과 김을호의 「미주알」이 실리기 시작했다.
또한 『세계일보』에는 심민섭의 「심마니」와 유기송(柳基淞)의 「세계만평」, 『경향신문』에는 독특한 선묘(線描)로 호평을 받은 김상택의 「경향만평」, 『서울신문』에는 조기영의 「대추씨」, 『한국일보』에는 고우영(高羽榮)의 만평, 『조선일보』에는 안중규(安重奎)의 「Mr. 삐삐」와 신경무(申景武)의 「조선만평」이 실리고 있으며 『동아일보』는 이홍우(李泓雨)의 「나대로 선생」이 장기간 연재중이다.
『문화일보』에는 「문화만평」을 한동주(韓東主)가 그리고 있다. 1997년부터 『조선일보』에는 특정한 만화칸막이의 제한 없이 그려지는 박광수의 「광수생각」이 연재되고 있는데, ‘신뽀리’라는 주인공을 통해 시사성에 구애되지 않고 표현되는 유머와 위트 위주의 신선한 작법이 인기를 얻고 있다. 이 밖에 『동아일보』에도 이우일의 「도날드 닭」 등이 비슷한 형태로 연재되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유머만화
1910년에서 1920년 사이에는 1칸짜리 신문만화가 비교적 시사성을 많이 띠었으나, 1924년부터 시작된 4칸 연재만화는 시사적인 공감을 유발시키기보다는 주로 우스꽝스러운 유머에 치중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앞서 언급한 『조선일보』의 「멍텅구리 헛물켜기」, 『동아일보』의 「허풍선이 모험기담」, 『시대일보』의 「구리귀신」 등이다.
이 밖에도 민족항일기에 발행되던 『조광(朝光)』·『별건곤(別乾坤)』 등의 잡지에 실린 김규택의 「억지춘향전」이나 최영수의 「코」 이야기는 모두 순수한 의미에서의 유머만화였다.
광복 후에는 신문과는 달리 잡지의 연재만화들이 대체로 유머만화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1955년 이후 각 일간지에 실린 연재만화들은 처음에는 유머만화를 지향하다가 격변하는 시국에 따라 시사만화로 성격이 바뀌었다.
그 중 각 주간지나 잡지에 실린 김용환의 「코주부」, 김성환의 초기작인 「고바우」·「꽁생원」·「고사리군」과 이상호(李相昊)의 「갈비씨」(1957, 아리랑), 박수동(朴水東)의 「탁배기교장」(1969, 새교실)과 「고인돌」(1974, 선데이서울) 등은 대표적인 순수유머만화라고 할 수 있다.
또 『신아일보』와 『매일경제신문』에 게재된 홍모래의 「재치부인」(1973년 이후)도 가정유머만화에 속한다. 정운경의 「팔푼며느리」(野談)와 길창덕의 「순악질여사」도 같은 범주에 속하며, 「고바우」·「왈순아지매」·「순악질여사」는 유머 극영화로 제작, 상영되기도 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극화
극화는 오래되지 않은 형식으로서 고우영이 1972년부터 『일간스포츠』에 장편극화 「임꺽정」·「수호지」·「삼국지」·「일지매 一枝梅」·「초한지 楚漢誌」 등을 연재하면서 극화의 기틀을 세웠다.
그 밖에도 이두호의 「까목이」와 「독대」시리즈(1970년 이후 주간중앙 등)가 연재중이다. 또한 강철수의 「샐러리맨」 시리즈가 각 주간지에 실리고 있으며, 방학기의 「감격시대」(1985, 스포츠서울)와 「임꺽정」은 성인극화로 일본에서 출판되기도 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아동만화
모든 어린이와 중·고교생 등의 청소년에게 보이기 위한 만화와 교육적 내용의 그림풀이만화를 아동만화라고 부른다. 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를 보다 풍요하게 해주며 순수한 어린이의 웃음을 찾아주어 정서함양에 이바지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1. 1. 8·15광복 전
    시사만화가 신문의 발달에 따라 신장되었듯이 아동만화는 어린이잡지의 발달에 따라 발전해 왔다. 1923년에 월간 어린이잡지로 『어린이』·『신소년』과 기독교 계통 어린이잡지인 『아이생활』이 나왔는데, 여기에는 산발적으로 단편 어린이만화가 실렸다.
