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의 곽수경(郭守敬)이 혼천의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하여 1276년 설계, 제작하여 1279년에 완성하였다. 이 무렵 원나라는 이슬람 천문학과 교류가 활발하여 이슬람지역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던 토키텀(Torquetum)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혼천의(또는 혼의)는 적도경위의(赤道經緯儀)와 지평경위의(地平經緯儀)로 되어 관측자의 눈을 가려 관찰할 수 없었으나, 간의는 지평경위의에 해당하는 부분을 없애고 적도좌표계에 의하여 직접 읽을 수 있다는 뜻에서 간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곽수경의 간의는 종전의 천문기구에 비하여 그 크기가 매우 크고 정밀하다.
그 구조는 기능적이고 실용적이어서 육안 관측기구이기는 하나 근대적인 천문대의 기본적인 기능을 갖춘 중요한 천문관측기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432년(세종 14)에 이천(李蕆)과 장영실(蔣英實)에게 목제로 간의를 만들게 하여 실험에 성공하자 이를 구리로 주조하게 하였다. 이는 세종 때의 천문기구 정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업적의 하나이다.
1438년에 경복궁경회루 북쪽에 간의대를 세워 대간의(大簡儀)를 설치하는 외에 휴대에 편리한 소간의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시기에 명나라에서도 원나라 때의 천문기구를 복구하는 작업이 진행되어, 1437년에 간의를 비롯한 기구들이 황보중화(皇甫仲和)에 의하여 제작된 사실로 보아 세종 때의 문화와 기술이 독창적이고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간의는 경복궁 안에 있는 간의대와 한양 북부 광화방(廣化坊)에 있었던 서운관(書雲觀)의 간의대에도 설치되어 운영되고 있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창경궁 안의 간의대에도 설치되어 그 유적이 현재에도 남아 있다.