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부의 기원은 노비제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물론 노비제도가 무너지자 비(婢)의 신분은 반드시 노비에 국한되지 않았고, 수양아(收養兒)나 소작인의 딸도 주인집의 가사노동에 부려지기도 하였다.
1894년에 노비제도가 폐지되었으나, 자립능력이 없던 노비들은 주인집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주인집에 기거하는 대가로 무상노동을 제공하거나 약소한 급료를 받았는데, 하녀나 식비(食婢), 또는 식모(食母) 등으로 불리었다.
이들의 처지는 원칙적으로 자유롭지만, 실생활에서는 주인 가족들에게 차별을 받았다. 그러나 사회와 경제가 발달하면서 그들의 신분은 더 이상 노비와 연결되지 않았다. 즉, 빈한한 가정 출신의 젊은 처녀들이 가계를 보충하기 위해 혼인하기 전까지 행하는 일종의 출가노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산업화가 되기 이전에는 여성의 취업기회가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여성노동자 가운데 식모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전되자 많은 저임금 · 미숙련의 여성노동자가 공장노동에 필요하게 되었으므로, 예속적 지위를 감수해야 하는 식모보다는 공장노동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대두되었다.
한편,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식모라는 호칭에 내포되어 있던 모멸적 의미를 없애기 위해 호칭이 가정부로 바뀌게 되었다. 또한, 실제 임금도 공장노동자를 웃돌았고, 노골적인 차별대우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남의집살이는 천박하다는 관념이 강인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가정부가 되려는 사람이 적어 가정부를 고용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졌다.
따라서, 시간이 갈수록 가정부를 고용하고 있는 가정의 숫자가 줄어들었으며, 적어도 중산층 이상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가정이라야 가정부를 고용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미혼여성인 가정부는 점차 사라지고, 주로 기혼의 도시 부녀들이 출퇴근하며 가사를 도와주는 파출부제도가 확산되었다.
가정부와 파출부가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파출부는 임금을 시간당으로 계산하며 알선기관에 등록하고 회비를 내는 반면, 가정부는 월급제이며 혈연 · 지연 등의 연줄을 통해 고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는 점이다.
고용가정의 처지에서 볼 때는 파출부 쪽이 훨씬 대우하기가 어렵다. 한편, 간병인의 자격을 얻은 가정부는 병자가 있는 가정이나 병원의 입원환자를 돌보는 일에 고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