    1935년에는 조선중앙일보사에서 월간 『소년중앙』을 낸 바 있는데, 『조선일보』에서 「멍텅구리」를 연재한 바 있는 노수현이 이 잡지에 「돈주머니」라는 어린이연속만화를 그렸다.
    그러나 이 만화에는 어린이가 아닌 어른들이 주인공으로 나왔다. 또 1938년의 『소년조선일보』에는 현재덕(玄在德)의 어린이만화가 실렸다. 이는 주인공이 없이 내용에 따라 그때그때 제목이 붙여지는 단편만화이었다.
    같은 『소년조선일보』에 임홍은의 동물만화가 연재되기도 하였는데 이 역시 특정한 주인공은 없었다. 또 『동아일보』 어린이난에는 그림동화 형식의 만화 「여섯동무」(1930)와 「신동이의 모험」(馬均 그림, 1931)이 연재되었고, 1936년에는 정현웅과 김현재의 아동만화가 실렸다.
  1. 2. 8·15광복 후
    1946년 2월에 창간된 주간 『소학생』은 나중에 월간으로 바뀌었는데 김의환의 「속담풀이」가 연재되었다. 조선아동문학가협회에서는 『아협그림얘기책』 시리즈로 단행본을 낸 바 있는데 마해송(馬海松) 작 「토끼와 원숭이」를 김용환이 그렸다. 그 뒤 속속 발행된 어린이잡지 『진달래』·『어린이나라』·『새동무』 등에는 정현웅·임동은·김용환·김의환·김규택 등이 참여하였다.
    이 당시의 단행본으로 세계아동문학물 『어린 예술가』·『걸리버여행기』 등이 나오기도 하였다. 6·25전쟁 시절 대구에서는 김성환의 『도토리용사』(원안 방기환)가 단행본 시리즈로 나왔으며, 환도 뒤 『학원』·『학생계』·『소년세계』 등에는 김용환의 「코주부 삼국지」, 김성환의 「꺼꾸리군·장다리군」, 신동헌의 「왈가닥·왈직이」 등이 장기간 연재되었다.
    한편, 1955년 『동아일보』 등의 일간지에 본격적으로 신문만화가 연재되기 시작하자, 『서울신문』에서는 김기율(金基律)의 아동만화 「도토리군」(1955)을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신문』은 이 밖에도 어린이난에 임창의 「삼돌이」(1962)와 「딴딴이」(1964)를, 박인성(朴仁星)의 「오뚜기」와 「꾸러기」(1965)를 연재하였다.
    『조선일보』의 소년란에서는 백인(白寅)의 「돌돌이」, 안의섭의 「그림속담」, 권영섭의 「꼬마박사」가 연재되었고, 『동아일보』에는 김용환의 「막동이의 여행기」(1958), 정운경의 「또복이」(1959), 김경언의 「깔끔이」(1963) 등이 연재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는 이재학의 「무협극화」와 허영만의 「각시탈」이 인기를 끌었다. 이현세(李賢世)는 「까치」시리즈로 필명을 날렸으며, 이후 그는 애니메이션에도 손을 댔었다. 이희재(李熺宰)의 「모래알」, 이진주(李珍珠)의 「1.2구조대」, 한희작의 성인극화, 사이로(史二路)의 「스포츠 카툰」도 유명하다.
    이 당시의 단행본으로는 김종래(金鍾來)의 「엄마찾아 삼만리」와 김원빈의 「주먹대장」, 박기준(朴基俊)의 「두통이」가 어린이들의 절찬을 받았다. 산호(珊瑚)의 「라이파이」는 SF만화형식으로 단연 두각을 나타냈는데, 그는 미국에 건너가 한국배경의 시대극화로 책을 출판하다가 다시 귀국, 역사물 『대쥬신제국사』란 그림책을 내기도 했다.
    이향원·이상무·허영만(許英萬)이 꾸준히 책을 냈으며, 1980년대 이후엔 오세영(吳世榮)이 시대배경과 시대 고증을 바탕으로 한 문학작품을 극화하기도 했다. 여류만화가인 황미나(黃美那)의 「굿바이 미스터 블랙」, 박수동(朴水東)의 「고인돌」도 많은 인기를 얻었었다.
    한편, 어린이만화잡지 『만화세계』가 나오자 여기에 김종래·임수·박기정·박광현·최상권·신동우·박기당·박기준·김경언·한성철·이재화·임창 등이 참여하였으며, 한때 어린이만화잡지붐이 일기도 하였다.
    이 당시의 잡지는 건전하게 발전하는 듯하였으나, 그 중에 유령과 해골 등을 집중적으로 다룬 괴기물로 독자의 시선을 끌려는 연재물이 있어 비난을 받았으며, 이 때부터 저질아동만화에 대한 비판이 일기 시작하였다.
