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에 경상남도 민속문화재(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원동역에서 서북쪽으로 약 2㎞ 떨어진 낙동강가의 논 가운데 100평 가량의 대지와 10평 정도의 건평으로 되어 있으며, 뱃집의 형태를 띠고 있다. 3동으로 된 건물이며 마룻대[上樑]가 이중으로 되어 있고 기둥이나 도리, 추녀와 기와 및 이입궁(二入宮)과 사분합(四分閤) 등은 고색이 창연하다.
건조연대를 정확하게 알 길은 없으나, 현재 건물의 상량문에 의하면 1644년(인조 22)에 개조하였으며, 1708년(숙종 34)에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 권22에 가야진사의 기록이 있음을 감안하면 조선 성종조 이전으로 소급이 가능하다. 『양산군읍지』에 따르면 가야진은 신라가 가야국을 정벌할 때 내왕하던 나루터라 하였으므로, 가야시대에 제당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으며, 당집에는 ‘가야진지신(伽倻津之神)’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공주의 웅진사(熊津祠)와 함께 중사(中祀)로 춘추에 치제를 모시는데, 나라에서 향축을 하사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제향이 국가적 행사였음을 알 수 있다. 이전에는 음력 2월과 8월의 초정일(初丁日), 또는 초해일(初亥日)에 도백 · 수령이 제관이 되어 모셨다고 하는데, 요즈음에도 군수 · 면장이 주관을 하고 있다.
약 200여 가구가 사는 용당리에 서낭당이 3곳이나 되고 서낭제를 행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미루어볼 때, 가야진사는 마을수호신이 아닌 진신(津神)을 모신 제당임을 알 수 있다. 이같이 수신 또는 용신을 모시기 때문에 이곳은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용당리 앞을 흐르는 낙동강하류의 용산 밑에는 용소(龍沼)가 있어 여기에 황룡 한마리와 청룡 두마리가 살고 있었다는 용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제사 때에는 메 · 탕 · 나물 등의 제수를 반드시 3그릇씩 놓고 제사지낸다. 제례의 경비는 가야진사에 속한 위전(位田) 600평이 있어 거기에서 소출되는 것으로 충당하며 제례위원 8명이 주관하고 있다. 아직까지 제례에 대한 근신의식은 강하여 제물을 살 때 값을 깎지 않으며, 대축(大祝)은 제사 전후 3일간 목욕재계한다. 가야진사는 옛 건조물로서의 가치와 민속적 제의로서의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