    잡지와 함께 단행본도 많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경부터 단행본이 서점 상대에서 대본소 위주로 자리를 옮기며, 원고의 다량생산과 인쇄·제책의 저질화로 인하여 조제남발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어린이만화의 내용 심사에 제삼자가 개입하게 되었으니, ‘한국아동만화자율회’에서 자율적으로 통제되던 것이 문화공보부가 구성한 ‘한국아동만화윤리위원회’(1968)로 그 심의기관이 이전되었다가 1970년 1월에 다시 ‘한국도서잡지윤리위원회’로 통합되었다.
    이 당시의 주요 아동만화를 보면 『새벗』에는 김성환의 「세모돌이·네모돌이」, 『소년』에는 「콩이와 들깨」 등이 연재되었으며, 『민국일보』와 『신아일보』에는 신동우의 「날쌘돌이」와 「임꺽정」·「홍길동」이 연재되었다. 또 『학원』 등에는 정운경의 동물만화 「진진돌이」와 「또복이」가 나왔다.
    1960년대부터 각 일간지에서 발행하기 시작한 소년신문인 『소년한국일보』·『소년동아일보』·『소년조선일보』 등에는 김삼(金森)·김박(金博)·김봉천(金峰千)·오원석(吳元錫)·이상무·이정문·이서지 등이 단편과 연재를 담당하였고, 김성환의 「소케트군」(소년동아일보)은 ‘소파상’을 받기도 하였다.
    『어깨동무』·『새소년』·『소년중앙』·『보물섬』 등 어린이잡지와 어린이만화잡지에는 박수동의 「오성과 한음」·「번데기야구단」과 윤승운·신문수(申文壽) 등이 어린이유머만화의 세계를 지켜왔다.
    어린이잡지들은 처음에는 만화부록을 많이 내다가 본지 자체의 내용을 대부분 만화로 편집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어린이잡지가 아닌 어린이만화잡지 같은 인상을 주게 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전후의 어린이만화가 일본만화의 모작이라는 비난을 받아온 데 비하여,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일본만화의 영향을 받은 경향은 있으나 모작이라는 비판은 현저히 감소되고 있다.
    또 어린이만화와 극화와의 절충형 표현만화가 증가되고 있는 추세에 있다. 이러한 절충표현은 가까운 일본의 주간만화잡지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극화 형식의 만화에서는 점차 어린이만화와 성인극화 사이의 그림 구분이 애매해져서 그 내용으로 구별하고 있는 형편이다.
    최근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청소년극화는 특별한 장르가 있는 것은 아니고, 어린이유머만화와 성인극화와의 중간성격을 띤 만화를 가리켜 청소년극화라고 이름지을 수 있다. 청소년만화나 극화는 성인극화와의 차이점이나 구별이 뚜렷하지 않고, 다만 청소년대상의 신문·잡지에 실리느냐 또는 일반 주간지·일간지에 실리느냐 하는 차이로 구별되는 것이다.
    또, 내용상 성인극화에서는 성인세계에서의 남녀관계의 표현이 있을 수 있겠고, 청소년 극화에선 청소년층의 담백한 성격의 부각이라거나 스포츠관계의 배후설정으로 상황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으로 구별지을 수도 있다.
    여기에는 이우정·이향원·이상무 등의 연재물이 속하며, 허영만의 「이강토」시리즈와 이현세의 「까치」 시리즈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은 영화화되어 청소년관객의 대단한 인기를 끌기도 하였다.
    만화영화는 본래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즐길 수 있는 것이나, 우리 나라에서는 그 범위가 그리 넓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동헌의 「홍길동」이 최초로 단독상영된 본격 만화영화였다. 곧이어 「호피와 차돌바위」가 제작, 상영되어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만화영화가 기업화되지는 못하였다. 이 밖에 몇 개의 만화영화업체가 있었으나 외국영화사의 주문에 의한 단편물이거나 광고용 만화영화를 제작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후 TV에 일본애니메이션이 등장하기 시작, 한때 한국만화애니메이션이나 만화영화는 숨을 죽이는 듯했으나 김수정(金水正)이 창안한 「아기공룡 둘리」는 그 독특한 캐릭터로 어린이들의 절찬을 받기 시작, TV애니메이션은 물론 완구류와 문구류 등에도 널리 사용되면서 만화영화의 기본 요소가 되는 캐릭터 산업으로서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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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만화는 작가의 성격을 기준으로 볼 때 몇 단계의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초기는 일반화가에 의한 여기(餘技)로서의 만화시대 또는 화가와 만화가의 겸업시대(노심선·이도영 등)였고, 그 뒤 삽화와 만화의 겸업시대(정현웅·김용환·김의환 등)가 이어졌다.
이후 만화가의 팔방미인시대, 즉 시사물·아동물·유머물 등 여러 종류의 만화를 모두 그리던 시대(김용환·신동헌·김성환 등)를 거쳐 현재와 같이 만화의 분업시대 또는 전문화시대, 즉 시사만화가·극화만화가·아동만화가·청소년만화가 등으로 제각기 전담 분야가 생겨난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또한, 만화의 가치성에 있어서도 처음에는 만화가 어린이나 단순한 사람들의 기호물·전유물로 인정되다가, 점차 시사만화의 비중에 대하여 재인식하게 되었고, 최근에는 만화 전반에 대한 가치성의 확립으로 인하여 그 사회적인 지위가 현저히 향상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질적·양적으로 개선된 만화는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한편 아직도 좀더 발전하기 위하여 개선해야 할 문제점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을 들면, 첫째 한국적인 만화의 정립이다. 우리 만화가 과거에도 외국만화의 영향을 잘 소화시켜 우리 것으로 재생산해 내기도 하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림과 내용에 있어 외국, 특히 일본 등지의 만화의 모작이라는 지적이 종종 불거져 나온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작을 하다 보면 아이디어가 뒤따르지 못하여 그런 결과가 나오기도 하겠으나, 일본의 문화권에 근접해 있는 데다 매스미디어를 통한 정보의 근접으로 모작의 실태가 외국에까지 쉽게 알려질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국제간의 저작권 문제가 대두되고 있어, 앞으로는 극히 조심해야 할 과제 중의 하나인 것이다. 또한 그 내용을 그대로 수입, 모방할 경우 사고방식이나 옷차림 등과 관련된 또 다른 형태의 문화적 종속의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건강하고 긍정적인 내용의 만화를 정착시키는 일이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 주간만화잡지가 무제한적이고 무궤도한 애정물과 폭력물극화로 범람하고 있다. 이는 나날이 기계화되어 가고 있는 현대의 문명권 속에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욕구불만의 해소책으로서 그러한 종류의 만화가 인기품목으로서 등장하는 때문이라 하겠으나, 그것이 일정한 한계를 넘어버리면 도덕과 교육에 커다란 위협이 되는 독소가 될 수도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청소년극화가 도서잡지윤리위원회 등의 기구에 의하여 규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삼자에 의한 통제는 자칫하면 예술활동으로서의 창작의욕과 자유분방한 표현양식에 제한을 주어 순수한 의미에서의 발전에 제한을 줄 수도 있다. 따라서 만화계 자체 내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한 윤리와 책임의식에 의해 그 내용이 규제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만화의 서점화작업이다. 즉 만화를 대본소에서 서점으로 끌어내는 일이다. 4·19혁명 이후 만화가 서점 상대에서 대본소 상대로 바뀌면서 그 내용도 저속해지고 인쇄나 지질 등도 저하되어 외적·내적으로 열악한 불량만화의 범람이 일어났다.
물론 현재는 여러 가지 면에서 그러한 상황이 많이 개선되었으나, 만화를 더욱 대중화시키고 진정한 만화문화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서점을 통한 만화의 유통이 더욱 요구되는 것이다.
1958년에 김용환·신동헌이 주도한 한국만화가협회와 김성환·안의섭이 주도한 현대만화가협회가 결성되어 각각 만화가협회전과 문화단체와의 야구경기 등의 행사를 많이 주도하였으나, 5·16군사정변 후 와해되고 말았다. 그 뒤 1968년에 아동만화가협회가 새로이 발족되었고, 1977년에는 극화 분야와 어린이신문 관계만화까지 아우르는 만화가협회로 개칭되었으며, 현재 450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1960년대에는 뉴욕에 본부를 둔 국제만화가협회(NCS)에 한국만화가협회에서 4명, 현대만화가협회에서 6명이 가입한 적이 있었으나 만화가들끼리의 교환사교 정도로 그치고 말았다. 1994년에는 주로 일간신문에 관계하는 시사만화가들에 의한 한국시사만화회가 창립되어 지방지 만화가들까지 가입, 세미나 개최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안기태(安琪泰)가 『국제신문』에, 김선학(金善鶴)이 『경남신문』에, 신현준(申鉉俊)이 『충청일보』에, 하종갑(河鐘甲)이 『신경남일보』에 꾸준히 연재중이며, 이 밖에 만화평론가나 스토리작가들의 군소모임도 있다. 만화평론가로서 한국만화문화연구원을 운영하는 손상익(孫相翼)은 『만화평론집』·『한국만화통사』 상·하권을 내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편 1990년대 들어서서 공주전문대학을 비롯 순천대학교·상명대학교·세종대학교 등 12개 대학에 만화학과가 정규과목으로 채택되었으나, 임청산(林淸山)과 윤영옥이 정규강의를 맡았을 뿐 아직도 정착단계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한국회화소사』(이동주,서문당,1973)

  • 『한국신문사론고』(최준,일조각,1976)

  • 『한국시사만화사』(이해창,일지사,1982)

  • 『한국의 미』-풍속화-(안휘준 감수,중앙일보사,1983)

  • 『한국신문만화사』(윤영옥,열화당,1986)

  • 「한국신문만화약사」(김성환,『저널리즘』 1973. 여름호)

  • 「신문만화의 이론과 현실」(『신문연구』,1977. 봄호)

  • 『漫畵의 歷史』(日本 美術出版社)

  • 『만화의 세계사』(토마스 넬슨 앤 손스)

  • 『미국 국제정치만화선』(빈탁북스)

  • 『東西漫畵集』(日本 中央美術社)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개정 (1997년)
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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